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1945년으로부터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1945년은 오랫동안 ‘광복’과 ‘해방’, 즉 빼앗긴 주권의 회복이라는 민족 서사로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1945년은 단지 한반도의 해방만을 뜻하지 않는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자, 근대 식민체제의 해체와 재편을 알리는 거대한 분기점이었다. 이 해는 식민의 종결이자 냉전과 분단의 시작, 개발주의적 근대화와 반복되는 국가 폭력, 그리고 제국적 질서가 자본주의적 식민 질서로 전환된 시점을 의미한다. 『에포케 레테 2025 앤솔로지』는 바로 이 교차점에서 출발한다. ‘광복 80주년’이라는 수사 뒤편에 자리한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반복되는 폭력 속에 살아가는 세대의 감각을 ‘포스트 메모리(Postmemory)’의 언어로 기록하고자 한다.
포스트 메모리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 기록, 이미지, 서사를 매개로 전쟁과 폭력의 기억을 이어받는 세대의 감각을 일컫는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나 두 세대를 넘어 그 잔재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로서,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에포케 레테의 필진들은 포스트 메모리의 조건에서 1945년 이후의 세계를 다시금 사유한다. 이 앤솔로지는 전쟁 이후의 세대가 기억을 다시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자, 잊혀져 가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동의 연습이다. 나아가 이러한 감각을 통해 대한민국의 광복과 20세기가 겪어낸 정치적 격동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윤리적·미학적 언어로 다시 발화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우리가 이 책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내전과 점령, 학살이 이어지고, 혐오와 이기주의로 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정보와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디지털 시대의 전쟁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과잉정보의 시대에 망각의 감각 속에 살고 있다. 출근길 작은 스크린을 통해 접한 뉴스는 순식간에 휘발되고, 연대와 애도는 피로 속에 사멸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떤 ‘언어’로 전쟁 이후의 세상을 말할 것인가? 이 질문에서 예술은 가장 오래된,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응답이다. 형언할 수 없는 폭력을 마주할 때, 예술의 역할은 단지 충격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폭력 이후에도 세계가 여전히 발화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어와 이미지가 닿지 못하는 자리, 즉 말할 수 없고 보여질 수 없는 기억의 경계에서 ‘다시 말하게 하는 일’이다. 예술은 상처의 틈을 봉합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함으로써,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새로운 감각을 창안하는 일이다. 예술의 소명이란 바로 이러한 불가능한 발화의 가능성을 붙드는 일이다. 이 앤솔로지는 바로 그 예술적 행위를 ‘비평’이라는 언어로 옮겨 쓰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에포케 레테 2025 앤솔로지』의 필진들은 저마다의 감각으로 국가적 차원의 폭력과 식민주의, 그리고 전쟁을 사유하는 여러 예술가와 현장을 마주했다. 김동민은 홍진훤의 《랜덤 포레스트》 연작을 통해 사진이 사건들 간의 불연속적 연결을 드러내는 방식을 탐구한다. 랜덤하게 배치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불연속'은 폭력 이후의 사회를 응시하는 사진의 실천이다. 박예린은 엘레나 테자다-헤레라의 퍼포먼스·비디오가 페루의 독재 권력, 성·젠더 기반 폭력, 이주·노동·자원 착취가 공유하는 폭력의 구조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분석한다. 유머와 웃음을 폭력에 맞서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전략으로 읽어낸다. 배진선은 2024년 화성 아리셀 리튬공장 화재 참사를 다룬 《2025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를 분석하며,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국가적 애도’가 포착하지 못하는 틈에서 예술이 어떻게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하린은 로렌스 아부함단의 사운드 작업을 통해, 소리와 침묵이 권력과 지배의 구조를 드러내는 ‘청각의 정치학’을 탐색한다. 유희림은 최승자와 차학경의 텍스트를 통해 여성의 몸과 기억을 ‘무덤이자 기록의 장소’로 읽으며,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받아쓰기’할 것을 제안한다. 이민정은 차재민의 무빙 이미지를 기억을 대리 보충하는 기억술(hypomnesis)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예술이 제도적 아카이브가 배제한 ‘하위주체의 기억’을 재생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최은총은 권병준, 전혜주, 정승의 작업을 중심으로 기술·자본·전쟁의 복합적 구조를 비판한다. ‘투명성’이라는 믿음이 실은 권력의 시각 체계임을 드러내며, 기술을 전복하는 예술의 실천을 모색한다. 한문희는 정연두의 작업을 통해 타인의 서사를 어떻게 ‘시혜적 연민’ 없이 들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예술적 발화의 새로운 거리를 제시한다.
여덟 편의 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 이후의 기억’을 되짚으며 1945년 ‘광복 원년’을 완결된 역사가 아닌 지속되는 현재로 다시 호출한다. 필자들은 멈춰있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그 사건이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다시 감각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는 기억이라는 행위가 단지 과거의 소환이 아닌 현재와 연결된 윤리적 행동임을 보여준다.
‘에포케 레테(epoché rete)’는 ‘판단중지(epoché)’와 ‘그물망(rete)’을 결합한 이름으로,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그 사이에 생겨나는 사유의 연결망을 실험하는 비평 그룹이다. 2022년부터 격주로 미술비평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동시대 예술과 비평의 교차점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이번 앤솔로지는 그 활동의 첫 결실이자, 한국 사회의 ‘기념’이 반복될수록 희미해지는 기억의 정치학에 대한 응답이다. 본 앤솔로지는 에이독스에서 열람할 수 있다.
끝으로, 이 기획이 단지 ‘기념’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질문을 던지는 장이 되길 바란다. 세계사 연표에서 광복과 종전은 1945년 위에 고정되어 있지만, 이 사건을 현재(혹은 미래) 완료로 연장하는 일은 후세대에게 달렸다. 그렇기에 기념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성찰이어야 하며, 기억은 재생인 동시에 균열이어야 한다. 본 앤솔로지에 담긴 사유들이, 우리 시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기억과 역사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