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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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쉰여섯 번째 뉴스레터] 새겨짐-접촉하기, 어루만지기, 흔적-기록하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새겨짐-접촉하기, 어루만지기, 흔적-기록하기]
몸은 기억의 표면이고, 돌은 말 없는 증언자다. 수난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흔적으로 남는다.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감각하는 손으로, 언어로, 몸짓으로 어루만져야 한다. 그렇게 ‘동사’해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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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이 몸은 온갖 수난사를 거쳐왔다. 우연적 조건들로 채워진 나의 몸은 그 수난사가 기록된 여성의 몸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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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겨짐-접촉하기
“대상으로서의 이 몸”은 타자에 의해 뜯고 씹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등 따숩고 배부르다. 일상은 지나친 안락 속에서 흘러간다. 그러다가도 겪어보지 못한 이야기에 관해서 마음이 한없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온갖 수난사”는 몸에 날카롭게 새겨져 피딱지를 남긴다. 그리고 탈각되어 흉터를 남긴다. 흉터는 진짜 몸에 새겨졌다가, 세대에 흔적을 남겼다가, 뒤늦게 자각된다.
나조차 나를 주인 삼지 않나 보다. 자꾸 나의 몸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 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게 애써본다. 결국 내가 나를 주변으로 밀어낸다. 그러면서 공간을 만든다. 기록과 감정을 관찰할 수 있도록.
“몸은 항상 동사에 연결되어 있다.”2)
내가 움직이자, 흉터도 따라 움직인다. 몸 위에 얹어진 것이 아니라 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몸은 몸짓을 낳는다. 그리고 그 몸짓은 또 다른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말과 글이 되었다.
2. 어루만지기
어느 한 부분도 같지 않다. 베일을 벗어내듯, 돌의 민낯은 사정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자국들, 긁히고 깎인 흔적들···.
마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모여서 거대한 산을 이루는 것 같다. 산이라면 말과 시간이 빼곡하게 중첩되고 축적되어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나날을 견디며 새겨지고 지워진 것들을 품거나, 내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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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월출산 시루봉, 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34초, 스틸 이미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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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손을 나에게 줘.”
모든 역사를 온전히 껴안거나 돌보듯, 손은 그것들을 구석구석 어루만진다. 그 행위는 가시화된다. 돌은 행위자에 의해 한층 연약한 살갗을, 온몸으로 담아낸 세월의 지난함을 한 꺼풀 토해내듯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타자의 껍질”은 마치 “영혼”들이 응집했다가 끝내 배설한 비명처럼 보인다. 비명은 우리 앞에 커다랗게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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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월출산 시루봉, 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34초, 스틸 이미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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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 보지마.”
작가는 돌과 마주 보지 않는다. 마주 본다는 것은 서로의 거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거리를 허락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려 한다. 조금의 시간차도,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 그는 무른 살갗은 돌에 꼭 붙어, 세상 가까이 돌을 이해한다. 그러나 돌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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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월출산 시루봉, 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분 34초, 스틸 이미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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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흔적-기록하기
붉고 드높은 돌산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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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 인수봉 2024, 설치, 광목천에 크레용 프로타주, 1100x155cm(6)+ 사운드설치(10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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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새겨진 우둘투둘한 길목을 따라가 본다.
문득 돌의 시점을 떠올린다. ‘나를 덮치고, 사정없이 문대는 사람들이 있다.’ 돌은 수난사이다. 몸은 수난사이다.
돌이 기나긴 세월을 견딜 동안 바라본 것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새겨지거나 지워진 것들은 무엇을 남겼을까. 벗겨지고 드러난 돌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우연적 조건들”을 가진 내가, 돌을 영혼으로, 수난사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만지고 문질러 몸으로 이해한 타자의 피부 껍질”을 벗겨낸다. 사정없이 긁어내는 행위는 어쩌면 침범과 수난의 역사와 맞닿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행위가 불쾌하면서도 아리게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 아픔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외면하지 않을 수 있게 살펴볼 수 있을까.
때로는 감히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는 듯, 나는 ‘동사’해야 한다. 단편적으로 헤아린다면 잘못된 감상과 기억이 새겨지고 짙어져 왜곡과 오점을 남길 수 있으니, 따라 움직여본다. 빈틈없이 감싸안으며 다른 세계를 만들고 그 수난을 위로해야 한다. 돌은 몸이고, 나의 몸은 반응한다. 상대방을 품어주고 끝내 회복할 수 있는 결말을 만들어주고 싶다. 몸은 동사의 역사이다. 그러니 함께 움직이고, 말하고, 쓰고, 읽힐 용기를 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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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혜순, 문학동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의 몸, 219.
2) 앞의 책, 224.
3)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인수봉> 설치는 이전 작품들의 특징을 이으며 재탄생한 것이다. 홍이현숙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옷이나 직물을 사용해 건축구조물에 현장 설치작업을 진행했었다. 직물은 유연하고 스며들며 감싸안는 성질로 딱딱한 것들을 다른 종류의 것들로 변화시켜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10여 년을 건너뛰어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 암벽인 인수봉을 광목천으로 덮어 비석을 탁본하듯 프로타주하고, 그 천을 미술관 전시실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이 결과물은 영상 작품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월출산 시루봉>(2023)과도 연결되지만, 물성을 가지고, 접촉의 증거물로, 바위의 몸체를 직감할 수 있는 압도적 크기로, 12미터 높이의 전시장에 설치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작업은 이전의 장소 특정적 작업이나 영상과는 다르게 미술관에 들어온 인수봉의 허물로서 유령 같은 존재이다. 그것이 겪고 있는 기후 위기를 기록한 탁본이며 만지고 문질러 몸으로 이해한 타자의 피부 껍질이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 밤》 전시 리플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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