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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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예순 번째 뉴스레터] 무덤과 받아쓰기, 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무덤과 받아쓰기, 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여자들은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저마다의 무덤을 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려진 이야기를 진정으로 쓰다듬고, 불러낼 수 있다. 그것들을 읽어내고,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시간에 의해 퇴색되지 않도록 글 속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말해야 한다. 써내려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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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론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깨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최승자, 『즐거운 일기』 중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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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시집 『즐거운 일기』를 읽었다. 시 속에서 화자는 모래바람, 탄생의 껍질, 죽음의 잔해를 품은 여자들이 누워 있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 무덤을 갖고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내가 가진 “무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행운인지 비운인지 나는 사선을 빠져나가 생을 지속해버렸다.”2)
“생을 지속해버렸다”는 표현은 욕망이나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말처럼 들린다. 어쩔 수 없이 생을 지속해버린 여자들이 있었다.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삶의 형태로 말이다.
뜻밖의 생존은 지금까지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어지지 못한다. 만약 증언의 주체가 지금 없다면 더 이상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는 걸까?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타자에 의해 수동적으로만 행해지는 것일까?
말해진 것들을 이어받아 다시 쓰는 일, 곧 ‘받아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가려진 이야기를 따라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지켜내고, 다시 말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이 생각을 자꾸만 되뇌어 본다.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은 한 권의 책을 남겼다. 여러 사건과 인물의 서사를 신화 속 여신들에 “접신”하여, 타자의 입장에서 ‘받아썼다’.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숨이 터져버릴 듯 차오르는 목소리를 견뎌낸다. 그리고 가쁘게 그 음성들을 글로 빼곡히 새겨냈다. 책 속에는 말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전달받아 다시 말하려는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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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모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시간이 멎는다. 시간은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멈추어 준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영원의 시간. 나이가 없는. 시간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고정된다. 그들의 영상, 그들의 기억은 쇠퇴하지 않는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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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학경은 『딕테』에서 시간과 기억이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멈추어 준다”거나 “쇠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기억을 회생시키라. 말하는 여자, 딸로 하여금 땅 밑으로부터 나타날 때마다 샘을 회생시키도록 하라”고 말한다.5) 시간이 마구 내달릴 때, 잡아 두지 않고 외면한다면 기억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말해진 것들을 두고 다시 말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두가 그 끝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맞이했거나, 지워지지 않는 상흔 속에 갇힌 이들은 그 시간을 떠나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기에, 기억을 지속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글을 읽고, 쓰고, 읽히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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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실제의 시간을 대체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을 앞에 전시하고 그것을 엿보는 자가 된다고. 그녀는 죽음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올 수 없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죽음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죽지 않고는 그것의 극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6)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 놓고 그것을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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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며 지나간 것들을 낡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앞에 전시”하기 위해 시간을 잠시 붙들고 묘사해야 한다. 말해진 것들을 다시 불러내어 되새겨야 한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질 것들을 글 속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목소리와 상흔을 눈앞에 다시 불러내어 지켜내는 행위다. 우리는 새겨진 글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전시”하고 들여다봄으로써 죽은 언어를 불러내고, 다시 살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산 자들은 그것들을 둘러앉아 지켜보며, 소멸되지 않도록 힘껏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알고 있는 사실. “무덤”을 잘 들여다보면 느낄 수 있는 사실. 한국이라는 땅과 여성이라는 자아가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뿌리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들을 모아 읽고, 다시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판단이나 해석이 아니라, 이미 말해진 것들을 온몸으로 어루만지며 그래야 할 것이다. “샘을 회생시키듯”, 그 목소리들을 길어 올리자. 잠시 멎은 시간을 눈앞에 불러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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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 지성사, 1999), 51.
2)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박영심(1921-2006)의 진술이다. 《우리가 그랬구나》(더페이지갤러리, 2014.10.4-10.31) 전시의 필사(따라쓰기) 행사 ‘다시, 그녀의 말’의 필사문에서 발췌했다.
3) “차학경은 단지 교사가 불러주는 것을 적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의 접신을 통해 시적 음성의 내림을 받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내적 음성, 어머니의 음성,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의 음성,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민중의 음성, 역사 속에 사라져간 민족의 음성을 듣고 받아쓰기를 한 것이다.” 김경년, 「『딕테』와 차학경의 예술세계」, 차학경 외, 『딕테』, (문학사상, 2024), 222.
4) 앞의 책, 47.
5) 앞의 책, 146.
6) 앞의 책, 152-153.
7) 앞의 책, 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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