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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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한 번째 뉴스레터] 디센서스(dissensus)의 시학: 홍진훤의 랜덤 포레스트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디센서스(dissensus)의 시학: 홍진훤의 랜덤 포레스트]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단일한 해석에 봉합되지 않고, 오히려 관람자를 불완전한 호명의 공간으로 이끈다. 사건의 의미를 봉합하는 대신 그 사이의 틈을 열어두고, 그 틈에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어떻게 견디고 또 어떻게 응답해 나갈 것인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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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서스(dissensus)의 시학: 홍진훤의 랜덤 포레스트
김동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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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모든 사건의 방향 없는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 다만 우연히 특정한 조건의 시공간을 지날 때 불현듯 힘과 방향을 갖고 우리 앞에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진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사건이 된다. 사건 이후의 사진은 불가능하며 사진 이전의 사건 또한 불가능하다. 모든 세계는 사진으로 사건이 되지만 이 사진적 불연속 덕분에 본질적으로 사진은 세계를 넘어선다.
<랜덤 포레스트 2025—인데스 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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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식민지배의 종료를 의미했지만 국가폭력의 종식을 뜻하지는 않았듯이, 1987년 민주화 역시 권위주의적 폭력성의 완전한 소거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는 '개발'과 '안보'라는 새로운 명분을 앞세워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는 방식을 지속해왔다. 이러한 억압적 통치 방식은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되어 왔으며,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등은 그 연속성을 드러낸다. '전쟁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폭압의 역사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사건은 글과 사진으로 남는다. 그러나 사진으로 ‘현장’ 그 자체를 보여주는 일은 불가능하며, 얼마나 생생한 현장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 집착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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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랜덤 포레스트≫ 2018, 아트스페이스 풀, 전시 전경. ⓒ홍진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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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훤은 집회 현장을 담는 외신기자로 활동하다가, 보도방식에 회의감을 느끼고 2009년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계기를 생각해보면, 작가의 태도는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회의주의적 관점과 닮아 있다. 저널리즘 사진이 폭력을 재현하는 ‘잔인한’ 카메라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공격성이 피사자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한다면, 피사자가 없는 사진은 스펙터클에서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2018년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랜덤 포레스트≫는 <임시 풍경>(2009-2011)과 <쓰기 금지 모드>(2016), <붉은, 초록>(2012-2014) 등 연작을 집결한 전시이다. 이 사진들은 용산참사, 평택 대추리 사건, 제주 해군기지건설 등 비극적 사건의 현장을 다룬다. 여기서 작가는 피사자 없는 풍경 사진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길게 늘어난 시공간의 작은 조각들을 모아둔 더미와 같다. 그는 어떤 장소/현장을 보면 그 곳과 관련된 사건을 떠올리고, 동시에 유사한 다른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떠올렸다. 가령, 그는 강정마을에서 구럼비 바위가 발파되는 날 제주 4·3 사건과 오키나와 전투를 겹쳐보고, 밀양 송전탑 사건에서 후쿠시마와 삼척 지역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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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 포레스트≫(2018)는 이를 전시의 형식으로 옮겨놓은 것과 같다. 홍진훤은 ‘랜덤 포레스트’라는 머신러닝 기법을 차용하여 텍스트가 제거된 현장 사진을 ‘랜덤’하게 제시한다.1) 주체도 캡션도 없는 풍경들은 의미를 형성하지 못한 채 미끄러지고 만다. 그러나 ‘랜덤’하게 배열된 이미지들은 작은 조각들로써 아주 옅은 연결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관람자는 전시에 흩어진 작은 조각들을 점진적으로 연결시키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옅고 무거운 연관성"을 어렴풋이 느끼며 비극적 사건들의 연쇄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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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홍진훤, <랜덤 포레스트 2025>, 2025, 시트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 북서울미술관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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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루이스 하인(Lewis Hine), 〈Composite Photograph of Child Laborers Made from Cotton Mill Children〉, 1913, 젤라틴 실버 프린트, Library of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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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훤은 "어떤 사회적 균열지점을 찾고 그 이야기를 통해 그것과 나와의, 혹은 타인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2) 그는 근작 <랜덤 포레스트 2025>(2025)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 사진사에서 중요한 이미지, 노동운동 현장 기록 사진 등을 아우른다. 주목할 점은 전작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풍경이 사건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환기했다면, 인물은 응시와 몸짓을 통해 관람자를 끌어들인다. 이는 아리엘라 아줄레(Ariella Azoulay, 1962-)가 말하는 사진적 행위의 ‘파트너십’―피사자와 관람자의 상호작용―의 확장이며, 관람자가 피사자의 응시에 응답할 때 비로소 사진은 새로운 정치적 장이 된다.3) 즉 풍경이 ‘사건의 불연속성’을 드러낸다면, 인물의 재등장은 ‘관람자와 사건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가령 루이스 하인의 합성 초상 속 아동 노동자의 얼굴, 오체투지 행진의 노동자들—이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호소를 말하지 않지만 응시로써 우리를 사건의 참여자로 끌어들인다. 여러 장의 사진이 더 커다란 군집을 이룰 때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단서가 되곤 하지만, 홍진훤의 사진은 특정한 서사로 수렴되길 거부하고 비껴나간다. 이로 인해 관람자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답’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게 떠오르며, 관람자와 피사자,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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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폭압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1908년 미국 아동 노동자들의 겹쳐진 얼굴과 2014년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그리고 용산과 강정마을의 상처 입은 풍경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도 반복되는 억압의 구조를 증언한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단일한 해석에 봉합되지 않고, 오히려 관람자를 불완전한 호명의 공간으로 이끈다. 사건의 의미를 봉합하는 대신 그 사이의 틈을 열어두고, 그 틈에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어떻게 견디고 또 어떻게 응답해 나갈 것인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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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랜덤 포레스트는 여러 개의 의사 결정 트리를 무작위로 만들고 각각 예측한 결과를 결합하여 최종 결과를 도출하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이다. 트리의 양과 우연성이 증가할수록 예측이 더 정확해진다.
2) 안소현, 홍진훤, 『사진에 관한 대화』 (현실문화A, 2019), 35.
3) 아줄레는 ‘사진 행위에 파트너로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사진 프레임 안에 남긴 흔적들’에 주목한다. 그는 피사체의 응시는 사진과 사진 보기의 실천이 목격된 상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사진을 보는 것 자체가 정치적 관계의 공간이 된다고 설명한다. Ariella Azoulay, The Civil Contract of Photography, (New York: Zone Books, 2008), 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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