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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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두 번째 뉴스레터] 오해와 끌림: 박보마 작업의 표면에 관하여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오해와 끌림: 박보마의 표면에 관하여]
박보마의 작품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감각들을 한데 묶어낸다. 이름과 목소리, 실루엣과 제스처, 채도와 명도, 조도와 빛깔와 같은 요소들은 서로 유사한 위상으로 공존하며, 하나의 흐름, 하나의 회로를 형성한다. 작가는 실체로서이자 인상으로서, 이미지로서 이 회로에 주목한다. 즉 작가가 말하는 “닿을 수 없는 어떤 커다란 것” 즉, ‘하늘’은 이 감각의 회로가 도달하려는 모티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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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 꽃잎. 종. 글리터. 말린 파란 장미. 비누 장미. 조화 국화. 은방울. 비즈 스티커. 실. 스팽글. 향. 그림자 실루엣. 조명. 가짜 돈. 시트지. 목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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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연약해 보이는 오브제와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공간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혼란스럽다.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취해야 할까. 위에 나열된 단어들이 작품이 될 때, 그 경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이러한 작업을 지속하게 만드는 동인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오랜 시간 이어져온 것일까. 혼란스러움을 안겨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끌리는 작업은 박보마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마주할 때면 가장 먼저 궁금해 지는 것은 캡션이다(도 1). 캡션의 긴 재료 목록을 따라가다보면 향기와 빛깔 그리고 소리가 슬그머니 찾아든다. 작가는 그 향과 소리, 빛깔로 가득 찬 공간에서 사소한 행위를 보여주거나 관객에게 참여하도록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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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을 박는다. 향수를 뿌린다. 바닥에 반짝이를 흩뿌린다. 리본을 묶는다. 버튼을 누른다. 홈페이지를 탐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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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박보마, 〈Sophie Etulips Xylang Co.,’s Executives Material Suite〉, 2023, 알루미늄, 플라스틱, 종이에 접착식 은박지, 석고 보드에 페인트, 카펫, 테이블, 의자, 거울 필름, 테이프, 핫멜트 접착제, 모터, 스피커, 가변크기. ⓒ 박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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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취하는 행위들은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미적인 몸짓이다. 리본을 묶고, 숨겨둔 보물을 찾고, 하이퍼링크를 따라 움직인다. 강제하지 않지만, 결국 걸려들게 되는 이 섬세한 연출은 작품이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박보마가 ‘의도된 오해’의 전략으로서 ‘표면’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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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박보마, 〈Marble (of its sensations and incidental events and materials) floor parts where of the baby who was reborn many times〉, 2023, 콜라주, 오일, 오일 파스텔, 접착면이 있는 플라스틱 종이에 찍힌 스탬프, 종이에 그린 그림, 먼지, 플라스틱 보석, 말린 꽃잎, 살구 잼 등. 910x30000mm. ⓒ 박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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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박보마, 〈Lilac Rebercca Son of Jeong Do Young〉, 2024, 제스쳐 퍼포먼스, 아크릴 페인트, 접착 테이프, 가벼운 공기 건조 점토, 니트릴 장갑, 리본, 반짝이 가루, 유리 구슬, 향, 텍스트, 디지털 인쇄, QR 코드, 사운드. ⓒ 박보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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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마는 대체되는 이미지, 쉽게 버려지는 것들에 관심을 두는데, 소위 ‘가짜’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포착하고, ‘포장’해낸다. 그 포장은 때로 껍질처럼(〈Marble (of its sensations and incidental events and materials) floor parts where of the baby who was reborn many times〉, 2023), 때로는 (선물의) 리본처럼(〈Lilac Rebercca Son of Jeong Do Young〉, 2024) 작동한다(도 2, 3). 그렇게 감싸진 사물들은 마치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데, 결국 겉과 속이 전치된 채 한없이 부풀려진 오해만이 이 작업을 지시하게 된다. 그 오해의 자리에 작품과 만나는 이가 투영한 시선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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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박보마, 〈Opera: Sky Blue Canon Infinitus〉, 2023, performance. ⓒ 박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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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박보마, 〈Opera: Sky Blue Canon Infinitus〉, 2023, performance. ⓒ 박보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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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이후 일상의 사물은 이미 수없이 예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박보마가 주목하는 것은 그 너머, 사물이 지니는 원형적 감각의 잔상이다. 그녀는 사물을 이름이나 용도로 환원하지 않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마주하고자 한다. 그 결과, 사물의 지위와 기능은 해체되고, 남는 것은 표피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표피의 뒤섞임 속에서, 오히려 사물의 외형적 인상, 즉 ‘감각으로서의 실체’가 드러난다. 박보마가 만들어내는 ‘가짜’들은 그 속이 무엇으로 채워졌든, 겉모습만큼은 언뜻 진짜 같다. 그녀가 재현하는 것은 결국 ‘얇아지다 못해 희미해지는’ 감각, 마치 빛 속으로 녹아드는 ‘하늘의 색’과도 같다. 이에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기댈 수 있는 형식이 없다”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하늘’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구한다면, 어떤 재료를 꼽을 것인가?1) 이를 위해 작가는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대중적'인 것을 넘어,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낸다. 그렇기에 박보마가 선택하는 재료는 경계가 없고 모호하게 발현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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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박보마의 작품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감각들을 한데 묶어낸다. 이름과 목소리, 실루엣과 제스처, 채도와 명도, 조도와 빛깔과 같은 요소들은 서로 유사한 위상으로 공존하며, 하나의 흐름이나 회로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실체이자, “인상이자, 이미지로서” 이 회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되는데, 작가는 이를 “닿을 수 없는 어떤 커다란 것”이란 모티브로서 ‘하늘’을 꼽는다.2) 즉, ‘하늘’은 이 감각의 회로가 도달하려는 모티브이다.
더하여, 작가의 또 하나의 방법론인 ‘차용’은 묘한 끌림을 만들어낸다. 텅 비어 있는 듯한 기표의 조합은, 그 공백을 의미로 채우려는 욕망과 필연적으로 공명한다. 박보마가 차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언어, 그중에서도 ‘인스타그래머블’한 미적 감각이다. 그것은 그녀의 작업이 가장 큰 오해를 사는 지점이자, 동시에 그 오해를 통해 작동하는 작품의 핵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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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수집한 이미지들은 일상의 공간, 사물, 행위, 경험의 밀도를 마치 디지털 코딩 언어로 번역한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의 ‘돋보기’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되고 조합되는 알고리즘을 닮았다. 특히 작가는 스크롤을 통해 이미지를 마주하게 하고, 커서를 대는 순간 나타나는 빈 하트와, 그것을 눌러 색을 채우는 인터페이스를 세심하게 설계한다. 이와 같은 배치와 작동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오해’를 하나의 미학적 장치로 삼는 의도된 설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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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용과 수집의 방법론은 그녀가 운영하는 여러 인스타그램 채널들—@fldjfstudio, @meladies1998, @m_a_a_t_t_e_r, @boma_pak, @b__o__m__a—을 통해 더욱 확장되는데, 이 계정들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다층적 세계관을 구성한다. 실제로 박보마는 인스타그램과 웹을 무대로 내밀한 실험실이자 가상의 기업 〈Sophie Etulips Xylang Co.〉를 세우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이 조향사로 일하는 현실의 기업 〈m-a-t-t-e-r〉를 운영하기도 한다.
현실과 가상, 실체와 이미지, 상업과 예술이 서로 포개지는 이 지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디지털과 일상, 상징과 경험 사이에 묘한 긴장과 끌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관객은 이 사이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표면들을 헤매며 끊임없이 오해하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게 된다. 작가가 만들어둔 (진짜같은) 가짜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각에 기대어, 결코 닿을 수는 없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는, (형용할 순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떠한) 근원에 끌리는 중력 작용을 감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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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보마와의 인터뷰 (2025년 03월 14일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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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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