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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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일흔 번째 뉴스레터] 살(SAL) 붙이기의 기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살(SAL) 붙이기의 기술]
최태훈의 작업에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조각으로 이끄는 어떠한 힘 (force)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창작 원리는 동시대적 맥락에서 매체에 누적된 현재성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조각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비조각으로의 팽창 속에서 최태훈은 어디까지가 조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소조라는 조각의 가장 내밀한 관습을 심화함으로써, 오브제에서 공간으로의 확장이 여전히 조각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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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후반 이후 현대조각은 장르 간 경계의 와해 속에서 회화, 사진, 미디어, 퍼포먼스 등 여러 장르와의 융합을 거치며 ‘설치(installation)’라는 이름 아래 불안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1979년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에서 진단했듯, 조각은 더 이상 기념비적 좌대 위의 형상이 아니라 비-풍경(not-landscape)과 비-건축(not-architecture)이라는 이중 부정의 논리 안에서 자신의 외연을 넓혀왔다. 그러나 이 확장은 곧 조각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비조각(Not-Sculpture)들을 포괄하는 혼종적 팽창이었으며, 그 결과 조각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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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조각의 위기는 한층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국의 모더니즘 조각은 사실주의 미학과 비구상적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각기 다른 이념적 한계에 갇혀 있었고,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 조성은 현대조각의 흐름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서구 미술을 답습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현대조각은 ‘입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부여받았으며, 회화·사진·퍼포먼스·영상 등 타 장르와의 이종 교배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조각은 “입체” 혹은 “설치”로 흡수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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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기의 지점에서 조각가들은 조각적 조건을 탐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조각 영역의 “확장”은 역설적으로 다매체 영상 설치작업의 소진 이후, 오브제의 물질성과 조각적 사유가 다시 중요해진 동시대 미술의 지형 변동과 맞물려 있다. 분명히, 우리는 무엇이 조각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각의 방법론을 공간에 적용하고자 하는 최태훈(Choi Taehoon, 1982–)의 시도는 혼성모방으로 가득한 설치미술의 폐허에서 조각이 바로 설 단초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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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최태훈, 〈자소상 2〉, 2020, 보조 테이블 다리들, 171×90.5×81.5cm, 사진=정희승 ⓒ최태훈 |
(도 2) 최태훈, 〈자소상 4〉, 2020, 네스팅 테이블 다리들, 169×105×87.5cm, 사진=정희승 ©최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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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훈은 조립 가능한 형태의 DIY 가구 유닛(unit)을 조합하여 ‘자소상(自塑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소상—스스로 빚은 형상—이라는 명명은 의미심장하다. 전통적으로 자소상은 조각가가 자기 자신의 형상을 직접 빚어내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최태훈은 이 개념을 기성 사물의 조합으로 전유한다. 작업에서 가구는 판매 홈페이지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선택되며, 작가는 “시스템이 나에게 추천한 가구들의 총합은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디지털 알고리즘이 매개하는 주체성과 조각적 자기-형상화(self-fashioning)를 교차시키며, 레디메이드의 전통을 뒤샹적 제스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갱신한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긴 유닛들은 수직-수평의 구조 안에서 조형적 질서를 이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질서가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형태적 유사성과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편의에 따라 가구는 ‘부엌 싱크대 패밀리’, ‘욕실 선반 패밀리’ 등으로 분류되는데, 작가는 이 분류 체계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사물을 본래의 용도로부터 분리시킨다. 〈우드타입〉 시리즈는 이케아 목제 가구를 활용하여 〈자소상〉 시리즈와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데, 균질하게 자리 잡은 가구 유닛들이 자아내는 수직-수평의 획들은 마치 자소상을 만들 때 무수히 긋게 되는 보조선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조각의 과정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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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최태훈, 〈살(SAL)-톤(Tone) 12〉, 2023, 우레탄 폼, 카트, 캐비닛, 202×64×55cm, 사진=P21 제공 |
(도 4) 최태훈, 〈살(SAL)-톤(Tone) 13〉, 2023, 우레탄 폼, 캐비닛, 155×78×42cm, 사진=P21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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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부터 최태훈은 가구를 뼈대 삼아 에폭시 폼(또는 우레탄 폼)을 뿌려 덩어리를 부풀리는 ‘살(SAL)’ 개념을 고안한다. 자소상 시리즈의 과정에 에폭시 폼을 뿌리는 과정이 더해지면 ‘살-자소상’이, 우드타입 시리즈의 과정에 더해지면 ‘살-우드타입’이 된다. 이 ‘살’ 개념은 조각사에서 캐스팅의 전 단계로, 모형제작의 수단으로 오랜 시간 활용되어온 소조(塑造, modeling)와 밀착되어 있다. 소조는 조각(彫刻, carving)—재료를 밖에서 안으로 깎아내는 절삭적 과정—과 반대로, 흙이나 유토와 같이 점성이 있는 재료를 덧붙이며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첨가적 과정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살’이라는 명명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조각은 역사적으로 인체 형상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여 근원적으로 인간형태적(anthropomorphic) 속성을 가지기에, 뼈와 살이라는 신체적 이미지와 필연적으로 맞닿는다. 즉, 심봉을 세우고 흙을 붙이고 모양을 내는 행위는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로서 뼈대에 살을 붙여 만들어지는 자소상으로 추동하는 동력이며, 또한 조각 자체를 본질적으로 지시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인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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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최태훈, 〈살(SAL)-P2〉, 2023, 우레탄 폼, 담요, 커튼, 매트, 베개 커버, 370×335×964.5cm, 사진=김진솔 ©최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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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훈의 또 다른 시리즈인 〈살-톤〉시리즈는 철재 캐비닛에 에폭시폼으로 덩어리를 낸 작 업이다. 여기에서 캐비닛은 조각의 기본이 되는 틀—석조나 목조에서 육면체의 원석(原石)이 점유하는 위치—과 같다. 석조/목조의 과정을 상상해 보면, 육면체의 석재/목재에 수직과 수평의 보조선을 그려가며 재료를 안으로 깎아 형태를 만든다. 안과 밖을 채우고 비우는 과정은 소조의 원칙을 따라가며, 캐비닛 안에 그대로 남아 기억 속 조각을 끄집어낸다. 더 나아가 작가는 가구에 뿌리던 에폭시 폼을 창틀로, 나아가 공간 전체로 가져온다. 2023년 P21 갤러리에서의 〈살(SAL)〉은 전시 공간 전체를 소조하며 설치의 형식을 띤다. 작가는 갤러리의 두 전시 공간을 소조에 사용되는 심봉(心棒)으로 상정하고, 마치 막대기에 흙을 덧대어 붙이듯 우레탄 폼을 도포했으며, 소조 제작 시 흙의 점착력을 높이기 위해 노끈을 사용하듯 커튼, 담요, 이불 등 패브릭 제품을 활용했다. 조각의 역사적 관습은 여전히 작품과 공명하고 있기에 ‘살’은 어떤 양태로 변주 되든, 여전히 조각이다. 이는 그가 조각의 조건을 타 장르와의 접합이나 장소의 맥락 등 외적 조건에서 탐구하던 기성세대의 조각가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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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분명히 해야할 것은, 이 자기-지시적인 특성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상을 조각적으로 바라보고, 집요하게 탐구한 끝에 ‘자동적으로’ 얻게 된다. 최태훈의 작업에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조각으로 이끄는 어떠한 힘 (force)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창작 원리는 동시대적 맥락에서 매체에 누적된 현재성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조각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비조각으로의 팽창 속에서 최태훈은 어디까지가 조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소조라는 조각의 가장 내밀한 관습을 심화함으로써, 오브제에서 공간으로의 확장이 여전히 조각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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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라우스는 오토마티즘에 대해 매체에 누적된 역사와 자기 지시적인 관습으로 정의한다. 그는 오토마티즘은 “작가가 스스로 전통에서 떨어져 나와 ‘무엇이든 예술이다’라는 말이 횡행하는 영역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고 느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오직 그러한 규칙만이 창작 행위에 목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가짜들의 끊임없는 위협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라 설명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언더 블루 컵』, 최종철 역, (현실문화연구, 2023), 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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