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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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다섯 번째 뉴스레터] 이유와 명분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이유와 명분 사이에서]
2025년 한국 미술계의 블록버스터 긴 전시 계보의 가장 최근 변주로 보아야 한다. 규모와 속도는 달라졌지만, 그 안을 관통하는 구조적 논리는 오래전부터 전시 형식을 움직여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시는 결코 시대와 무관하게 주어진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동원된 형식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쇼윈도, 박람회, 박물관, 도시 계획, 제국적 수집, 관람 산업 등과 얽혀 등장해왔고, 언제나 여러 이해관계가 중첩된 장이었다. 따라서 블록버스터 전시 역시 단순히 “규모가 크다”라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고 어떤 방식으로 공중을 구성하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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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유와 명분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현상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정작 그 일을 움직인 이유는 가장 먼저 희미해지곤 한다. 이를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출근길의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이사 후 출근 방식이 지하철에서 버스로 바뀌며, 평소보다 버스 정류장과 그곳에 붙어있는 광고를 볼 일이 많아졌다. 이따금 버스 정류장에 전시 홍보물이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전시들의 성격은 대부분 비슷한 편이다. 해외 유수 미술관의 컬렉션 전시, ‘거장’ 또는 ‘대가’라는 단어로 설명되곤 하는 유명 작가의 전시, 혹은 ‘단 한 번’이라는 문구로 관람을 부추기는 대규모 전시. 여하튼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Blockbuster exhibition)’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어쩐지 이미 익숙한 그 포스터들을 버스 좌석에 앉아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지금, 이 도시에서 이런 전시들이 반복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이 전시들을 움직이는가? 겉으로 드러난 명분은 분명 매끄럽고 ‘윤리적’이다. 문화 향유의 확대, 시민의 접근성 강화, 도시의 문화 자본 상승. 그러나 그 뒤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동력들이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이러한 명분들을 감싸고 있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다.
지금의 블록버스터 전시 형식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애초에 예술작품은 언제부터, 왜 ‘전시되는 것’이 되었을까. 케네스 럭허스트(Kenneth Luckhurst)는 “회화와 기타 순수미술 작품은 누군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 다시 말해 전시될 때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완전히 수행한다”라고 말한다.1) 그러나 예술이 공공적으로 전시된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지닌다. 17세기 이전의 예술 작품 대부분은 단 한 번도 ‘전시’되지 않은 채 존재했다. 긴 시간 동안 그림과 조각은 길드의 작업장, 궁정과 성당, 사적인 응접실 속에 머물렀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공개 전시는 예외적이었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언제,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예술은 ‘전시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되었는가?
1.
전시는 위기의 국면에서 등장했다. 17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서 봉건적 질서가 흔들리고 절대왕정이 균열을 드러내던 시기, 예술을 지탱하던 후원 구조 역시 빠르게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궁정과 교회는 여전히 주요 후원자였지만, 도시 상공업의 성장과 함께 신흥 시민계급이 부상하면서 예술을 둘러싼 경제적·사회적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더 이상 특정 귀족이나 성직자의 사적 공간에만 귀속되지 않았고, 예술가들은 점차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전례 없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667년 파리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살롱은 전혀 새로운 성격의 장치로 등장한다. 겉으로는 “국가의 예술을 시민에게 공개한다”라는 공공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귀족적 후원을 대신할 새로운 공중(public)을 조직하고, 예술가를 국가 권력의 시선과 가치 체계 속에 재배치하는 제도적 기술이었다.2) 살롱은 예술을 공적 담론 안으로 끌어올리며 근대적 ‘관람자’의 탄생을 가속했지만, 동시에 국가가 예술을 관리하고 위계를 재편하는 도구로도 기능했다. 이 시기 전시는 이미 공공성이라는 명분과, 국가적·정치적·계급적 재편이라는 이유 사이의 긴장을 내장한 채 출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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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판) 피에트로 안토니오 마티니(Pietro Antonio Martini), 〈1787년 살롱 The Salon of 1787〉,
1787, 에칭, 32.2 x 49.1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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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기에는 이런 긴장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왕정 후원 체계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고, 아카데미 역시 해체 위기에 놓였다. 이 시기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자신의 작품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1799)를 유료 전시 형식으로 공개한 사건은 전시 형식의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준다(도 1). 후원자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더 이상 왕족이나 교회가 아니라, 입장료를 지불하는 ‘공중’ 그 자체였다. 작품의 가치는 특정 권력의 명령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관심과 지불 의사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했다. 이 전시는 길드·궁정·아카데미라는 기존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독자적으로 전시 공간을 구성하고 경제적 생존 전략을 직접 실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3) 이 지점부터 전시는 자율성과 상업주의, 공공성과 수익성 사이의 긴장을 한 몸에 떠안는 형식이 된다. 전시 형식이 갖는 복합적 구조는 바로 이 와중에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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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캔버스에 유화, 385 x 522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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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역사의 한 축을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에서 규정한다. 그는 기술적 복제 가능성이 예술을 제의와 의례 중심의 ‘제의 가치(cult-value)’에서, 전시와 확산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 가치(exhibition-value)’로 이동시킨다고 말한다.4) 동굴벽화의 동물이 ‘보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동하기 위해서’ 존재했다면, 사진과 영화, 인쇄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의 예술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시선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상업 시스템이 새로운 신화를 조직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벤야민이 강조한 것은, 전시가 해방과 통제, 잠재성과 지배를 동시에 품는 ‘이중적인 장’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전시의 역사는 깔끔한 진보의 직선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위기와 재정의의 연속에 가깝다. 봉건적 후원 체제가 흔들릴 때, 도시와 산업이 새로운 공중을 필요로 할 때, 그리고 기술적 재생산이 예술의 기능을 바꿀 때마다 전시는 얼굴을 바꿔가며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표면에 내세워진 명분(공공성, 교양, 교육, 문화 향유)과 실제로 작동하는 이유(노동 분업, 도시 전략, 계급, 경제 구조 등) 사이에는 작은 어긋남이 남았다.
3.
그렇다면 2025년 한국 미술계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이러한 긴 계보의 가장 최근 변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규모와 속도는 달라졌지만, 그 안을 관통하는 구조적 논리는 오래전부터 전시 형식을 움직여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시는 결코 시대와 무관하게 주어진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동원된 형식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쇼윈도, 박람회, 박물관, 도시 계획, 제국적 수집, 관람 산업 등과 얽혀 등장해왔고, 언제나 여러 이해관계가 중첩된 장이었다. 따라서 블록버스터 전시 역시 단순히 “규모가 크다”라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조직하고 어떤 방식으로 공중을 구성하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 점에서 전시는 단순한 물리적 배치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보여주는가’를 조율하는 하나의 사회적 기술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한 집단(기획자·기관)이 다른 집단(관람자·공중)과 특정한 대상(작품·이미지·유물) 사이의 만남을 어떻게 배열하는지의 관계가 전시 형식의 핵심이다.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박물관을 ‘차별화 장치’라고 부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5) 전시는 단지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학습시키는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블록버스터 전시 자체가 아니라 이 형식이 점차 전시의 ‘유일한 상상력’처럼 굳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기술·자본·도시 마케팅·관람 경험 산업이 엉켜 만들어낸 특유의 형식이 반복되면서, 전시의 복수성—전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점점 더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을까. 중요한 것은 전시라는 장치가 다시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흐름을 경계하는 일이다. 전시는 태생적으로 명분과 이유가 어긋나는 구조적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생해왔다. 이 어긋남을 단순히 숨기거나 봉합하는 대신, 전시의 사회적 형식 자체가 지닌 복수성과 긴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다층적인 장(場)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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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enneth W. Luckhurst, The Story of Exhibitions (London & New York: Studio Publications, 1951), 15.
2) 살롱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Christian Michel, The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The Birth of the French School, 1648–1793, trans. Chris Miller (Los Angeles: Getty Publications, 2018) 참고.
3) Dave Beech, “Redefining the Exhibition,” Parse Journal 13 (2021), DOI: 10.70733/i8dcyb9u74j5(2025년 12월 4일 검색).
4)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207-209.
5) Tony Bennett, “Exhibition, Difference, and the Logic of Culture”. In Museum Frictions: Public Cultures/ Gobal Transformations, Ivan Karp, et al., eds. (New York: Duke University Press. 2006),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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