내가 사랑하는 이곳에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 서문과 비평, 작품 속 단상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실제로 아름답다. 아름답기에 기껍게 수고를 감행하고, 그것이 내게 가깝기를 바라며 우리는 일을 한다. 추상적인 말로 뭉뚱그려지는 문장을 적으면서 나는 조금 고민을 한다.
… 이것은 미술 노동에 대한 글이다.
이게 뭐 줄임표까지 넣어 가며 할 말인가 싶다마는, 미술 노동이라는 말을 하면 쉽사리 듣는 이의 눈빛이 바뀌고는 한다. 지루해서든 불순(?)해서든, 미술에서의 노동을 논한다는 건 어쩐지 어려운 일이다. 불만 많은 노동자는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일까? 혹은 이미 열악한 조건인 걸 알면서 근근이 일을 하는 나 스스로가 찔려서일까? 혹은 마음먹고 허심탄회 털어놨던 이야기가 공연한 ‘현자타임’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 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다 화두가 나오면 누가 더 괴담을 많이 아는지 경쟁하듯 봇물 터지는 미술 노동, 계약, 일은 자리의 말미에서 다소 숙연하게 침묵으로 끝맺어지고는 한다.
꽤 부정적인 어조이기는 하나 사실 미술 노동 괴담회에 초대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자리가 충분히 ‘안전’하고 모인 이들의 위치가 엇비슷해야 솔직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글은 지난 3월 6일에 마코(Maco)가 주최하고 미노사(미술 노동자의 사랑방)가 기획하여 닷배트에서 열린 〈미노사: 협력 아카이브 세션 1〉의 후기―이자 단상―이기도 하다. 나는 총 3회차의 라운드 테이블에 고작 한 회차만, 그것도 끝까지 듣지도 못한 불량 수강생이라 놓친 것도 오해한 것도 많겠지만 이 글을 적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낯선 이들의 입에서 나온 친숙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머리에 맴돌기 마련이다.
미술 일과 미래를 함께 논하는 데에서 취하는 냉소는 모종의 학습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없다는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 것이며, 희망찬 미래라는 어조가 이 시대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탓에, 또는 그냥 그런 태도가 멋져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일 테다. 많은 미술인이 일을 벌리고, 찾고, 외주 받고, 그래서 일에 허덕이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돈을 써버려서 남는 게 없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는 게 금전적으로는 남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단 일용직 형태의 단발성 노동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11개월 근로 계약, 3개월씩 끊어 계약, 근무 조건 누락 및 무급·유급 경계의 애매한 기술 등 계약직, 파견직 등의 비정규직 계약서에는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요동치는 문장이 이어진다. 나는 그 구조의 가해와 피해에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어떠한 물음표도 없이. 냉소는 내가 한 모든 마침표를 직면하는 게 부끄러워 선택한 방식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일을 지속하게 하는 현실적인 여건을 가늠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맨다. 공공연히 미술을 좋아해서 일을 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개운하지 못했던 부분은 아름답고 즐겁다는 말이 미술 노동의 극히 일부만을 표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즐거움, 이것들이 언제나 문제다. 그러한 문장을 보는 순간 세속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부끄러워져 버리는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모으지 않은 상태에서 저를 소진하며 무언가를 실현한다는 자아실현의 감각은 함정인가? 내가 아름답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완전히 헛소리가 아닐까? 서동진이 이르게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내에서의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능력주의(meritocracy)’와 함께 예술 노동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1) “노동의 심미화, 즉 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일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 윤리’”2)에 내가 정복된 것은 아닌가. 예술이라는 이름만이 그 위로 둥둥 떠오른다.
노동과 연대라는 단어에 어떤 비장함이 느껴지는 것인지, 사실 나 스스로도 그리 자연스레 발화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활동이 코로나19 이후로 많이 맥이 끊겨서 이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3) 노동, 우리는 그것을 바란다. 당연히 이 일로 하여금 무언가를 배우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실제로 〈미노사: 협력 아카이브 세션 1〉에 모인 이들 중 그 배움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누군가도 있었고, 나는 내가 학습한 냉소에도 불구하고 그리 기술되는 문장들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것이 삽시간에 바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동료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오래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래지 않는 문장 속에서 지치거나 떠나지 않고 여전히 생생할 수 있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