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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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 네 번째 뉴스레터] 앗세이! 《모터타임즈: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다》 방문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앗세이! 《모터타임즈: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다》 방문기]
앗세이(Assy)는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조립을 말하는 어셈블리(assembly)를 축약해 발음한 것으로,
《모터타임즈》의 프로젝트 전반에 자주 모습을 보인다.
자동차 공장의 내부에서 익숙하게 쓰이는 은어이기에 외부인은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점도 흥미롭지만, 어셈블리(assembly)의 다른 뜻으로 집회, 모임 등이 있는 것 역시 프로젝트와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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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세이! 《모터타임즈: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다》 방문기
한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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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 지부와 경인콜렉티브, 부평구 문화재단이 ‘지역·노동·예술이 함께 쓰는 자동차 산업도시 부평’을 비전으로 업무협약을 맺어 진행한 《모터타임즈: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다》(이하 《모터타임즈》)가 열린 한국지엠 부평2공장의 방문기이다.1) 전시 후기와 공장 방문기.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말을 골랐던 이유는 이 전시에 ‘전시(展示)’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과 사건이 켜켜이 쌓인 채 시간이 멈춰있던 공장에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글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부터 자동차산업의 맥을 이어온 부평공장은 여러 차례 경영진의 변화를 겪다가, IMF를 기점으로 글로벌 자동차 기업 지엠(GM, General Motors)이 대우로부터 공장을 인수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2) 그리고 2022년 11월, 돌연 지엠이 부평2공장의 폐쇄를 결정하면서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장 곳곳에 있는 2022년 11월의 달력들, 동그라미가 멈춘 안전 점검표와 출입문 폐쇄 조치 안내문 등이 그 사실을 생경하게 일깨워 준다.
전시는 시간이 고여 있는 2공장의 문을 다시 열고 사람들을 불러옴으로써 공장을 가동시킨다. 앗세이(Assy)는 자동차 생산 공장에서 조립을 말하는 어셈블리(assembly)를 축약해 발음한 것으로, 《모터타임즈》의 프로젝트 전반에 자주 모습을 보인다.3) 자동차 공장의 내부에서 익숙하게 쓰이는 은어이기에 외부인은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점도 흥미롭지만, 어셈블리(assembly)의 다른 뜻으로 집회, 모임 등이 있는 것 역시 프로젝트와 공명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평소라면 아마 위치조차 잘 모르던 부평2공장에 모여들어 같은 곳을 걷고, 같은 것을 보았다. 프로젝트는 그 시작점과 끝점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모임을 일시적으로 만들며 굴러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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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관에 어수선하게 모인 사람들은 현장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2공장의 조립공장에서 관람을 시작했다. 본래 자동차는 판을 만드는 프레스 공정, 각각의 판을 용접해 차체의 골격을 만드는 차체 공정, 거기에 색을 입히는 도장 공정, 마지막으로 시트와 타이어 등의 부품을 연결하는 조립 공정으로 이어지는데, 관람객들은 조립공장에서 시작해 차체공장으로, 말하자면 자동차 생산 과정의 역순으로 이동하였다.4)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도곤구, 김윤용 정비기능장이 완전 해체 시킨 ‘쉐보레 트랙스’였다. 자동차의 미끈한 표면만 알던 내게 분리된 시트 아래의 복잡한 형태나, 모든 요소가 탈거된 차의 뼈대는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나사 하나까지 늘어진 부품 위로 공장부터 어느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동자의 말이 남겨져 있었다. 각자의 긍지와 애환이 고스란했다.
그중에서도 조립공장에 근무하시는 진종남 직장이 남긴, “나는 컨베이어가 진짜 사람이 일할 대는 아니라고 봐요. (···) 내 스스로 내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라는 말이 눈에 박혔다. 조립공장은 기본적으로 위, 아래에 컨베이어가 깔려 있어 반복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시간 동안 반복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인데, 여기에 더해 반복 노동의 과정이 0.01초 단위로 할당되어 있기 때문에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석근 작가의 〈배치와 재배치〉시리즈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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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오석근, 〈배치와 재배치-120초〉 일부, 촬영: 한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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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플러 Assy*프런트 서스펜션(3.45초)-이동(1.44초)-센터 머플러 행거 러버 취부(2.48초)-이동(2.76초)-마킹펜 수취(1.02초)-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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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지나가는 컨베이어는 잔인하다. 모든 과정은 실제 필요한 시간과, 그 안에서도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시간과 생산하지 않는 시간으로 나누어진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생산 과정을 운영하기 위해 컨베이어를 타는 노동자의 몸이 지닌 변동성은 무시되는 것이다. 영상을 보는 와중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컨베이어 라인에서 신문과 책을 읽었다는 조립공장 노동자의 경험을 차용한 작업이었다. 컨베이어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0.01초 단위로 쪼개진 과업을 모두 수행하고, 몇십 초의 여유를 기어이 만들어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한다고 한다. 이는 “컨베이어의 흐름에 맞춰진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서 발악하는 행위”이자, 가변적인 인간 신체의 필연적인 요구일 터였다.6) 김은희 작가의 〈플랜트그라피-컨베이어〉는 컨베이어처럼 일정하게 흐를 수 없는 노동자의 신체를 담아낸다. 굽은 등과 약간 기울어진 허리, 분주한 손이 엿보이는 묵묵한 뒷모습이 편평하게 깔린 컨베이어 벨트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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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체공장에는 양정욱 작가의 〈희망의 모양〉, 〈빛을 만드는 모양〉, 〈속삭이는 모양〉이 연달아 이어졌다. 가느다란 실이 파들대며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비정형의 오브제가 양옆으로만 움직이는 등 단순한 모션이 이상하게도 사람 같았다. 각각의 오브제에 붙은 메모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갑갑한 마음이 편지처럼 담긴 메모지, ‘소나무 태우기’처럼 뜻을 알 수 없는 메모지, 아무 말도 없는 메모지···. 기둥에 붙은 메모지들을 비춘 불빛만은 따듯해서 그걸 아름답게 보는 게 어딘가 죄스러웠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공장의 안에 들어가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공장의 노동자들이 막간의 쉼에 앉아 있던 깔개는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헤져 있었고, 누군가의 손에 쥐어졌던 도구들은 그 손에 가장 잘 맞는 형태로 변형되어 반질거렸다. 민운기 작가의 〈노동자의 자리〉가 이처럼 노동자 한 명 한 명의 개별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석근 작가의 〈축(軸)〉은 그 개별적인 몸이 획일적인 시스템과 노동으로 어떻게 고통을 받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노동이 야기하는 보람과 자긍심이 지속되려면 그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었다. 성과는 추켜 세우고 상처를 보듬지 않는다면 노동이 아닌 착취일 것이다. 굳은살과 상처, 흉터가 남은 몸을 보고 나오니 오후의 볕이 공장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하여도 그 안에서 일하며 때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게 일상이었을 것이라는 게 슬프게도 새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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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사람들이 널찍한 공장 지대를 가로질러 걷는 게 공장의 관계자에겐 평소와 얼마나 다른 느낌일지 궁금해하며 다시 홍보관으로 돌아왔다. 반짝이는 캐딜락 로고와 전시명 레터링이 붙은 유리창 앞으로 ‘부평부지 매각반대’라는 현수막이 나란했다. 지엠은 국내 직영정비소를 폐쇄 및 철수하겠다 통보한 바 있는데, 이는 “사업구조 개편을 넘어 자동차 산업에서 서비스산업의 외주화, 미래차 전환에 따른 사전 고용 정리 등 전형적인 구조조정 모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조치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7) 나아가 정비는 자동차에 있어 안전과 직결된 핵심적인 기술이 응집된 분야로, 정비를 외주화할 때 따를 위험도 존재한다. 공장의 중단은 단지 가동되던 기계가 멈추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안의 노동자 고용과 생존권, 나아가 산업 전체와 결부되어 공장 바깥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각자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그를 포괄하는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고 나아가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전시 바깥으로까지 우리가 ‘앗세이’해야 하는 이유일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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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인콜렉티브×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아카이빙 소식」, 『모터타임즈』 3호, 2025년 6월.
4) 현장 가이드를 해주신 경인콜렉티브의 김은희(시각예술가), 최혁규(문화연구자)의 안내를 참고하였다.
5) 영상 작품 일부를 인용한다. 작품은 실제 조립공장 내 ‘생산 기본 정보’를 반영하고 있다. 오석근, 〈배치와 재배치〉시리즈.
6) 따옴표는 안규백 지부장 인터뷰를 인용하였다. 경인콜렉티브×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이달의 인물-안규백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지부장」, 『모터타임즈』 3호,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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