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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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오십 번째 뉴스레터] 이야기를 오독하기: 떨어지는 모든 이들에 고함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오독하기: 떨어지는 모든 이들에 고함]
오십 번째 레터는 타셈 싱(Tarsem Singh) 감독의 영화 <더 폴 The Fall>(2006)에 나타난 추락과 상실의 이미지를 다룬다.
상실한 자들은 추락하지만, 그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어디를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가?
*영화 <더 폴 The Fall>(2006)의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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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오독하기: 떨어지는 모든 이에 고함
한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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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로이가 영화에서 다른 배우들은 하지 못하는 연기를 한다고 했다. 떨어지고, 맞고, 어딘가를 기어오르는 것 같이….
나는 엄마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그러다가 로이를 본 것이다!
나는 로이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 장면을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봤다. 그리고 그건 로이가 맞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모든 영화의 액션을 좋아하게 됐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떨어지고, 맞고, 기어오르는 게 로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단에서 굴렀다가, 어딘가를 올랐다가 내려갔다가, 기차에서 떨어졌다가, 달리는 차를 붙잡았다가, 자전거에서 뛰어내리거나 교도소에서 뛰어내리고는 했다.
…
그리고, 와우!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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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셈 싱(Tarsem Singh) 감독의 <더 폴>은 오해와 속임수로 진전된다. 오렌지를 따다가 떨어져 팔을 다친 ‘알렉산드리아’는 병원에서 영화 스턴트 촬영 중 다리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로이’를 우연히 만난다. 둘은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아픈 곳을 도닥여 주는 사이라기보다는 각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 먹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된다. 무료한 병원 생활에서 알렉산드리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로이가 필요했고, 로이는 사랑과 다리를 잃은 자신에게 모르핀을 훔쳐다 줄 알렉산드리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오해는 풀리지 않고, 서로에게 정확히 이해되지도 않는다. 빗겨나가는 목적 사이에서 오직 허구의 이야기만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이야기가 두 사람의 필요를 묶어낸 것이기 때문일 테다. 이들은 당장의 현실을 견뎌야 했고, 그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엋피 모든 요소가 가짜인 이 세계에서 오해는 중요치 않다.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가짜 세계를 함께 만들어 나가며 친구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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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알렉산드리아는 이 가짜 세계에 매혹되는가? 비단 아름다운 풍경과 극도로 선명하게 구현된 색채, 과장된 인물 설정이 세계를 탐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가짜 세계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진짜 세계’에서 추락하기(fall) 전에 갖고 있던 것들이 있다. 아이가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나무 상자에 켜켜이 쌓인 아빠 사진과 코끼리 펜던트 따위의 것들 말이다. 아이의 소중한 기억들은 가짜 세계에서 구현되지만, ‘검은 무법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진짜 아빠도, 진짜 로이도 아니듯 아이는 언젠가 그 허구성을 깨달아야만 한다.
두 세계를 잇는 추락의 이미지는 알렉산드리아와 로이의 상실을 대변하면서 나타난다. 사랑을 잃고 망루에서 떨어지는 여인과 다윈은 연인을 잃은 로이와 아버지를 잃은 알렉산드리아의 현실과 겹쳐지고, 쫓아오는 적을 막고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줄을 끊고 추락하는 인도인은 괴로워하는 친구 로이에게 모르핀을 훔쳐다 주려다가 선반에서 떨어지는 알렉산드리아의 모습과 닮았다. 떨어지는 자들에게 매번 동반되는 상실은 잔인한 현실 세계를 인식하게 만드는 한편, 추락 이후 죽음을 맞는 가짜 세계의 인물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세계의 추락한 자들은 삶을 이어 나가야만 한다. 삶은 상실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딛고 슬프지만 유쾌하게도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는 비록 서로의 성이나 집 주소 따위는 모를지언정 서로의 존재로부터 개인의 트라우마를 건너뛸 수 있게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두 번의 추락으로 가족과 집을 상실하고 고통스러운 뇌수술을 견뎌야 했지만, 스턴트 맨으로 활약하는 로이의 모습을 영화에서 발견함으로써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이것이 진짜 로이일지는 사실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로이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에서, 그 추락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알렉산드리아의 고맙다는 말은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그녀가 로이의 존재로부터 트라우마를 극복하듯이, 관객 역시 그들의 여정으로부터 어딘가 위로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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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가짜 세계는 진짜 세계의 편린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뿐 아니라, 오디어스에게 착취당했던 흑인 노예 ‘오타 뱅가’는 1900년대 콩고에서 미국으로 붙잡혀와 동물원에 전시된 피그미족 청년과 동일한 이름이다.2) ‘찰스 다윈’은 익히 아는 바대로 진화론을 주장한 생물학자이고, 다윈의 가방 안에 항상 함께하는 원숭이 ‘월리스’는 진화론을 지지한 다윈의 동료 연구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로 보이기도 한다.3) 공인된 바는 없지만 폭탄 전문가 ‘루이지’는 행동주의자 아나키스트 ‘루이지 갈레아니’의 면모가 엿보인다.4) 시대와 불일치하는 각자의 불운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이들은 서로를 해치는 대신, 나아간다. 섬 밖으로, 오디어스 총독 앞으로, 복수를 위해 만났으나 종국에는 서로를 살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각자가 감당할 불행과 서로의 불행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각자 더 불행해지기보다는 순간을 함께 이겨내길 택한다.
영화란 허구의 연속이며, 우리를 속여먹고 가끔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 <더 폴>은 그럴듯한 거짓과 허무맹랑한 거짓을 극단적으로 설정해 구현해냄으로써, 그리고 그 거짓 세계에 현실의 조각을 조금씩 흩뿌려 놓음으로써 수많은 해석과 오해를 낳게 구조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읽기는 과한” 독해법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오독에서 또 다른 오해가 생겨나고, 그 오독의 타래에서 다시 허구의 이야기가 생산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를 친구로 만든 것처럼, 우리를 묶어내는 이야기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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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y mother told me that he plays in pictures and he does things that the other actors cannot do like falling and hitting and when they climb on something, when they… I didn’t believe my mother, but then I saw him.
I watch the picture again and again and again and to make sure that was Roy, and was Roy!
And then, I like the action from all the pictures because I know that Roy is making all the falling and hitting and climbing and he was on the stairs and he was going up and down and up and down.
And he was falling from the train and he was taking the car… And he was falling from the bicycle and from a big house. https://scrapsfromtheloft.com/movies/the-fall-tarsem-singh-transcript/#google_vignette (2025년 2월 15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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