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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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일흔두 번째 뉴스레터] 코마 릴리우(ʔ), 아포스트로피(')가 아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코마 릴리우(ʔ), 아포스트로피(')가 아닌]
코마 릴리우와 파‘파피네의 동종성은 공적 체계에서 이들의 누락이 효율성을 위한 재편이 아닌 토착문화의 비가시화를 의도한 지우기라는 데 있다. (돌연변이 취급을 포함한) 부차적 집단으로의 격하 또는 치환, 의도적 비명명화, 원시성의 소환, 비-장소(non-lieux)의 낙원화—이것은 식민주의적 술책의 네 가지 방식이자, 백인/시스젠더/이성애/남성 타락의 네 가지 유형이다. 벨 에포크(Belle Epoque) 프랑스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지상낙원으로 신화화되었듯, 키하라는 이제 자본으로 신식민화된 사-모아의 고급 리조트에서 우리를 ‘파라다이스 캠프’로 초대한다. ‘제3의 성’이 아닌 파‘파피네로, 생략되고, 대체되고, 고정되기를 거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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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 릴리우(ʔ, Koma Liliu)—사모아어로 ‘뒤집힌 콤마’를 뜻하는 이것은 로마자를 사용하는 폴리네시아 언어에서 성문 파열음(glottal stop)을 나타내는 자음 ‘글자’이다(발음상으로는 ‘어’와 ‘오’ 사이의 소리와 유사하다). 하와이어로는 오키나(‘okina), 타히티어로는 에타(‘eta)로 불리는 이 문자는 대소문자의 구분이 없고, 표준 영어에서 대응하는 문자가 없기 때문에 작은따옴표(’)나 아포스트로피(')로 대체된다. 그러나 구두점에 해당하는 작은따옴표나 아포스트로피와 달리, 코마 릴리우는 발음을 구별하는 엄연한 문자이기 때문에 생략할 때 단어의 의미가 바뀌어버린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50번째 주가 하와이‘이(Hawai‘i)가 아닌 하와이(Hawaii)로 표기되듯, 사-모아(Sāmoa) 역시 3음절인 ‘사모아’로 생략(혹은 축약)된다. 1,000여 개의 섬에 달하는 남태평양 군도가 ‘많은 섬(Polynesia)’으로 ‘퉁’쳐지는 것처럼.2)
일본계이자 사-모아계 예술가 유키 키하라(Yuki Kihara, b. 1975)의 작업은 토착적 관점에서는 실존하나 라틴 문자 체계에서는 삭제되는 코마 릴리우를 닮았다.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작가가 자신의 성 정체성으로 언급하는 파‘파피네(fa‘afafine)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사-모아 문화에 존재하는 4개의 성 중 하나에 해당하는 파’파피네는 ‘여성의 방식으로’라는 뜻을 가지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여성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킨다. 사-모아의 전통적인 촌락 생활에서 파‘파피네와 파‘타마(fa‘atama, 남성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물학적 여성)는 돌봄의 역할을 수행하며 문화적·사회적으로 독립적인 성으로 인정되었지만, 젠더 이분법을 전제한 식민화를 거치며 이들의 존재는 법적으로 생략되었다.3) 키하라는 '당신들의' 낙원에서 삭제되었던 그의 신체를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이 같은 범주화를 거역하고, 파‘파피네로서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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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Yuki Kihara, Fa‘afafine: In the Manner of a Woman, 2005, pigment print on paper, 75 x 87 cm each. © Courtesy of Yuki Kihara and Milford Galleries, Aotearoa New Zea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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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재현으로서 키하라의 파‘파피네 이미지가 처음 등장하는 〈파‘파피네: 여성의 방식으로 Fa‘a fafine: In the Manner of a Woman〉(2005)는 3폭화 형식으로, 관객은 시선의 이동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인물의 신체를 발견하게 된다(도 1). 사진 속 ‘그녀’는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긴 의자에 모로 누워 그녀처럼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백인 매춘부의 신체는 허리춤에 볏짚 치마를 두른 원주민 여성의 신체로 치환되고, 두 번째 사진에서 ‘그녀’는 온전한 나신의 모습으로 등장해 이국적이고 성적으로 방종한, 그리하여 지상낙원으로서의 타히티(혹은 사-모아, 혹은 그 어떤 폴리네시아의 섬)의 이미지에 기여하는 ‘어두운 처녀(dusky maiden)’의 전형처럼 보인다.4) 그러나 마지막 사진에서 키하라는 ‘그녀’의 신체에 남근을 대입함으로써—마네가 올랭피아에 체모를 그려 넣어 당대 비평가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듯—피사체를 그/그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에 위치시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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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Yuki Kihara, Fonofono o le Nuanua: Patches of the Rainbow (after Gauguin), 2020, C-print mounted behind acrylic glass, 139 x 375 cm.
© Courtesy of Yuki Kihara and Milford Galleries, Aotearoa New Zea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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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미술사의 카논(canon)을 전유하는 방식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기표를 뒤섞는 전략은 작가의 작업에 지속해서 등장한다. 키하라의 순회 프로젝트 《파라다이스 캠프 Paradise Camp》(2020-)의 일부를 구성하는 〈포노포노 오 르 누아누아: 무지개 조각들 (고갱 이후) Fonofono o le Nuanua: Patches of the Rainbow (after Gauguin)〉(2020)은 고갱의 최후 역작으로 평가되는 그림의 구도를 차용해 파‘파피네와 파‘타마의 낙원으로 재구성한다(도 2). 잘 알려져 있듯 고갱은 유럽의 문명사회와 대척점에 있는 원시의 “처녀지(virgin land)”를 희구하며 타히티로 떠났고, 그곳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5) 타히티의 화산섬으로 변형된 그의 에덴동산에서 이브는 가슴을 드러낸 원주민 여성으로, 선악과는 망고로 대체된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 키하라는 이 후기인상주의 거장의 낙원에서 삭제된 ‘사이(Vā)’ 성의 존재들에게 저마다의 색깔을 부여하고, 이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진 무지갯빛 캠프(CAMP)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한편 최근 비디오 작업 〈다윈 드랙 Darwin Drag〉(2025)에서 다윈으로 분장한 키하라는 “퀴어한 동물 퀸덤(queer animal queendom)에 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한다(도 3).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성을 바꾸는 양방향(bi-directional) 자웅동체 동식물을 생략한 것을 후회하는 그의 앞에 드랙 퀸이자 ‘요정 물고기 어머니(fairy fishmother)’인 벅윗(BUCKWHEAT)이 나타나 다윈에게 드랙 분장을 해주고, 이들은 함께 산호초를 유영하며 자웅동체 어종들을 탐구한다(도 4).6) 바닷속 다윈 드랙은 산호초와 물고기에 둘러싸여 성별을 바꾸는 종의 존재가 있음을 고백한다. 과장된 속눈썹과 연장한 손톱, 러플 장식과 시퀸 드레스. 여성적 기표를 입은 다윈에게 남태평양의 따뜻한 해류는 분리하는 선이 아닌 건너가는 장소가 되며, 비로소 그는 '여성의 방식으로' 회피했던 지적 책임을 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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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Yuki Kihara, Darwin Drag (still), 2025, single-channel video.
© Courtesy of Yuki Kihara and Milford Galleries, Aotearoa New Zealand. |
(도 4) Yuki Kihara, Darwin Drag (still), 2025, single-channel video.
© Courtesy of Yuki Kihara and Milford Galleries, Aotearoa New Zea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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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 릴리우와 파‘파피네의 동종성은 공적 체계에서 이들의 누락이 효율성을 위한 재편이 아닌 토착문화의 비가시화를 의도한 지우기라는 데 있다. (돌연변이 취급을 포함한) 부차적 집단으로의 격하 또는 치환, 의도적 비명명화, 원시성의 소환, 비-장소(non-lieux)의 낙원화—이것은 식민주의적 술책의 네 가지 방식이자, 백인/시스젠더/이성애/남성 타락의 네 가지 유형이다. 벨 에포크(Belle Epoque) 프랑스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지상낙원으로 신화화되었듯, 키하라는 이제 자본으로 신식민화된 사-모아의 고급 리조트에서 우리를 ‘파라다이스 캠프’로 초대한다.7) ‘제3의 성’이 아닌 파‘파피네로, 생략되고, 대체되고, 고정되기를 거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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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령 mai는 ‘~에서’를 뜻하는 반면, ma‘i는 ‘질병’을 의미한다. 뉴질랜드 교육부는 1960년대 장음 기호인 매크론(¯, macron)과 함께 코마 릴리우를 제외하였다가 사모아어 문해력에서 이들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2010년대 이후 교육과정에 재도입하였다. https://www.rnz.co.nz/international/pacific-news/523695/samoa-or-samoa-debate-over-the-use-of-diacritical-marks-glottal-stops-and-macrons (2026년 3월 3일 검색).
2) 폴리네시아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 프랑스 작가 샤를 드 브로스(Charles de Brosses, 1709-1777)가 고안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많다’를 뜻하는 ‘폴리스(πολύς)’와 ‘섬’을 뜻하는 ‘네소스(νῆσος)’에서 유래했다.
3) https://nga.gov.au/learn/learning-resources/appropriation-and-reclamation/yuki-kihara/ (2026년 3월 4일 검색); Kate Wolstenholme and Yuki Kihara, “‘The idea of ‘paradise’ is often understood as being heteronormative’: In conversation with Yuki Kihara,” https://sainsburycentre.ac.uk/channel/yuki-kihara-interview-darwin-drag/ (2026년 3월 4일 검색).
4) ‘어두운 처녀’ 스테레오타입에 대해서는 Marata Tamaira, “From Full Dusk to Full Tusk: Reimagining the “Dusky Maiden” through the Visual Arts,” The Contemporary Pacific 22:1 (2010): 1-35를 참조.
5) Stephen F. Eisenman, Gauguin’s Skirt (London: Thames and Hudson, 1997), 201, Ruud Welten, “Paul Gauguin and the complexity of the primitivist gaze,” Journal of Art Historiography 12 (2015): 2에서 재인용.
6) 다윈은 이 같은 순차적 자웅동체성(sequential hermaphroditism)이 발견되는 동식물을 노트에 기록했으나, 『종의 기원』에서 이러한 경우들을 ‘타락한(vitiated)’ 본능이라고 평가하며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 Fi Churchman, “Yuki Kihara: Queering Evolution,” ArtReview (7 April 2025), https://artreview.com/the-expansive-world-of-yuki-kihara-interview-fi-churchman/ (2026년 3월 12일 검색).
7) https://www.paradisecamp.ws/ (2026년 3월 12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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