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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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세 번째 뉴스레터] 탈중심의 네트워킹: 에콜 드 니스와 미술비평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탈중심의 네트워킹: 에콜 드 니스와 미술비평]
압도적 자본과 제도를 소유한 서울의 바깥에서 예술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그 외’ 지역의 자전(自轉)적 활동과 그 틈에서 작용하는 중력, 그리고 광년처럼 느껴지는 격차와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의 감각을 내포한다. 지역예술가들의 활발한 창작과 비평, 그 사이를 매개하는 큐레토리얼 실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선순환하는 구조를 ‘지역예술의 발전’이라고 일컬을 때, 이 글은 약 반세기 전 프랑스 니스(Nice)에서 서울이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에서 비켜난 탈중심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선례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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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서울? Be 서울!
이 표제는 2023년 시작된 광명시 청년동의 청년예술가 연구 프로젝트 ‘비서울’의 소개글에서 가져온 것이다.1)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예술 활동을 영위하는 ‘非’서울의 상태와 서울로의 진입을 모색하는 ‘Be’서울의 상황 사이의 층위를 아우르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비서울 프로젝트는 단순한 지리적 구분을 넘어 중심에서 ‘비켜난(off)’ 이들의 양가감정을 드러낸다.
압도적 자본과 제도를 소유한 서울의 바깥에서 예술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그 외’ 지역의 자전(自轉)적 활동과 그 틈에서 작용하는 중력, 그리고 광년처럼 느껴지는 격차와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의 감각을 내포한다. 2024년 비서울 프로젝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청년예술가 중 약 73%가 서울에서 활동하며, 서울 거주 인원의 1.7%만이 비서울 지역에서 활동하는 반면 비서울 거주 인원은 28%가 서울 지역에서 활동한다.2) ‘수도권’조차 아닌 지방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1인 예술 자영업자들은 자본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지역문화재단의 지원금은 규모 자체가 작을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성 또한 불투명하다. 1990년대 말부터 지역성을 강조하며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유치한 비엔날레들은 한시적 제도라는 조건 외에도 이미 제도권에 안착한 중진 작가들의 리그로 전락하거나, 그마저도 단명하거나(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졸속 행정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예술가들의 활발한 창작과 비평, 그 사이를 매개하는 큐레토리얼 실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선순환하는 구조를 ‘지역예술의 발전’이라고 일컬을 때, 이 글은 약 반세기 전 프랑스 니스(Nice)에서 서울이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에서 비켜난 탈중심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선례를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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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창작·비평의 삼위일체: 에콜 드 니스의 형성
프랑스 파리는 19세기부터 ‘미술의 수도(Capital des Arts)’로 불리며 유럽미술의 중심지를 담당했다. 1910년대 초 몽마르트르(Montmartre)와 몽파르나스(Montparnasse)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외국인 미술가들과 이들의 미술 활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탄생한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는 다양한 국적의 미술가들이 활동했던 파리 미술계의 국제성을 보여준다.3) 달리 말해 20세기 전반까지 파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예술가들이 모여 국제미술의 방향을 선도하는 ‘미술의 서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이 새로운 미술 중심지로 급부상함에 따라 국제무대 속 프랑스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전후 파리 미술계는 구상미술의 전통과 함께 다양한 추상미술 경향이 공존하며 복합적인 구조를 형성했다. 더욱이 미술계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노선에 따라 구상과 추상, 프랑스 전통의 계승과 단절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4) 이에 1950년대 후반부터 파리 미술계에 만연한 양식 경쟁과 소모적인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운 남프랑스 지역의 니스가 파리 중심 미술계에 대한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니스를 비롯해 칸(Cannes)과 모나코(Monaco)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휴양 도시들이 위치한 남프랑스 지역은 연중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파리의 부유층들이 겨울에 방문하는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5) 이러한 지역적 특색을 기반으로 전후 니스의 예술가들은 니스를 ‘미술의 수도’인 파리에 대응하는 ‘미술의 도시(Ville des Arts)’로 부르며 니스를 새로운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홍보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가 이사직을 맡았던 단체인 현대미술을 위한 지중해연합(Union Méditerranéenne pour l’Art Moderne)의 주도 아래 1950년대 초까지 니스에는 마티스, 보나르, 피카소 등 남프랑스에 거주하던 현대미술가의 기획전이 활발히 개최되었다(도 1).6) 또 1950년 갤러리 퐁셰트(Galerie des Ponchettes)에서 개최된 마티스의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으로, 1960년대부터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들의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잇따라 건립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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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니스, 일과 기쁨 Nice, Travail et Joie〉, 1947, 종이에 석판인쇄, 99 x 64 cm,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 2025 Succession H. Matisse |
(도 2) 에르브 바이유(Herve Baille)가 디자인한 니스 지역 관광 포스터, 1949. © Posterte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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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50년대부터 니스의 밝고 관능적인 이미지가 대중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면서 관광객뿐 아니라 자유를 찾는 전후 프랑스의 청년세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도 2). 이미 1950년대부터 니스에는 에콜 드 니스(Ecole de Nice)의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평론가와 전위예술가들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콜 드 니스의 성립을 이끈 핵심 평론가인 자크 르파주(Jacques Lepage, 1909-2002)는 1952년 시인 로베르 로비니(Robert Rovini, 1926-1968)와 폴 마리(Paul Mari, 1930-2015)와 함께 니스 지역 문인, 음악가, 미술가들의 간학문적 모임인 ‘청년클럽(Le Club des Jeunes)’을 창설했다. 주로 카페에서 진행되었던 청년클럽의 모임을 통해 니스 지역 청년미술가들은 음악가, 시인 등 다른 전위예술가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주고받았다.8) 1960년대 초 니스 지역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속해서 파리를 언급하며 침체된 파리 미술계와 에콜 드 파리의 신화에 도전하고자 했다. 1960년 일간지 『콩바 Combat』에서 에콜 드 니스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평론가 클로드 리비에르(Claude Rivière, 1932-)는 프랑스 미술의 탈중심화(décentralisation)를 언급하며 파리에서는 예술가들이 꿈을 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이 자유를 찾아 프로방스(Provence)로 이동하는 현상을 지적했다.9) 관광과 휴양산업이 발달한 남프랑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에콜 드 니스의 작가들은 전통적인 이젤 회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 실험을 펼쳤다(도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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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마르샬 레이스(Martial Raysse), 〈간식 Snack〉, 1964, 캔버스에 혼합재료와 네온사인,
215 × 130 × 19.5 cm,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 © ADAGP,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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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벤 보티에(Ben Vautier), 〈나를 보세요 이제 충분합니다 Regardez moi cela suffit〉, 1963, 퍼포먼스 기록 사진. © ADAGP, Par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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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예술가들의 활발한 창작과 더불어 평론가의 활동 역시 에콜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르파주는 쉬포르/쉬르파스(Supports/Surfaces) 결성의 초석이 된 일련의 전시를 그룹의 대표적 작가인 클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 1936-)와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1967년 지역 전시회인 《제5회 코트다쥐르 조형예술제 Ⅴème Festival des Arts Plastiques de la Côte d’Azur》에 비알라를 포함해 뱅상 비울레스(Vincent Bioulès, 1938-), 피에르 뷔라글리오(Pierre Buraglio, 1939-), 패트릭 세이투르(Patrick Saytour, 1935-2023) 등 다수의 쉬포르/쉬르파스 작가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이들에게 국제적인 활동 기회를 제공하였다.10) 또 쉬포르/쉬르파스는 1971년부터 『회화, 이론 연구 Peinture, cahiers théoriques』라는 미술 전문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을 만큼 작품 제작과 이론 연구를 겸한 그룹이기도 했다.11)
1950년대 시작되어 1960년대까지 활발히 이어진 니스 지역 예술인들의 교류는 1972년 지역 미술대학인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Ecole 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 de Nice) 내에 니스 국제예술교류센터(Centre artistique de rencontres internationales)와 빌라 아르손(Villa Arson)이 설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니스 국제예술교류센터와 빌라 아르손은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 연구,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며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와 연구자들이 만나 소통하는 장소로 기능했다(도 5). 두 기관은 학생을 포함한 지역 예술인들의 교류와 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물리적·제도적 공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니스 지역의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예술인들이 모여들며 이 같은 지역 네트워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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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빌라 아르손(Villa Arson) 입구, 1972. © Photo Michel Mar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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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설적으로 에콜 드 니스의 발전과 확립에는 니스 지역 평론가와 작가들이 초기부터 의식적으로 언급하며 구분했던 파리와의 연결성이 크게 작용했다. 에콜 드 니스의 초기 그룹으로 평가되는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의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과 아르망(Armand Fernandez, 1928-2005), 마르샬 레이스(Martial Raysse, 1936-) 등은 니스와 파리를 오가며 활동했다. 또 에콜의 대표적 그룹인 쉬포르/쉬르파스의 결성에 중요한 계기가 된 르파주와 비알라의 공동 기획 전시에는 이후 B.M.P.T.를 결성한 파리 지역 작가들이 초대되었으며, 쉬포르/쉬르파스가 그룹으로서 공식화된 1970년과 1971년의 전시들도 모두 파리에서 개최되었다.13) 결정적으로, 1977년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내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의 개관전으로 벤(Ben Vautier, 1935-2024)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니스에 관하여 À propos de Nice》가 개최되며 에콜 드 니스가 강조했던 ‘지역색’은 국제성을 강조한 파리의 중심화 전략에 포섭되었다.14)
프랑스 미술의 탈중심화를 표명한 에콜 드 니스가 끊임없이 파리 미술계와 끈을 두며 발전했듯, ‘탈중심’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중심의 개념을 내포한다. 적어도 미술제도 안에서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해체되기 어려운 구조라면 미술계 내부의 다양한 역학 관계를 중력 작용이 아닌 쌍방향의 인력 작용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에콜 드 니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중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력이 자생적인 지역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어쩌면 그로부터 우리는 ‘비서울’의 방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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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콜 드 파리라는 용어는 1911년경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édeo Modigliani, 1884-1920) 등 외국 출신 청년 미술가들이 프랑스 미술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탄생했다. Natalie Adamson, Painting, Politics and Struggle for the École de Paris, 1944-1964 (Farnham and Burlington: Ashgate, 2009), 22-25.
4) 전후 파리 미술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Kathleen Morand, “Post-War Trends in the ‘École de Paris’,” The Burlington Magazine 102:626 (May 1960): 187-92 참고.
5) ‘프랑스의 해안’이라는 뜻의 ‘프렌치 리비에라(French Riviera)’로도 불리는 이 지역의 풍부한 일조량은 빛과 색채 표현에 관심을 두었던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화가들이 지역을 자주 방문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Magdalena Dabrowski, French Landscape: The Modern Vision, 1880-1920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999), 81-90.
6) Rosemary O’Neill, Art and Visual Culture on the French Riviera, 1956-1971: The Ecole de Nice (Farnham and Burlington: Ashgate, 2012), 30-41.
7) 1960년 비오(Biot)의 페르낭 레제 미술관(Musée national Fernand Léger), 1963년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Musée Matisse), 1964년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의 마그재단 미술관(Fondation Maeght), 1966년 앙티브(Antibes)의 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 등이 차례로 개관했다.
8) Rosemary O’Neill, “Ecole de Nice, 1956-1971” (Ph.D. dissertation,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03), 64-70.
9) Claude Rivière, “La charge solaire de l’artiste,”Combat, 22 août 1960, Marcel Alocco, Introduction à l’Ecole de Nice (Nice: Demaistre, 1995), 10에서 재인용.
10) O’Neill, Art and Visual Culture on the French Riviera, 1956-1971, 196-200.
11) 서영희, 「에꼴 드 니스와 미술 비평」, 『현대미술학 논문집』 9 (2005): 133-35.
12) Normand Biron, “La Villa Arson, à Nice, Centre national d’art contemporain,” Vie des arts 29:117 (1984): 55-56.
13) O’Neill, Art and Visual Culture on the French Riviera, 1956-1971, 196; Rosemary O’Neill, “Été 70: The Plein-Air Exhibitions of Supports-Surfaces,” Journal of Curatorial Studies 1:3 (2012): 358-60.
14) Rosemary O’Neill, “À Propos de Nice: Mapping a Regional / International Phenomenon for a National Stage,” Artl@s Bulletin 2:1 (2013): 3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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