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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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쉰일곱 번째 뉴스레터] 평화문해력, 넋과 죄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기술(技術/記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평화문해력, 넋과 죄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기술(技術/記述)]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대한민국에 온전한 봄을 완결된 과거로 흘러보낼 수 있을까?
미지의 미래로 기약해야 할까?
여전히 남겨진 수많은 폭력들 사이로,
우리는 과거에 스러져간 넋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겪으며 지나치고 행하기도 했을 죄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기술들을 되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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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문해력, 넋과 죄를 끌어안고
사랑하는 기술(技術/記述)
배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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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종전에 힘입어 광복을 맞이한 민족에게 ‘평화’는 기쁘지만 당혹스럽다. 평화는 강력한 사랑의 단어이자 속박의 단어로, 모든 폭력을 거부한다. 억압과 배제, 차별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도록.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미 새겨진 상처와 분노는 어떻게 다룰까? 우리는 트라우마에 대항하여 권력을 공격하려고 애쓰지만 막막하게도 벽을 부술 길이 없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분노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더 약한 존재들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평화 문해력’ 개념을 창안한 인물로 알려진 폴 K. 체팰은 되풀이되는 폭력의 과녁을 맞이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채펠에게는 한국 광복과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역사의 상흔이 가득하다. 그는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흑인과 백인 혼혈 미군 아버지와 전쟁으로 일본에 거주했던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나,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혼혈에 가해진 차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퇴학과 정학 위기를 반복해왔으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이라크 전쟁에 참여했다. 인간의 폭력성과 평화를 향한 질문을 심화시켜간 이래, 전역 후 ‘평화 문해력( Peace Literacy)’ 개념을 발전시켜 평화운동가로 활동한다.
채펠은 평화문해력을 “인간다움을 깊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삶을 충만하게 하고 평화를 지속하기 위한 체계를 제공”한다고 정의한다. 그는 평화문해력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대하며 괴롭힘을 비롯해 다른 형태의 공격들에 대안을 찾는” 기술을 익혀 “세상과 공동체가 더욱 안전하고 나아지는” 데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1) 즉, ‘평화 문해력’은 수많은 구조적인 불의에도 우리가 냉소와 절망에 갇히지 않고 자존감이나 유대감 등 내면의 욕구를 정확히 이해하며 희망을 지속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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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평화문해력≫, 2025, 소현문. 전시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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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봄, 소현문에서는 ≪평화문해력≫이 열렸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전시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평화운동인 두 지점, 3·1만세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의 날에 열고 닫는다. 백필균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김재홍, 이겨례, 최지인, 현승의가 작가로 참여했으며, 윤리교사 김성희가 서문을 썼다. 채펠의 ‘평화문해력’이 동명의 전시에 직접적인 영감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김성희의 서문은 지구 반대편에서 활발하게 전해지는 가치가 겹쳐지는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같은 곳을 향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는 한강의 「빛과 실」을 인용하며 예술이 “직접적 폭력과 사회 속의 구조적 폭력, 이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부여”하기에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인 평화 문해력은, 정치·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문화·생태적인 차원 등으로 확장되는 적극적 평화의 길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2) 이에 답하듯 소현문은 전시를 소개하며 “역사를 성찰하고 문제를 마주하는 평화 문해력으로 시대 감각에 접속”하고자 한다.3) 이 글은 전시에서 드러나지 않는 최지인의 시를 추적하며 김재홍, 이겨례, 현승의의 드러난 회화를 바라본다. 이미지로만 가득한 미술 전시, 심지어 문장으로 엮어내기 힘든 회화들로 한가득 구성된 ≪평화문해력≫에서 써내려갔던 역사를 읽어가고 그에 얽힌 평화를 향한 마음을 상상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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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버린 시간을 애도하며4)
소현문 1층 전시공간은 지면 아래로 조금 내려앉은 구조다. 최지인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관람객은 땅의 경계를 훑는 “두더지”가 되어 전시장을 맴돈다. 그는 이 시에서 누군가의 말을 기록한다. “밑바탕이 무너지고 있다.” ≪평화문해력≫은 공간에 따라 섹션을 구분하지 않음에도 이 곳에 놓인 작품들은 시인의 문장처럼 밑바탕이 무너진 자연지대에서 돋아나고 부유하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나는 언제나 시를 오독하는 편이라 조심스럽지만, “지구를 떠난 에너지 과잉들” 사이로 지난 날의 꿈을 지나 “어쩔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사건 사이로 희생된 존재들을 애도하다가도 슬픔을 뒤로 한 채 숨어들었다 다시금 불의에 소리내어 지대를 구멍내는 우리들의 모습은 1층에서 만나는 작품들과 닮았다. 세 작가는 저마다 땅과 강, 바다, 능선 곳곳에서 이미 역사로 새겨졌거나 아직 역사로 남지 못했던 사건들을 사실에 비껴가지 않고 변주하거나 은유를 덧씌워 응시한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시간을 쌓아올린 그림들은 “확성기가 침묵의 끝에 닿을 때 천둥 쳤다”고 읊는 시구와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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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현승의, <징조들>, 2023, 장지에 혼합매체, 각 130 × 194 cm, 3폭.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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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바다로부터 나아간다. 전시 공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현승의의 <징조들>(2023)은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뻗어나간 이후 바다 면면들을 담아낸다. 먹히거나 숨쉬는 생물들, 소금 포대, 보도화면, 마시고 일하거나 모의하는 손들, 고요히 울렁이거나 거세게 굽이치는 파도 등 확대되고 잘려나간 화면들은 선명하게 묘사되고 희뿌옇게 덮였다. 지나간 역사를 기록한 뉴스들의 열화된 이미지 같기도, 아무도 관심없어 방치된 관제실의 먼지낀 모니터 같기도 하다. 특정 사건의 여파라고 지명하지 않았기에 이 작업은 우리가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바다를 망쳐 왔던 증후들, 그리고 미래에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조짐들까지 아우른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세계 권력은 경제 이윤을 빌미로 쉽게 침묵하기로 합의했다. 1980년대 양산의 고리원자력발전기 폐기물 유출부터 바로 작년에 일어난 월성핵발전소 냉각수 유출까지 한국에서도 일반인에게 영향갈 정도는 아니라는 변명과 관리 기준에 따라 희석한다는 근거로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바다로 방출된다. 최지인이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하고 돌이키듯, 타국이 저질렀기에 쉽게 비난했던 일이 우리에게 닿을 때 <징조들>은 또다시 드러날 것이다. 장지를 가득 메운 검정 농담은 바다를 가득 메운 검은 기름 때와 잿빛 오염수를 무겁게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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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현승의, <Scenery for You 2>, 2024, 장지에 혼합매체, 72.8 × 91 cm. 이겨례, <코>, 2019, 캔버스에 유채, 181.8 × 227.3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도 4)
이겨례, <사람들>, 2025, 이겨례, <흐르는 강>, 2024, 이겨례, <토요일>, 2025.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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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김재홍, <자진>, 2024, 김재홍, <거인의 잠 - 장막>, 2025, 이겨례, <흐르는 강>.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도 6)
김재홍, <민들레>, 1996, 캔버스에 아크릴릭 채색, 72.7 × 90.9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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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로 복잡한 <징조들>과 대비되어 현승의의 다른 작품 <Scenery for You 2>(2024)와 이겨례의 <코>(2019)는 바다 속 기억들을 고요하게 떠올린다. 푸른 수면 위로 숨들이 희미하게 방울방울 기포가 되어 드러나는 가운데 하얀 코가 빼꼼히 보인다. 동시에 그 코는 가라앉아가는 배를 떠올리게 한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코>는 사건을 겪고 지켜 본 이들 모두가 사라진 뒤 수 백년이 흘러 바래지고 훼손될지 언정 남아 있을 기록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보존하는 사료로 남는다. <Scenery for You 2> 또한 그럴 것이다. 제주의 야자수는 이국적인 자연을 조성하기 위해 들여온 외래종이지만 강풍과 태풍이 잦은 날씨에 안전 사고를 일으키는 골칫덩이로 취급받는다. 자생종인 배추흰나비처럼 보이는 나비와 외래종인 야자수가 인위적으로 만나 변하지 않을 바다를 맞이하는 풍경은 미래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지 점치며, 당신을 위한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왔는지 환기시키는 기록이 된다.
바다는 강으로 이어지고 땅에 닿는다. 이겨례의 <흐르는 강>(2022-2023) 연작에서 파랗고 흰 색의 경계는 배경을 이루는 강과 산맥의 경계처럼 뚜렷해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로 겹쳐진 물감 너머 드러나는 엷고 짙은 색들 마냥, 무엇이 풀이고 무엇이 흙이고 무엇이 자갈이고 무엇이 흙과 자갈 사이 고인 물방울인지 모호한 너머로 아버지와 작가 자신의 경계 역시 분명 다르지만 교차되는 경험들을 끌어안기에 쉽사리 구분될 수 없는 세대 경계다. 그의 신작 <토요일>(2025)과 <사람들>(2025) 또한 역사를 휘감는다. 땅을 딛고 서서 걷는 군중들은 삶을 위해, 일상을 위해, 정의를 위해 무리 짓는다. 관람객이 저마다 가치를 가지고 상상하면서도 오독하지 않도록 하는 ≪평화문해력≫은 이겨례, 현승의의 작품과 김재홍의 작품이 더불어져 온전하게 뿌리내린다. 김재홍의 <자진>(2024)과 <거인의 잠 - 장막>(2025)에서 능선 같은 남자의 육신 사이로 포탄의 화마가 끓어오른다. 20세기 내내 한국을 포함해 크고 작은 규모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지역만 이동할 뿐 21세기에도 시시각각 벌어진다. 일찍이 작가가 다른 작품 <가보세가보세-일포륜>(1997)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반복된다는 예언일까? 만약 그렇다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무자비한 재난과 권력의 거센 횡포로 타오를지라도, 연약하게 계속해서 흩날리고 꽃 피는 민들레처럼 민중들은 뿌리 뽑혀 흩어지더라도 어딘가에서 뿌리내려 땅을 일구고 저항하는 정신을 바람 사이로 전해왔다. 벽에 단단히 고정된 화마와 수레바퀴와 대조적으로 창틀에 툭 놓인 <민들레(2)>(1996)는 진한 색채와 명백한 형상으로 어떤 곳이더라도 뿌리내릴 수 있는 희망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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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는
쓸쓸해서
바리케이트 앞에 선 시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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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문 2층에서 작품들은 막에 접합한 존재들로 역사를 점검한다. 그 막들은 얇기도 두껍기도 노출되기도 숨어 있기도 한데, 공통적으로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이어져 어쩌면 미래에까지 계속될 불의와 저항의 흔적이다. 최지인이 <커브>에서 제주, 스리랑카, 아이티 등지에서 벌어졌던/지고 있는 사건들을 가로지르며 고독과 주저와 사랑을 함께 내뱉었던 문장들을 떠올리자. “과거가 말하길, 망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시인은 “의자에 앉아 세월을 곱씹었다.” 이제 우리는 시인의 다짐을 전시장에서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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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7) 김재홍, <침묵>, 1991, 캔버스에 유채, 122 × 244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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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8) 김재홍, <거인의 잠 - 202103>, 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채색, 161 × 330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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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문 2층에서 작품들은 막에 접합한 존재들로 역사를 점검한다. 그 막들은 얇기도 두껍기도 노출되기도 숨어 있기도 한데, 공통적으로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이어져 어쩌면 미래에까지 계속될 불의와 저항의 흔적이다. 최지인이 <커브>에서 제주, 스리랑카, 아이티 등지에서 벌어졌던/지고 있는 사건들을 가로지르며 고독과 주저와 사랑을 함께 내뱉었던 문장들을 떠올리자. “과거가 말하길, 망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시인은 “의자에 앉아 세월을 곱씹었다.” 이제 우리는 시인의 다짐을 전시장에서 되풀이한다.
2층 전시공간에서 크고 무겁게 관람객을 짓누르는 두 캔버스는 김재홍이 그린 작품들로 상처입은 개인의 초상이면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아로새긴 풍경이다. 먼저 작가가 1991년 커다란 캔버스에 가득 그려낸 몸은 대부분 천으로 감싸졌다. <침묵> 속 그는 “1980년 광주 어느 길에 아무”이자 “길바닥에 등을 대고 얼굴에 천을 덮은 누군가. 민주화운동 전선에서 집으로 돌아온 혹은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 동료와 함께 하지 못한 부채의식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세상에 부끄러운 얼굴을 가린 ‘침묵’의 주인”이다.6) 천은 아무리 두터운 소재라도 얇은 물질에 속하는데, 주름 하나하나에 물감을 묵직하게 올려낸 붓질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무게를 두껍게 쌓아올렸다. 반대편이 아닌 모퉁이 너머 <거인의 잠 - 202103>(2021)에서는 가냘프지만 질긴 장막에 눌어붙은 삶이 꿈틀댄다. 김재홍이 1990년대부터 그려왔던 동명의 작품들 가운데, 소현문에 걸린 작품은 상처투성이 피부가 툭툭 튀어나온 뼈들을 감싼 신체의 일부를 갈비뼈인지 날개뼈인지 쇄골인지 모호할 정도로 지나치게 확대해서 보여준다. 그 몸의 주인은 작가의 장인으로 일본군에 징병되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후 대동아 전쟁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한국 전쟁 때는 신의주에 고립되고 미군 포로로 끌려가고 국군에 입대하며 10년을 보냈다.7) 피부의 부드러운 굴곡 위로 요동치는 시간을 축적한 흉터가 그려지고 흩뿌려진 질감들은 각질과 모공, 또는는 모래알들을 연상시키며, 전쟁과 개발로 황량하게 베이고 발가벗겨진 능선과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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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9) 이겨례, <노근리에서>, 2025, 캔버스에 유채, 60.6 × 50 cm. 이겨례, <Index>, 2025, 캔버스에 유채, 60.6 × 50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도 10) 현승의, <동자견록도(童子牽鹿圖)>, 2024, 와시에 먹과 호분, 84 × 51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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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이 단일한 개인 존재와 내면을 가까이 밀착시켜 과거의 아픔을 지나보낼지 언정 지워낼 수 없음을 인식시킨다면, 이겨례와 현승의는 거리를 벌려 사건을 관찰한다. 이겨례의 <노근리에서>(2025)는 진상조사를 위해 이후에 만들어진 총탄 위치 표기만 분명할 뿐 실제 탄흔들은 어르슴하게 덮여 있다. 마치 학살 사건 후 오랜 기간 현장이 아스팔트로 덮여 통행로로 사용되며 처참히 희생됐던 소수가 미군에 안락히 기대왔던 다수의 공동 기억에 묻혀왔던 시간들 같다. 이겨례는 이렇게 안개처럼 어스름한 기억에 갇힌 희생자들을 그려낸다. 엷은 보랏빛 덩어리는 인간 육신에 박힌 여러 발의 총상이자 노근리 쌍굴 다리 밑 학살된 민간인 집합체이기도 하다. 두 차례 탄핵 시위를 아우르는 듯 촛불과 응원봉을 함께 떠오르게 하는 <Index>(2025)는 그 옆에서, 희생이 켜켜이 쌓여 도래한 민주주의와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을 잊지 않았음을 화답한다. 한편 현승의의 작업은 건너편에서 권력이 가한 상흔의 대상을 비인간 존재까지 확장해낸다. <동자견록도(童子牽鹿圖)>(2024)는 조선 중기 김시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를 다시 그린 작업으로, 소나무 밑 나귀(驢)를 야자수 밑 날개 달린 사슴(鹿)으로 재해석한다. 관광산업을 목적으로 외국에서 제주로 이식된 종인 야자수와 사슴은 “경찰에게 발각되어 끌려갔을” 인간 희생자들과 다름 없다. 구경꾼들을 위해 옮겨 심어졌다 다시 화면 밖으로 끌려갈 존재의 우화를 새기며 반세기 넘게 이상적인 낙원 개발을 명목으로 의도적으로 조성된 자연을 되짚는다. 전쟁, 민간인 학살, 민주화 운동, 재개발, 시위와 투표. 이렇게 ≪평화문해력≫ 2층의 작품들은 근경(김재홍), 중경(이겨례), 원경(현승의)로 엮이며 광복 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리고 권력에 맞선 저항과 폭력으로 겨냥한 진압이 동시에 일어난 4월 19일에 맞춰, 소현문 2층에서 진행됐던 최지인 시인의 낭독회는 이 모든 작품들과 어우러져 역사의 무거움을 응축적으로 읽어냈다. “죄를 짓지 않을 아이와 같은 해에 태어난 나는 그에 비해 안온한 시절을 보냈다 그의 모국: “독재자에게 죽음을” 외치는 거리를 걷다 보면 죽은 자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됐다” 시인은 참회하듯 읊었다. 이어서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후를 도모하자 분노하라”는 선언적인 다짐을 “빛을 잃은 파편들”인 마냥 담담하게 읊었다. 그곳에서 나는 시가 곤혹스럽다고 말했는데, 최지인의 시들이 내리누르는 마음을 뚜렷이 설명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가 다른 시에서 짚어내듯 “노동착취가 합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8) 한국에서 죽음은 전쟁과 독재로 얼룩진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 비해 빈도수가 낮을 뿐 무작위로 내리 꽂힌다. 그렇기에 80년을 거쳐 지금에도 여전히 “가능을 팔아 불가능을 얻을 뿐”인 젊은이들은 “지독한 안개 속 점멸하는 비상등”을 지나며 “다르게 살 수 있다” “미래를 갖고 싶다”고 저마다 헤매고 있다.9) 소현문의 전시 ≪평화문해력≫은 우리에게 그 오랜 시간 수많은 절망이 내리눌러 점점 짧아지는 봄을 맞이하더라도 어떤 바리케이트를 부수길 선택할지, 나아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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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재건되었고
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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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1) 이겨례, <표면을 바라보며 깊이를 생각하다>, 2024, 캔버스에 유채, 53 × 40.9 cm. 이겨례, <Platz>, 2017, 캔버스에 유채, 118 × 1500 cm. ≪평화문해력≫ 설치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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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붙이는 말장난 같지만, 이겨례가 <Platz>(2017)에서 배경으로 삼은 라이프치히 아우구스투스 광장에는 실제로 기념비가 세워졌다. <민주주의의 종 Die Glocke der Demokratie>이 1989년 평화시위를 기념하며 20년 뒤 설치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동독 체제를 거치며 광장 주변 많은 건물들이 파손되었고 완공되었다. 한편 동독 국가 가운데 가장 부유한 도시에 살아감에도 시민들은 사회주의를 이용하는 공산당에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쳤다. 작가는 세 개의 너른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광장을 둘러 싼 한 세기 역사를 파노라마로 조망하고 고고학자처럼 주변 건축물들을 기록해 그 위에 쌓아둔다. 바래지고 흐려진 기억들과 대비되듯 나란히 놓인 <표면을 바라보며 깊이를 생각하다>(2024)는 선명한 녹색으로 빗줄기와 물방울 고여냈다. 두 작품들은 현승의의 농담이 흠뻑 담긴, <그냥 농담이야>(2024)와 함께 그러나 다소 거리를 두고 우만동 카페 바르토스 커피랩에 전시된다.
소현문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떨어진 바르토스 커피랩은 인근 아파트, 빌라는 물론 수원 여권민원실과 월드컵경기장 내 조각공원과도 가까워 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는 카페다. ≪평화문해력≫은 바르토스 커피랩을 위성공간으로 삼아 전시 포스터와 작품들로만 새로운 관람객들에게 다가간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들어선 회화들은 아기자기한 커피 소품들 옆에 장난처럼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Maybe this will be the last)”고 속삭이거나, 아늑한 자리(platz) 너머 유럽풍 풍경이 엷은 색감으로 펼쳐지고 한창 유행인 스플레터 세라믹 다기들을 떠올리도록 선명하고 맑은 물감들이 흩뿌려진 모습이다. 아마 소현문을 먼저 찾은 후 전시를 이어 보기 위해 방문하거나 예술에 관심이 높아 애써 물어보고 SNS로 정보를 찾지 않는다면 작가들이 무거운 메세지를 모순적으로 농담을 섞어, 적막하게 자문하고, 깊게 연구하며 그려냈을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 이해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회화들로만 느끼더라도, 찰나의 마음이 겹쳐 허전하든 가볍든 고독하든 어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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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질 여지가 있을까요?
희망은?
모두가 이 세상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어요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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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광복은 예기치 않게 들이밀어진 선물이었기에 불안정하다. 종전이 아닌 정전 상황으로 분단된 국가는 여전히 평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평화는 모순적이게도 자주 안보와 연결되며 또다른 폭력을 잠재한다. 전쟁에 결착된 평화는 아직 온전히 해결되지 않아, 최지인이 염려하는 “눈 비비는 푸드코트 종업원”과 “전장에서 살인하지 않기 위해/ 고층 건물에서 떨어진/ 젊은이”12)에게 평화는 요원해보인다. 그 외에도 파쇄기에 빨려간 젊은 노동자와 제재소 분쇄기에 손이 낀 아버지13), 할머니를 돌보는 고모14), 가난하고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고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와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15), 시집에 걸쳐 가슴을 짓누르는 모든 “곤경에 처한 사람들/ 곤경을 외면당한 사람들”16)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럼에도 최지인의 시집이 언제나 사랑으로 마친다는 것은 신기하다. 첫 시집『나는 벽에 붙어 잤다』마지막 시에서 그는 일상이 계속되리라 희망하며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무사히 이륙하겠지/ 착한 사람들”17)로 끝맺는다.『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에서는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일하고 사랑하고 희망할 것이다”18)고 매듭짓고,『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에서는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서로를 살아낼 것이다”19)고 남긴다. 그의 시에 수많은 실패와 가난과 전쟁과 탄압, 그리고 그러한 폭력들이 낳은 혼란, 절망, 우울, 쓸쓸함 등등 모든 비관들이 짙게 깔려 있음에도 다정하게 돌보는 마음들이 있다. 평화문해력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국가와 거시적인 사회에 중요하게 다루는 평화에 동떨어진 듯한 이들에게 평화문해력은 “공격성을 이해하고 치유하며” “공감을 유지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계속해서 공감을 쌓아가고” 양극화되지 않는 평화를 제시한다고 제안한다.20) 소현문에서 ≪평화문해력≫을 꾸려간 이들은 모든 불안한 절망에도 희망을 찾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는 과거에 스러져간 넋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겪으며 지나치고 행하기도 했을 죄를 끌어안으며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기술들을 되새겨 평화문해력을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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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지인, 「두더지」,『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43. 해당 소제목으로 묶인 문장들 가운데 최지인 시의 인용구는 모두 이 시에서 가져와 별도 주를 생략한다.
5) 최지인, 「커브」,『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13-17. 마찬가지로 소제목으로 묶인 문장들 가운데 별도 표기가 없는 인용구들은 모두 최지인의 같은 시에서 가져와 주를 생략한다.
8) 최지인, 「파고」,『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45.
9) 같은 시.
10) 최지인, 「시민의 숲」,『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
11) 최지인, 「나쁜 숲」,『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53. 12) 같은 시, 52-53.
13) 최지인, 「조용한 일」,『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60.
14) 최지인, 「전망」,『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74-75.
15) 최지인, 「몇 가지 사건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86, 90.
16) 같은 시, 89.
17) 최지인, 「리얼리스트」,『나는 벽에 붙어 잤다』(민음사, 2017), 143.
18) 최지인, 「시인의 말」,『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 215.
19) 최지인, 「시인노트」,『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아시아, 2023), 95.
20) Chappell, What is Peace Literacy?,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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