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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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마흔여섯 번째 뉴스레터] 재생하는 히포므네시스(hypomnesis), 차재민의 기억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재생하는 히포므네시스(hypomnesis), 차재민의 기억술]
마흔여섯 번째 레터는 차재민(b.1986)의 영상 작업을 다룬다. 차재민의 작업은 활자화된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누락된 틈과 사각지대를 포착해 이를 영상언어로 대리 보충하는 아카이브 작업(archival work)의 측면을 가진다. 그러나 그의 기억술은 단순히 시퀀스를 축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이들이 발화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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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하는 히포므네시스(hypomnesis),
차재민의 기억술
이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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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아카이브 열병 Archive Fever』(1995)은 ‘아카이브(archive)’의 그리스어 어원 아르케(arkhē)에 관한 흥미로운 이의성(異義性)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르케는 ‘시작(commencement)’과 ‘명령(commandment)’의 뜻을 동시에 내포한다 – 다시 말해, 아카이브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물리적 장소인 동시에 권위와 사회적 질서가 작동하는 법칙적(nomological) 공간이기도 하다.1) 그러나 아카이브에 내재된 폭력성은 선별-분류-축적의 순차적 질서를 견인하는 한편 자멸의 원리로 작동한다. 데리다가 이미 언어의 문제에서 제기한 바 있는 문자언어의 폭력성 – 자연발생적인 기억(mnémè)을 대리 보충하는 기억술(hypomnesis)의 수단인 문자가 오히려 망각을 의미하는 역설 – 이 ‘책의 죽음’을 초래한 것처럼, 아카이브는 죽음 혹은 파괴적 충동(destruction drive)으로 현전을 기억하기 위해 그 근원을 말소해 버린다.2)
외부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침투가 데리다의 해체를 가능하게 했듯, 그 화살의 방향을 다시 역으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충동, 즉 타나토스(thanatos)는 곧 생(生)의 충동인 에로스(eros)와 연결된다. 차재민(b.1986)에게 영상은 데리다의 아카이브와 동일하게 작동한다. 그의 무빙 이미지는 현장 조사와 인터뷰, 책을 기반으로 개인의 삶에 스민 사회의 면면을 포착하는 시각언어다. 〈독학자 Audiodidact〉(2014)는 군 의문사 유가족이자 재야 법의학자인 허영춘 선생이 독학한 법의학 자료를 확대해 보여주면서 그와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의 낭독을 들려준다(도 1).3) 이들의 낭독은 권력이 검열하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한 세월 동안 마주했던 사건들, 삶, 그리고 법의학적 증거에 관해 나눴던 대화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이다. 한편 〈네임리스 신드롬 Nameless Syndrome〉(2022)은 정확한 진단명이 없지만 통증을 느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에세이 필름으로, 필름의 스크립트는 이들과 진행한 인터뷰와 관련 서적을 적극적으로 인용해 재구성되었다(도 2).4) 발화된 언어를 기록하고, 기존의 텍스트로부터 직조된 문장들은 살아있는 기억을 대리 보충하는 히포-므네시스이지만, 현전하는 기억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되려 이는 공권력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된 진실, 그리고 남성의 신체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의 레토릭에서 진단 미확정(undiagnosed)되거나 단순한 히스테리로 치부되는 여성의 통증에 서사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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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차재민, 〈독학자 Autodidact〉, 2014, 단채널 비디오 설치, 9분, 컬러/사운드, 스틸 이미지. ⓒ차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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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차재민, 〈네임리스 신드롬 패치 버전 Nameless Syndrome Patch Version〉, 2022, 단채널 비디오 설치, 24분, 컬러/사운드, 스틸 이미지. ⓒ차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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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공식 트레일러로 제작된 〈병원 Hospital〉(2016)에서 작가는 생과 사가 공존하는 공간인 병원에서 환자보다는 그들을 돌보는 간병인에 초점을 맞춘다. 불이 꺼지고 필요한 소수의 인력만 남는 대학병원의 밤 풍경을 재현한 영상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따라가는 이들은 뭉친 목 근육을 풀며 걷기 운동을 하는 간병인들이다(도 3). 환자는 그가 입원한 순간부터 퇴원 혹은 사망하는 순간까지 신상정보와 병명, 상태, 진료 기록 등 모든 정보가 문서화되지만, 늘 이들과 동행하는 간병인들의 존재는 어둠 속에 지워진 그림자처럼 인식된다. 트레일러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는 휠체어를 미는 간병인의 뒷모습을 따라가다 이내 화면을 전환해 턱을 괸 채 휴대폰을 보고 있는 환자에게 다가간다. 구급차의 경광등처럼 점멸하는 붉은 조명은 환자의 왼팔에 새겨진 타투부터 – 이 또한 환자에 관한 정보로 차트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 그의 무표정한 얼굴까지 모두 비추지만, 휠체어를 미는 간병인의 모습은 어둠 속에 끝끝내 가려져 있다. 이는 오히려 관객이 간병인의 모습과 표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 영상을 기록의 매체로 활용하는 차재민의 기억술은 이처럼 단편적인 기록의 대리 보충이 아닌 개인의 심연을 발굴하는 재생 수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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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차재민, 〈병원 Hospital〉, 2016,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트레일러1, 1분 30초, 컬러/사운드,
스틸 이미지. ⓒ차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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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광합성하는 죽음 Photosynthesizing Dead in Warehouse〉(2024) 역시 죽음에 관해 다룬다(도 4). 영상은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빈집에 유리로 만든 진열장을 들이며 시작된다. 진열장 내부에 갖은 종류의 과일을 배치하고 유리를 봉하는 행위는 유리장 내부의 사물들에게 죽음을 고하는 제의(祭儀)이자 이들이 부패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여름 장마가 찾아오고, 윤기 나던 과실의 표면은 오그라들며 곰팡이와 벌레로 뒤덮인다. 과일들이 분해되는 과정에 덧입혀지는 것은 작품 속 화자 시무라 히카루가 박물관 학예사 이시이와 구상도(九相圖)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들을 낭독하는 목소리다. 일본 불교회화에서 시신이 부패하는 아홉 단계를 그린 구상도는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 수행을 시각화한 도상으로, 과일이 썩어가는 장면과 중첩되는 그의 내레이션은 재생(play)하는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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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차재민, 〈광합성하는 죽음 Photosynthesizing Dead in Warehouse〉, 2024, 단채널 비디오, 30분,
컬러/사운드, 스틸 이미지. ⓒ차재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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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타나토스와 에로스는 공존한다. 다시 아카이브의 그리스어 어원으로 돌아가서, 아카이브는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생의 충동과 아카이브에 내재한 기억의 대리 보충성(hypomnēma)을 파괴하려는 죽음 충동이 상충하는 공간이다. 차재민의 작업은 활자화된 기록에서 배제되거나 누락된 틈과 사각지대를 포착해 이를 영상언어로 대리 보충하는 아카이브 작업(archival work)의 측면을 가진다. 그러나 그의 기억술은 단순히 시퀀스를 축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이들이 발화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향하는 작가의 카메라는 다음 인용문에서 ‘너’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나’의 역할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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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적인 차원의 심문이 맥락적 진술을 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임의적인 판단으로 네가 발레리씨와 함께 마주했던 모든 것을 구성해서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보기로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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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리다는 이처럼 상호충돌하는 동인(動因)들을 하나로 결합하려는 프로이트적 욕망에서 ‘아카이브 열병(le mal d’archive)’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Jacques Derrida, Archive Fever: A Freudian Impression, translated by Eric Prenowitz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1-5.
2)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2004), 19-74; Derrida, 앞의 책, 10.
4) 차재민이 적극적으로 인용한 텍스트는 시인 앤 보이어(Anne Boyer, 1973-)의 『언다잉 The Undying: A Meditation on Modern Illness』(2019)과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Carlo Ginzburg, 1939-)의 에세이 「징후들: 실마리 찾기의 뿌리」이다.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2022》 참여작가 인터뷰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PXFzd67I1E (2024년 11월 26일 검색).
5) 차학성, 「테레사와 함께한 순간들」, 유경한 역, 『차학경 예술론』, 김종국 외 엮음 (북코리아, 2013),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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