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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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쉰 두 번째 뉴스레터] In/Exclusion: 상품과 폐기물을 끌어안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In/Exclusion: 상품과 폐기물을 끌어안기]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서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종말은 역사에 대한 망각을 촉구하며 일말의 대안조차 없는 황무지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닌 안토니의 작업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일련의 충돌과 우연”이며, 예술적 실천은 그 안의 공허와 불안정성에 방점을 찍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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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xclusion: 상품과 폐기물을 끌어안기
김동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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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엑스폼(exform)의 영역이다. 그것은 버려진 것과 인정된 것, 상품과 쓰레기 사이 경계 협상이 펼쳐지는 현장이다. 엑스폼은 ‘소켓’이나 ‘플러그’와 같이 배제와 포함의 과정에 존재하는 접촉지점을 명시하는 것으로, 반체제와 권력 사이를 부유하며 중심과 주변을 뒤바꾸는 기호다. 추방 행위와 그에 수반되는 쓰레기는 엑스폼이 출현하는 지점이며, 바로 여기에서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진정으로 유기적인 연결이 만들어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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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마르크스주의자로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는 프롤레타리아의 범위를 공장 노동자에서 사회 전반에서 버림받은 이민자, 불법체류자, 노숙자, 더 나아가 “경험(그것이 무엇이든)을 빼앗기고 자신의 일상에서 존재를 소유로 대체하도록 강요받는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2) 정치적 전략의 정당화를 위해 희생되었던 노동자, 난민, 여성, 흑인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로서 잘 직조된 거대 서사를 뒤흔들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리오는 이러한 힘으로 세계의 불안정성(precarity)을 드러내고, 세계에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역사라는 허구적 시나리오의 시작과 끝을 재설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3)4)
예술가들은 발화과정에서 ‘탈락하는 것’. 즉 언어의 쓰레기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5)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상품'과 함께 끌어안는 것이리라. 바하마 태생의 미국 예술가 재닌 안토니(Janine Antoni, 1964-)는 머리카락을 염색제로 적신 후 갤러리 바닥을 칠하는 퍼포먼스 <러빙 케어 Loving Care>(1993)를 진행했다(도 1). 머리카락으로 바닥을 칠하는 행위는 1973년 워즈워스 아테네움에서 행해졌던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의 <하트퍼드 청소: 닦기/자국/유지 관리>를 연상시킨다(도 2). 안토니는 “재닌, 나가 놀아라. 가서 주방 바닥이나 닦아”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6) 바닥을 닦은 물기가 마르는 동안 주방은 그의 공간이었고, 그는 이를 미술관이라는 장소에서 구현하기로 결심한다. 안토니는 유켈리스의 퍼포먼스를 이어받듯,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갤러리 바닥을 걸레질(mopping)한다. 그의 머리카락은 예술가의 붓이자 노동자의 걸레이며, 그의 행위는 예술가의 몸짓이자 노동자의 노동행위로 작동한다. 그가 바닥에 납작 업드려 바닥을 닦을수록 바닥은 깨끗해지는 대신 더럽혀졌고, 퍼포먼스를 보러 온 관객들은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가장 비천한 것을 가장 낮은 자세로 행함으로써 공간을 장악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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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Mierle Laderman Ukeles, Maintenance Art Tasks Perfomances at the Wasworth Atheneum,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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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안토니가 어머니가 사용하던 가정용 헤어 염색제 ‘Loving Care’를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 노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정한 보살핌(Loving Care)’의 압박을 드러낸다. 안토니는 “이 작품은 보는 사람이 범죄 현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밝혀낼 수 있는 모든 단서를 남겨두었다”고 말한다.7) 그는 의도적으로 상품의 기호를 가져옴으로써 노동, 예술, 사회의 상호 관계를 드러낸다.
안토니의 작업에서 노동은 보다 일상적인 행위로써 이뤄지기도 한다. 가령 <갉기 gnaw>(1992)는 600파운드의 정육면체 초콜릿과 동일한 크기의 라드를 이로 갉아 만든 조각 작품이다(도 3). <갉기>는 명백하게 남성중심적 미술사에 대한 분노였다. 갉고 씹는 행위의 반복으로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입방체의 명료한 직선은 갉아 사라지고, 잇자국이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신체를 설명하는 것보다 물체에 남은 잔여물로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갉아내는 행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씹고 뱉어낸 것들이다.8) 단지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발로써 작업을 진행했다면, 입방체에서 제거된 초콜릿과 라드는 폐기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갉아낸 물질들을 먹지 않고 뱉어냈고, 이를 45개의 하트모양의 초콜릿 박스와 400개의 립스틱으로 재제작한다. 그렇게 라드는 립스틱이 되고, 초콜릿은 하트박스가 되어 진열장에 상품처럼 전시된다(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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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installation view of Gna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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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는 “600파운드의 초콜릿을 씹어 사람들을 유혹할 수 있다면 라드를 씹어서 사람들을 똑같이 혐오스럽게 만들 것”이라 설명한다.9) 침과 섞인 잔여물은 성스러운 성질과 비천한 성질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서, 매혹과 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갉고 씹는 행위는 작가의 노동 행위이자 창작 행위가 되었으며, 사회 내 억압되어 있는 타자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동한다. 관람객은 초콜릿 박스와 립스틱이라는 소비문화의 상품 형태에 매혹되면서도, 작가의 침과 섞인 잔여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러한 이중적 정서는 여성의 몸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 작품-상품을 오가는 잔여물은 중심과 주변을 뒤바꾸는 엑스폼이며, 일련의 과정들은 안토니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폐기물에 씌워놓은 베일을 걷어버리고 내재된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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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탈중심화 운동으로 일깨워지는 불안정성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1994년부터 2000년 사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잠 Slumber> 퍼포먼스를 진행하던 안토니는 2002년에 돌연 자신의 고향인 바하마로 돌아가 <터치 Touch>를 제작했다(도 5). 화면 속의 수평선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수많은 상상력이 배회하던 공간이었으며, 언제나 멀어지고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의 장소였다. 그는 문득 이 장소를 걷고싶다는 충동에 휩싸였고, 외줄타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남겼다. 그는 작업을 진행할수록 "내가 더 균형잡힌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균형이 깨진 것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0)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서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종말은 역사에 대한 망각을 촉구하며 일말의 대안조차 없는 황무지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닌 안토니의 작업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일련의 충돌과 우연”이며, 예술적 실천은 그 안의 공허와 불안정성에 방점을 찍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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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콜라 부리오, 『엑스폼』, 정은영, 김일지 역, (현실문화연구, 2022), 11.
2) 앞의 책, 8-9.
3) 그리고 이 시작과 끝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이자 공허(a void)이다.
4) 이러한 탈중심화 전략에서 바타유는 사드를 인용하며 이종학(heterology)을 주창하고, 이브 알랭 부아와 크라우스는 ‘배설물 철학자’라고 불리던 바타유를 끌어와 비정형 개념을 재정립했으며, 부리오는 ‘미치광이 사상가’ 알튀세르와 바타유를 경유하여 엑스폼을 말한다. 전자가 후자의 어떤 사유를 토대로 하는지와 별개로, 미학과 철학 주변부에 머무르던 철학적 사유와 광기가 혼재하는 유물론자들을 이론의 근거로 삼아 탈중심화 운동을 이야기한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다.
5) 니콜라 부리오, 『엑스폼』, 56.
6) “Jannine, go out and play. Just mop the kitchen floor.” CAA와의 인터뷰, CAA, 2013년 8월, https://www.youtube.com/watch?v=MUoAO9C2yxQ, (2025년 3월 13일 검색).
7) Art21과의 인터뷰, Art21, 2024년 10월, https://www.youtube.com/watch?v=_xkaQAE6BVg&t=785s, (2025년 3월 11일 검색).
8) CAA와의 인터뷰, 2013년 8월, (2025년 3월 13일 검색).
9) 앞의 글, (2025년 3월 13일 검색).
10) Art21과의 인터뷰, (2025년 3월 11일 검색).
11) 니콜라 부리오, 『엑스폼』,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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