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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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마흔여덟 번째 뉴스레터] 내일을 긁어내는 질문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내일을 긁어내는 질문]
마흔여덟 번째 레터는 우민정의 작업을 다룬다. 우민정은 흙을 긁어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실패와 시도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작업은 인간의 고투와 열망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며, 삶의 무의미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불 속에서 춤추는 군상과 긁힌 자국들은 단순한 형식적 장치가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내일을 향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하는 예술적 표지판으로 기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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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실패를 작업의 주제로 삼게 된 것은 세상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로 있지 않고 번번이 나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는 데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폭력이 사랑이 되고, 자유가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되는 세상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업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한 작가의 일생을 지배하는 태고가 되는 동안 어째서 나는 그 반대의 가능성에 대해, 다른 대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을까. 실망과 분노를 그런 작업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객의 공감에 만족하며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어리석고 부도덕한 어떤 집단에 의지해 작업의 정당성을 찾았던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다. ‘비판적인’ 나의 작업은 과연 실천으로서 의미가 있는가. 세상을 변화시킬 의지와 힘이 그 안에 있는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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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비평은 안규철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긴 발췌문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그의 의문이 상당히 시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물음을 곱씹어 보며 스스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혼란스러운 나날이 지속되는 요즘, ‘속보’ 헤드라인을 단 기사들로 점철된 인터넷 뉴스창, 그리고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과 행위에 실망하고 충격을 받은 것일까. 자꾸만 가볍고 얇은 표피적인 생각으로 회피하고 싶어진다. 냉소는 ‘세련되게 포기하는 것’으로, 폭력은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태도’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섬세해지기 힘든 시대, 또는 섬세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터무니없이 버겁게 느껴지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냉소하고 싶다는 마음을 누르고 알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실천력’을 담지한 글을, 그것도 현실과 유리되었다는 의심을 언제나 받기 마련인 예술에 관한 비평을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회피와 무관심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으로 깊은 악영향을 미친다. 최근 한국 사회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비롯한 거대한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대립을 경험 중에 있다. 거리는 응원봉으로 가득 찼고, 광장에서는 정의와 진실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은 언제나 명확하고 합일된 결론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여러 개의 ‘진실’과 ‘정의’는 마치 수많은 층위와 막 사이에 숨어 있는 듯하다. 우민정의 작업은 이와 같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내일’을 향한 끊임없는 저항과 실패, 그리고 그 반복적인 과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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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우민정, 〈35 Stars〉, 2022, 마, 황토 위에 채색, 53 x 45cm. ⓒ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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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흙으로 작업하는 우민정은 ‘긁어내는 행위’를 사용하여 인간의 끊임없는 몸부림과 고투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도 1). 흙 위에 층을 쌓고 이를 긁어내는 방식을 통해 기억의 복잡성과 흔적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때 긁어내기는 단순히 물질을 가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과 경험의 층위를 드러내는 일종의 서사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를 거치며 흙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의 흔적을 담아내는 유기체로서 작품의 핵심이 된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 흙으로 형성된 화면 위의 균열, 패턴, 그리고 긁힌 자국들은 그저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반복적이고 집요한 시도를 상징한다.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지만 ‘내일’을 만들기 위한 행동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작품 속 긁힌 자국들이 단순히 형식적 패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축적 의미를 지닌 모티프로 이어짐으로써 작품에 담긴 서사와 작가의 의도에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도 주목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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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우민정, <벼락 끝>, 2024, 마, 황토에 채색, 140 x 255cm. ⓒ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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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우민정, <벼락 끝>, 2024, 마, 황토에 채색, 140 x 255cm, 세부 사진. ⓒ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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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민정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상들은 단순히 조형적 장식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벌, 뱀, 그리고 코끼리 등 특정한 상징을 통해 인간의 바람과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벌은 매일 부산히 무엇인가 찾아다니고 기도하는 사람을, 뱀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어디에서나 고개를 돌리면 찾아볼 수 있는 함정을, 마지막으로 코끼리는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자 이상을 나타낸다.2)
또한 그의 작업에서 군상들은 춤을 추고, 불속에서 움직인다(도 2, 3). 이들은 단순히 무의미한 반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력에 얽매인 인간의 몸짓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는 시도와 그 과정에서의 실패를 동시에 보여준다. 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도상과 군상들은 상승과 하강의 리듬을 통해 인간의 생존 본능과 초월적 열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불속에서 춤추는 인물들은 인간의 열망이 소멸과 재생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재탄생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그 결과, 그의 작업에서 불은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는 전환의 매개체로 자리 잡는다.
4.
작품의 가치는 바깥에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작품 자체는 결국 관객을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민정의 작품은 현실이라는 바깥으로 향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질문과 같다. 이 질문은 단순히 현실 사회의 표면적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함 속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포함한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 (1942)에서 "삶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우민정의 작품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 세계 속에서, 끝없이 흔적을 남기고, 실패를 반복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냉소와 회피로 맞서는 대신, 실패와 고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은 하나의 질문이자 가능성의 표지판으로 기능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무게와 함께 춤추게 만든다. 그렇다면 글의 서론에 남겨 놓았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굳이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대답해 보자면, 작가와 함께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기꺼이 춤을 추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을 만들어가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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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규철, 『안규철의 질문들』 (워크룸프레스, 2024),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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