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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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여섯 번째 뉴스레터] 유령의 거울-스크린: 죽음 이후의 사랑이 머무는 투명한 자리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유령의 거울-스크린: 죽음 이후의 사랑이 머무는 투명한 자리]
미술관의 관성적인 시간을 깨뜨리며 47분간의 압도적인 몰입을 이끌어낸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신작은, 투명 스크린과 조명 장치를 통해 전시장 전체를 영화적 제의의 공간으로 확장시킨 포스트-시네마의 예시다.
불타버린 인쇄소의 재와 다섯 개의 눈을 지닌 원숭이 유령, 그리고 관객의 시각을 찌르는 빛의 푼크툼은 태국의 비극적 현대사와 개인의 기억을 하나의 거대한 애도의 장으로 만들어 내고, ‘죽음 이후의 사랑’을 희망 없이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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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거울-스크린:
죽음 이후의 사랑이 머무는 투명한 자리
박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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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 혹은 블랙 박스에서 마저도 영상 작업이 처한 운명은 다소 위태롭다. 정보의 과잉과 짧은 호흡의 매체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영상 작품 앞은 잠시 멈추거나 빠르게 지나치는 장소로 전락하곤 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비평을 쓰는 나조차도 긴 영상 작업 앞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발길을 돌릴 때가 잦다. 실제로 여러 박물관학 연구가 증명하듯, 미술관 관객이 한 작품에 머무는 평균 시간은 불과 수십 초에 머문다. 이는 현대 미술이 파편화된 대중의 시간을 점유하는 데 얼마나 큰 고충을 겪고 있는지를 방증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2025 타이페이 비엔날레에서 마주한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의 신작 〈Love after Death (죽음 이후의 사랑)〉(2025)은 이러한 관성적 흐름에 강력한 제동을 건다. 47분에 달하는 압도적인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자리를 뜨지 않고 고정된 채 스크린을 응시한다. 미술관에서 관객들이 이토록 집단적으로, 그리고 장시간 침묵 속에 머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생경하고 압도적이다.
이러한 몰입의 힘은 단순히 서사의 흥미나 매체의 장치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태국의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비극적인 정치적 사건들과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기억들이 스크린 위에서 유령처럼 뒤섞여 흐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프레임을 넘어 전시장 전체를 영화적 무대로 확장시킨 포스트-시네마적 감각을 통해 관객이 이 거대한 서사의 파편들을 몸으로 직접 겪어 내게 만든다.1) 공간을 가득 채운 연극적 제의와 유령적 이미지들은 관객의 신체를 강력하게 결박하며, 우리를 현대사의 상처와 개인의 애도가 교차하는 47분간의 깊은 빙의 상태로 인도한다.
이 지독한 빙의는 암흑 속을 가로지르는 투명 스크린이 강령하는 것이었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이 스크린은 영상이 영사되는 기술적 토대일 뿐만 아니라, 가상과 현실 사이를 부유하는 얇은 막으로 유령처럼 존재한다. 여기서 아룬나논차이는 총천연색 정보를 거세한 흑백 영상을 선택한다. 영화사적 맥락에서 흑백은 주로 과거를 소환하는 형식이지만, 아룬나논차이에게 흑백, 특히 ‘검은색’은 불이 타고 남은 흔적, 즉 소각 행위의 잔여물이자 죽음의 색채다.2) 영상 속 제의 장면은 이를 더욱 기괴하게 시각화한다. 등장인물들은 검은 피를 뒤집어쓰거나, 눈과 입에서 눈물인지 피인지 구별되지 않는 검은 액체를 쏟아내며 허공을 응시한다(도 1}. 이는 마치 영적인 존재에 빙의된 듯한 모습이자, 거대한 폭력 앞에서 말(言)을 잃고 신체적 고통만을 토해내는 자들의 초상이다.
영상의 주 무대 중 하나인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 역시 거대한 검은 색의 메타포다. 이곳은 전시장으로 변모하기 이전 과거 태국 정부의 인쇄 독점 시설이었으나 화재로 전소된 곳으로, 근대적 지식과 기록이 불에 타 재가 된 폐허다. 작가는 이 불타버린 검은 폐허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분해되어 가는 거대한 몸체로 인식한다. 흑백의 영상 언어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지워버림으로써, 오히려 태국의 현대사와 개인의 비극을 ‘타버린 역사’라는 잿빛 맥락으로 통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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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 이후의 사랑 (Love after Death)〉, 2025, HD 비디오, 프로그래밍된 조명과 대기 효과, 모터로 구동되는 부드러운 조각, 서라운드 사운드, 47분 루프, 가변크기. 2025 타이페이 비엔날레 《지평선의 속삭임 (Whispers on the Horizon)》 전시 전경. 사진: 직접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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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유령들이 영상 속에서 배회하는 동안, 영상 전반에는 끊임없이 나직한 기도문이 겹쳐진다.3) 그러나 이 기도는 구원을 위한 간구가 아니다. 작가는 “의식의 태양”이 세계를 다시 만들어낼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희망찬 계몽의 빛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신의 응답 없는 침묵 위에서, 불타버린 인쇄소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파괴적인 의식이자 냉혹한 열기다.
특히 “답 없는 기도들과 함께” 세계가 재창조된다는 구절은 이 작품의 세계관을 관통한다. 아룬나논차이에게 재생이란 신의 은총이나 구원이 당도해서가 아니라, 구원이 조건부로 유예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비극적 순환이다. 영상 내내 주술처럼 반복되는 “분해하라”는 주문은 이 순환의 동력이다. 이는 의미와 육체,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썩고 해체되어야만 비로소 다음 반복이 가능하다는 자연의 냉혹한 섭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가 말하는 “현실을 견뎌내기 위한 노래”는 낭만적인 위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폐허가 된 현실을 무덤덤하게 살아내며, 끔찍한 해체의 과정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생물학적 본능에 가깝다. 이곳의 유령들은 생전의 섬세한 감정을 잃고, 오직 존재하려는 정동만 남은 무심하고도 서늘한 응시자들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대신, 분해와 재구성이 반복되는 이 차가운 세계를 그저 살아 내라고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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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 이후의 사랑 (Love after Death)〉, 2025, HD 비디오, 프로그래밍된 조명과 대기 효과, 모터로 구동되는 부드러운 조각, 서라운드 사운드, 47분 루프, 가변크기. 2025 타이페이 비엔날레 《지평선의 속삭임 (Whispers on the Horizon)》 전시 전경. 사진: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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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영상과 나직하게 들리는 기도문이 우리가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역사적 비극으로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Studium)의 영역을 형성한다면, 이를 찢고 들어오는 것은 ‘빛’이다. 관람객의 안정적인 영상 관람을 깨뜨리는 것은 천장에서 내려와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여러 개의 노란 전구들이다. 반투명한 스크린의 앞뒤에서 불규칙하게 진동하는 전구가 투명 스크린과 겹쳐지는 순간, 빛은 투명 스크린 흑백 영상 속 특정 인물의 얼굴이나 이름 모를 폐허의 한 구석을 돌발적으로 밝혀낸다. 박제된 과거(흑백 영상) 속에 현재의 물리적 빛이 침투하는 이 찰나, 이때 발생하는 빛의 간섭은 관객의 눈을 예상치 못하게 찌르는 푼크툼(Punctum)으로 드러난다.
영상 중반부,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는 역사가 없다’라는 자막이 떠오른다.4) 이는 기록되지 못한 자들,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자들의 분노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이 제목이 사라지자마자, 영상은 주마등처럼 빠르게 교차하며 태국의 정치적 격변과 시위 현장을 비춘다. 군중들이 켠 수천 개의 핸드폰 불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저항의 물결을 이루는 순간, 전시장 천장에 설치된 물리적 조명들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일제히 폭발하듯 점등된다(도 2).
이때의 빛은 영상 속 기도문이 말한 “의식의 태양”이 타오르는 순간이자, 너무 밝아서 차라리 눈을 멀게 하는 성스러움, 바로 현전(Presence)의 공포다.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핸드폰 불빛이 저항의 도구였듯, 전시장 안에서 폭발하는 빛은 관객을 안전한 관찰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려 역사적 격변의 현장으로 강제 소환한다. 횡으로 흐르던 흑백의 역사적 시간 (스투디움) 위에 종으로 틈입하는 이 눈부신 빛의 기둥 (푼크툼)은, 신의 광휘처럼 성스럽지만 동시에 재난처럼 폭력적이다. 관객은 이 압도적인 빛 앞에서 시각을 잃고, 오직 전율하는 신체로만 역사를 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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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 이후의 사랑 (Love after Death)〉, 2025, HD 비디오, 프로그래밍된 조명과 대기 효과, 모터로 구동되는 부드러운 조각, 서라운드 사운드, 47분 루프, 가변크기. 2025 타이페이 비엔날레 《지평선의 속삭임 (Whispers on the Horizon)》 전시 전경. 사진: 직접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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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서늘한 응시의 역전이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또다른 장소인 태국 롭부리 지역의 버려진 영화관을 점령한 원숭이들은 마을에서는 조상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이어서 네 개의 귀와 다섯 개의 눈을 지닌 원숭이 유령이 등장한다. 이는 재를 황금으로 바꾼다는 태국 신화 속 동물인 시후하타(Sihuhata)를 연상케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도 3).
그러나 이 유령은 스크린 밖에도 존재했다. 관객석 맞은편 투명 스크린 너머, 관객석과 동일하게 꾸며진 공간에는 관람객들 대신 영상 속 원숭이 귀신의 머리 조각이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노란 조명이 조각을 스칠 때마다, 관객은 투명 스크린에 겹쳐진 자신의 실루엣 너머로 원숭이의 번뜩이는 초록빛 눈을 목격한다. 다섯 개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차원,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죽음 이후를 동시에 응시한다. 우리는 영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으나, 실상은 스크린 너머의 유령에게 응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전된 시선에 또 하나의 중요한 증인이 있다. 바로 낡고 더럽게 헤진 토끼 인형들이다. 원숭이 머리 조각과 함께 스크린 너머 관람객석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인형은,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를 관통하는 사물이자 폐허 속에 남겨진 나약한 존재의 은유다. 인간이 떠난 자리에 남은 원숭이 조각과 낡은 인형. 이들은 인간적 슬픔이나 위로를 건네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폐허 속에 던져진 채 묵묵히 역사의 잔해를 견디고 있는 존재들이다. 관객은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이들과 마주하며, 자신 또한 이 폐허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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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 이후의 사랑 (Love after Death)〉, 2025, HD 비디오, 프로그래밍된 조명과 대기 효과, 모터로 구동되는 부드러운 조각, 서라운드 사운드, 47분 루프, 가변크기. 2025 타이페이 비엔날레 《지평선의 속삭임 (Whispers on the Horizon)》 전시 전경. 사진: 직접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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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분이 지나도 영상은 끝나지 않고 반복(loop) 된다. 시작과 끝이 없는 이 의식의 도중에 전시장 바깥으로 나서며 나는 압도감과 무력함 사이에서, 격변을 통과한 뒤에도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세계의 무심한 찬란함을 느꼈다. 죽음 이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초월적 구원이나 달콤한 안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응답 없는 기도” 위에서도 세계가 계속 작동해 버리는, 저 끔찍하고도 경이로운 지속의 상태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포스트-시네마가 나아가야 할 미래와 겹쳐 보인다. 아룬나논차이는 투명한 거울-스크린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유령, 낡은 인형과 신화적 괴물을 한 공간에 묶어놓음으로써, 미술관 안에서 영상이란 그저 흘러가며 소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관객을 시간 속에 묶어두고 함께 ‘거주’하게 만드는 매체임을 증명해 냈다. 나는 그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시네마의 죽음 이후에도 잔존하는 어떤 끈질긴 연결을 목격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불타고 남은 재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낡은 토끼 인형처럼 더러워진 채로 현실을 견디는 일이다. 투명한 스크린의 유령은 우리의 손을 잡고 천국이 아닌 어딘가로 이끈다. 분해와 탄생이 반복되는 이 차가운 폐허 속으로. 오직 그곳에서만 가능한 ‘죽음 이후의 사랑,’그리고 끝나지 않는 영화의 가능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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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품은 아트선재센터의 개인전 《죽음을 위한 노래/삶을 위한 노래》(2022) 등에서 작가가 보여주었던 포스트 시네마 실험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작가는 전시장 안에 거대한 스크린과 계단식 좌석을 설치하여 극장을 임시적인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2) 작가는 이전 작업 〈대지의 피 (The Blood of the Earth)〉(2023)에서도 방콕의 타이 왓타나파니치 건물에서 수집한 재(ash)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그에게 검은색은 불이 타고 남은 흔적이자, 파괴를 통해 생성을 도모하는 연금술적 매개체다.
3) 원문: The Blood of the Earth, Connects us all in the landscape of mourning, The sky drenched in flames, The sun of consciousness, Will recreate this world, With unanswered prayers, Let there be splendor, Beyond the upheaval, Love after death, A song to survive reality, The Ghost takes us by the hand, Decompose… (필자 번역: 대지의 피, 애도의 풍경 속에서 우리 모두를 잇는 것. 불길에 잠긴 하늘, 의식의 태양은 답 없는 기도들과 함께 이 세계를 다시 만들어낼 것이다. 찬란함이 있기를, 격변 너머에서. 죽음 이후의 사랑, 현실을 견뎌내기 위한 노래. 유령이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를 이끈다. 분해하라…)
4) 원제: No history in a room filled with people with funny names. (본문은 필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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