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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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쉰네 번째 뉴스레터] 유령의 귀환: 기억의 재발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유령의 귀환: 기억의 재발화]
제인 진 카이젠이 이들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도입한 영적 매개는 애도와 치유의 수단인 동시에 이들의 목소리를 앗아간 역사의 대안적 서술방식으로 기능한다.
그 과정에서 활자화되어 무뎌진 '유령스러움'은 다시 벼려지고, 산 자들은 이들의 발화로 인해 역사를 재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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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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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방언이 아닌 표준어로 옮겨진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는 납작하다. 기억을 기록할 때, 특히 그 기억이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져 통각(痛覺)을 수반할 때, 입말과 글말의 간극은 그 통증을 번역하는 것만큼 아스라하다. 그렇게 기억이 기록이 될 때 – 다시 말해 공적인 역사(History)로 편입될 때 – 역사적 상흔을 발화하는 주체의 행위성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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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 b. 1980)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개인의 구술 행위를 샤먼을 매개로 재발화함으로써 입말과 글말 사이의 틈을 메우고자 시도한다. 바리공주 신화를 테마로 삼은 카이젠의 〈이별의 공동체 Community of Parting〉(2019)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매개자인 심방(무당)의 입을 빌려 제주 4·3사건의 생존자였던 작가의 친할아버지의 목소리를 현재로 소환한 작업이다(도 1).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48년 미군정 체제 하에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식민지배와 광복, 전쟁, 분단과 냉전, 군사독재, 민주화를 거친 질곡의 한국현대사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현재까지도 정확한 사상자의 수는 규명되지 않았지만 3만 명이 넘는 도민들이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다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의심으로 학살당했다.2) 희생자의 유가족들 역시 가족이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연좌제 피해를 겪었으며,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나서야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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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 〈이별의 공동체 Community of Parting〉,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제인 진 카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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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공동체〉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이젠의 할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4·3사건의 생존자인 심방 고순안의 입을 빌려 오랫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사장(死藏)된 역사적 트라우마를 증언한다. 사회학자 에이버리 F. 고든(Avery F. Gordon)이 유령스러움(ghostliness)을 현재에 남아있는 “기억되지 못한 과거”의 흔적이라고 정의했듯, 유령의 귀환은 역사에서 지워진 기억의 보유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행위이다.4) 영매(靈媒)의 몸을 빌린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비가시적(invisible)이지만, 산 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들의 발화행위는 그들이 오랜 세월 겪어야 했던 고통에 실체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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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제인 진 카이젠, 〈잔해 Wreckage〉, 2024, 단채널 비디오, 12분. 작가 소장. ⓒ제인 진 카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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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카이젠의 신작 〈잔해 Wreckage〉(2024)는 국가가 생산한 ‘제국의 기록물’과 심방이 노래하는 구슬픈 만가(輓歌)의 병치를 통해 공적인 역사와 사적인 기억의 대비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도 2). 〈잔해〉에는 작가가 바다를 수중 촬영한 장면들과 광복 후 미군이 일본군이 남긴 다량의 무기와 포탄을 큰 선박에 실어 바다에 폐기하는 모습이 교차되어 등장한다. 일제의 무기가 침전한 바다에는 4·3사건 당시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선이 다시 가라앉았다. 심방 고순안의 만가는 바다에서 아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어미와 죽은 아들의 목소리를 번갈아 전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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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멍
어멍 가슴도 얼만이나 그때무룩
이때까지
자식은 죽으믄 어멍 가슴에 묻혔구나
/
비석은 세와주었저마는
느 가슴은 뭇내어난
오늘랑 열두문에
인정 걸거들랑
니 가슴 편안허게 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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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젠이 차용한 미군의 선전 영상은 그들의 의도대로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들이 서서히 녹슬어 바다를 오염시키도록 방치했다는 점에서 폭력행위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결국 제국주의의 주체가 광복 후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양되었을 뿐, 전쟁의 '잔해'는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으며 미군정은 4·3사건을 방관하였다. 작가가 "나에게 샤머니즘적 애도는 제국주의가 기록한 폭력에 대항하는 힘"이라고 밝혔듯, 그의 작업에서 주관적이고, 변칙적이며, 비이성적으로 취급되는 무속의 영역은 잊힌 사적 기억을 이 땅으로 불러내는 토양이 된다.5) 그럼으로써 재발화된 유령의 목소리는 역사가 서술하지 않은 비가시적 존재를 증명하며 그 거짓된 견고함에 균열을 가한다.
제인 진 카이젠이 이들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도입한 영적 매개는 애도와 치유의 수단인 동시에 이들의 목소리를 앗아간 역사의 대안적 서술방식으로 기능한다. 그 과정에서 활자화되어 무뎌진 '유령스러움'은 다시 벼려지고, 산 자들은 이들의 발화로 인해 역사를 재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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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225.
2) Dong-Yeon Koh, “The Postmemory Generation and Being Abandoned: Jane Jin Kaisen’s Film Community of Parting,” 『현대미술사연구』 51 (2022): 159.
3) 이진선, 「포스트메모리와 영상매체: 제주4·3사건을 다룬 영상작품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2024), 41.
4) Avery F. Gordon, Ghostly Matters: Ha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4, 홍승혜, 「유령의 귀환: 〈거듭되는 항거〉의 제주 4.3 다시 보기」, 『한국학연구』 46 (2017): 175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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