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덴탈크리틱 전시를 통해 받은 피드백들을 하나씩 읽어가며, 우리가 스스로 '스팸메일'에 빗대며 자조적으로 바라보았던 비평 활동이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활동에서 워크숍을 통해 관객들과 직접 대화하기도 하며 텍스트가 매개하는 소통의 가능성을 체감했고, 소중한 피드백들은 메일링이라는 일방향적 전달 방식을 넘어선 쌍방향적 교류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 레터 역시 여러분의 메일함에 도착하는 순간 다시 한번 스팸과 비평 사이의 애매한 지대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순을 발견한 치욕스러움과 기특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피드백들은 비평이 단순히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 텍스트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읽히거나 읽히지 않거나, 환영받거나 거부당하거나, 그 모든 가능성들 속에서 비평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앞으로는 좀 더 자신 있게,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교류의 기회들을 만들어가며 비평을 이어나가고 싶다.
박예린
페이스북, 트위터(X),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고 흘려보내는 SNS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터는 기억이 쉽게 휘발되는 것 같다. 쉴 새 없이 쌓이는 이미지와 글은 메일함을 채운 스팸 메일처럼 어딘가 깊이 묻혀 사라지고, 이 기록들이 인터넷 공간에 영구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감각 또한 점점 희미해졌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서는 불과 얼마 전 기록을 다시 볼 때에도 마치 오래 잊었던 기억을 불쑥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순간에 나는 글쓴이가 그려본 적 없는 미래에서 작은 댓글을 남기곤 한다. 글쓴이는 사라질 줄 알았던 문장이 누군가의 뒤늦은 시간 속에 머물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끝으로 눌러 쓴 답장들에서, 혹은 사람들의 말에서 내가 느꼈던 마음들이 꼭 그랬던 것 같다.
배진선
《덴탈 크리틱》을 준비하며 에포케 레테에서 ‘스팸 메일’을 주제로 비평을 고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던 덕분에, 처음으로 글을 쓰는 욕망을 문장으로 털어내 수신자/관람자에게 전송했다. 내가 쓴 비평과 연구가 ‘스팸’으로 자리할 가능성은 즐겁기도 하다. 어떤 독자들과는 호흡하고 어떤 수신자에게는 무관심으로 지나치며 누군가에게는 골칫덩어리로 취급된다는 상상은 쓴다는 일의 무게를 덜어내기도 한다. 스팸을 공부하며 “정보기술 인프라”를 이용한다는 특성이 흥미롭게 다가왔는데, 나는 에포케레테 멤버들도 전시공간인 ‘수건과 화환’와 이우솔 큐레이터도, 참여 비평가들도 대부분 그 존재를 (일방적으로든 쌍방향으로든)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처음 알게되었다. 그리고 전시에 방문했던 독자/관람객 중 다수가 SNS를 통해 전시 정보를 얻었을 것이고 에포케 레테 구독자들도 온라인 뉴스레터로 에포케 레테를 알게 된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스팸이 잘 짜여진 알고리즘 안에서 우연을 가장하며 수신자들을 닿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운명일까? 에포케 레테가 여전히 “스팸과 비평 사이 애매한 지대에 놓일”지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또다시 즐겁게 만나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낼 순간들이 다가오리라 믿는다.
유희림
스팸메일은 대개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이러한 형식은 몹시 기묘하다. 발신자가 명확하지 않고, 문장은 과장되거나 산만하며, 때로는 의도를 분명하지 않게 흐리는 방식으로 수신인에게 어떠한 사고나 행동을 유도한다.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글의 형식과 다른, 이러한 낯섦과 이질감은 기존의 사고를 잠시 멈추게 하고, 관점을 비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글쓰기 공간이 블로그와 브런치가 전부였던 나는, 에포케레테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글쓰기 이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적어도 나에게는 글쓰기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상상할 수 없는, 독자적인 활동이었다). 글이 물리적 공간에 전시되고, '읽힘'되어 실제적 사건(그동안 나의 독자는 실체가 없었다. 추측과 상상 속에 그려졌던 것이다)이 된 것이다. 심지어 나의 글에 답장이 왔다. 아래는 답장 전문이고, 그 아래는 나의 재답장이다.
답장: '좌대로 기어올라가 사적인 생각이 대상이 되고, 저의 판단이 어떠한 역할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차단한 이에게서 연락이 오길 바라는 자주 모순적인 제 태도와 비슷하다 여겨서 입니다. 저는 제 모순을 목격했을 때, 치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발견한 제가 기특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장르도 소속도 없는, 애매모호한 잡종과 같은 글, 일기입니다.
재답장: 독자님, 안녕하세요. 제 글에 답장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물러나는 것이 익숙”한 탓인지, 답장을 받았을 때 오히려 제가 썼던 글을 곱씹어야 한다는 부담이 먼저 들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수에게 보라고 내놓고, 답장이 오길 기다리던 글을, 정작 제가 스스로 외면하고 싶어하다니요. 독자님처럼 저도 모순을 목격할 때마다 치욕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들여다 보면, 모순을 해소하고 싶기보다는 ‘그래도 누군가는 봐주길 바란다’는 기대가 더 커지더군요. 이 이중적인 심리야말로, 제 근본 없는 글을 움직이게 하는 하찮지만 확실한 추진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글은 사적인 생각의 파편을 대충 쓸어 담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일기로 읽힐 수 있겠습니다.
심하린
한 편의 글을 완성해야 할 때면 늘 예상 독자를 상정하고 구조를 짜는 것에서 시작해 왔다. 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과 전시를 보며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를 최대한 글자의 형태로 만들어내려 애쓴 뒤, 그것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포장도로를 깔아두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위한 글을 조금 달랐다. 제자리에 머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숨긴 채, 멀리 가기보다는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를 생각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는 말이 닿지 않은 채로도 꽤 오래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다행히 코멘트를 읽고 나니, 반응이 유예된 글들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믿어볼 수 있었다. 메일함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잠잠하던 기척이 어느 날 불현듯 되살아난다면, 그것은 발신자가 억지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며 스스로 살아난 말의 몫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읽히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최은총
답장 중에 “비평은 꼭 날카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비평은 때때로 사랑”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이번 글을 쓰면서, 비평으로 맺은 여러 관계를 떠올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내게 큐레이팅이 작품과 전시가 맺는 관계라면 비평은 작가와 비평가가 맺는 관계였다. 그래서인지, 전시라는 무대 위에 작품을 올려두는 큐레이팅과 달리, 비평의 순간은 작가와 비평가라는 두 사람이 함께 지면이라는 무대에 서는 퍼포머처럼 느껴졌다. 그 무대 위에서 ‘과연 나는 내 파트너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 채 글을 써왔던 것 같다. 전시가 작품을 다루는 일이라면, 글은 어쩌면 조금 더 내밀한 동행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동행 속에서 나는 안전한 사람이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나의 경제적 상황, 학업적 어려움, 자격, 소양, 재능… 나도 모르게 세워두고 있던 ‘화자로서의 나’의 기준과 자격들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지점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후 이 부끄러움을 마주하며 다듬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비평에 대한 머뭇거림과 주저함이라는 여유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야만 비평이 맺어주는 관계를 돌아보고, 진실되게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때로는 사랑이 되는, 그런 비평을 적어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문희
A와 B가 같을지도(혹은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비유를 기꺼이 듣고 보아주셔서 감사하다. 내게 있어 가장 즐거운 글쓰기는 일기인데, 어린 시절의 일기는 으레 그렇듯 남의 손을 잘 타고 또 여러 명에게 읽히기 마련이라 일기-글쓰기-노출증이라는 연결성을 발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놓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럼으로써 일말의 즐거움이나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두 가지가 같은지,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