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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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아홉 번째 뉴스레터] 불확실한 관계를 수행하는 법: 고등어의 신체이미지 껴안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불확실한 관계를 수행하는 법: 고등어의 신체이미지 껴안기]
불확실한 관계는 대개 설명되기를 요구받는다. 무엇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어디까지가 이해의 범위인지 등. 그러나 어떤 관계는 끝내 명확해지지 않으며, 그 불확실성 속에서만 유지된다.
고등어의 신체이미지 작업 앞에서 이 글은 작업을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형상이 불러오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내어주며, 그것을 보는 나와 그려진 형상의 관계를 수행해보려 한다. 이 글은 신체이미지를 읽어내는 대신, 껴안는 법에 관한 짧은 기록이다.
*이 글에서 수행이란, 형상의 의미를 재현하거나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형상이 나에게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감각적 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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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관계를 수행하는 법: 고등어의 신체이미지 껴안기
유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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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021, 연필 드로잉, 각 56 x 70 cm(12점). 출처: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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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가도, 여운을 쓰게 남긴 채 사라진다. 잠시 드러냈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머릿속을 헤집어도 막연히 유추되는 수준에 머무른다. 혹은 어딘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의 앞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다. 그것들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써 내려갈수록 행간의 틈에서 점점 길을 잃는 것 같다.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사라지는 실체를 분명히 하려는 것은 나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욕심일까? 온전하지 않은 것을 온전한 체계에 가두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쩌면 쓰이거나 읽힐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은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특히 연약한 존재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벌거벗겨진 신체, 그것도 여성의 것에 관해서라면… 심지어, 은밀한 접촉에 관한 것이라면 가속도가 붙는다. 찰나에 조금이라도 솔직하지 못하면 무력하고 불행하지 못한 죄로 외면당하거나, 충실함이 지나쳐서 과한 단어로 설명되면 광기와 히스테릭으로 치부되겠지.
차라리 멀리, 더욱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으리라. 희고 검은 도상들을 벗어 둔 채 달아난 것들이 있다.
도식적인 해석은 이들에게 해롭고, 우연은 쓸모없는 명분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면을 억지로 뜯어내어 보이지 않는 것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진솔한 태도로 우리 앞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껴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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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찰나의 감정이 객체가 될 수 있을까? 분명하게 목도될 수 있는 무언가를 앞세워 계속해서 물러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뜻하지 않게 ‘믿어져 왔던’ 서사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잠시 형상이라는 베일을 쓴다. 베일을 쓴 채로 잘 펼쳐 놓으면, 현시되면서도 해석되지 않을 수 있다. ‘믿어져 왔던’ 서사로의 귀속에 저항할 수 있는 단단한 껍질을 얻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해석되는 대신 새하얀 바탕 위에 꾹꾹 눌러 담겨있다. 희고 검은 형상들은 독립하여, 견고한 사각 틀 안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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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021, 연필 드로잉, 각 56 x 70 cm(12점). 제 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제작 지원, 작가 제공.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 서울시립미술관. 2021. 사진: 글림워커픽쳐스. 출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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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사건의 전말이 아닌 태도이다.
형상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것들이 나를 향해 있음을 자각한다.
비 오고 난 뒤의 풀숲, 뿌연 안개와 보이는 냄새, 불투명한 시야, 스스로의 움직임을 자각한 뒤 안심, 축축한 발자국, 빼곡하게 돌출된 것들, 위태롭게 매달린 성숙, 사이의 절단된 신체... 뒤엉킨 심상들이 나를 향해 기묘하게 몰려들어 온다.
글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오랫동안 고여있던 서사를 위해 스스로를 감추거나 변형하지 않는다. 형상들을 앞세워 달아날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진솔하게 헤아리기 위해서 그들을 감싸안고 또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기묘함으로부터 시작된 연대는, 단순한 마주침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를 향한 내적인 알아차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바깥의 서사와 나란히 공존하면서, 이미 알려진 다른 이야기와 뒤섞이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된다.
3.
쉽게 무너지지 않을 관계의 울타리를 형성했기 때문에 바깥 서사와 성공적으로 단절했다. 이 관계를 바라보기로 한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관계에서 오는 이 불확실성1)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계에 대한 해석 대신, 형상들이 나를 가리킴을 알아차리는 것을 넘어 내가 그 형상들을 ‘수행’2)한다면 어떨까?
1) 객체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포착되지 않거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나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객체의 중심을 향해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언제나 비대칭적이며, 불확실하다.
2) 이 글에서 수행이란, 형상의 의미를 재현하거나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형상이 나에게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감각적 태도에 가깝다.
수행을 전제로 한다면, 이제 이 연약한 존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라진 감정을 대체하여 풀어낸 것은 그 감정을 잠시라도 엿볼 수 있던 때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건 울타리 내에서 관계의 연대에 집중할 수 있었던 순간에 일어났던 일이다. 달아난 것을 뒤쫓는 대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진솔함으로 감싸안아 주면 된다. 나를 사로잡은 기묘한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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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고등어, 〈신체이미지_낮풍경〉, 2019-2021, 연필 드로잉, 각 56 x 70 cm(12점). 제 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제작 지원, 작가 제공.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 서울시립미술관. 2021. 사진: 글림워커픽쳐스. 출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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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만약 내가 작은 배에 올라타서 달을 향해 물길을 가로지를 수 있다면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나뭇가지에 매달린 전등보다 밝은 달빛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물길에 뿌리내리지 않은 나무에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봐왔던 거의 모든 종류의 꽃이 총집합해 있다. 나무의 몸통은 매우 단단해 보인다. 그 위에 피어난 온갖 것들은 그 몸통의 두께만큼 무거워 보인다.
이미 다 자라버린 이형의 나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애초에 그렇게 자라나도록 태어난 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하는 걸까? 그것은 부유하고 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과 설 곳을 절박하게 감싸고 있는 뿌리의 태도적 괴리는 존재의 모순을 의미한 것일지도… 그리고 서로를 맞댄 두 여자의 초상이 있다. 저 나무의 꽃말은 사랑일까?
3) (도3)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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