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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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마흔 네 번째 뉴스레터] 꿈에서 본 곳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이번 글은 은희경 작가의 개인전 《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Nowhere yet Everywhere》(2024)을 조명한다. 은희경은 이번 전시에서 도시 사이를 유랑해온 관찰자로서, 그 도시 공간 속에서 살아왔던 본인의 경험을 녹여낸 작품을 선보였다. 최은총은 물처럼 흐르고 조각으로 나눠진 공간 감각에 관한 서술을 덧붙인다.
[꿈에서 본 곳]
앞으로 에포케레테 뉴스레터는 토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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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6년간 은희경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네덜란드의 아인트호벤, 한국의 김해, 그리고 서울 사이를 유영하는 도시의 관찰자였다. 그는 도시를 옮겨 다닐 때 거주했던 집에 대한 기억, 김해의 코인 세탁실에서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던 일화, 아인트호벤에서 마주쳤던 카니발의 순간, 서울의 작업실을 오가며 보았던 팝업 스토어들을 되새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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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Nowhere yet Everywhere》(2024) 전시 전경.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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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간 이동에서 비롯한 시간과 공간의 경험은 ‘모호한' 것으로 남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2007)에서 세계화 이후 “공간은 시간을 닮아가고 있다”고 언급한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에서 공간과 시간이 점점 더 유동적이고 불확실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강조하며, 두 개념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람들이 이동할 때 물리적인 거리보다는 이동할 때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고정된 것으로 사유되던 공간은 이동 수단의 종류와 속도에 따라, 그리고 이동 빈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체감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도시는 도시화나 재개발로, 심지어 팝업 스토어의 유행으로 순식간에 건물을 세우거나 철거함으로써 공간의 모호함을 가중한다. 이에 작가는 기억 속 궤적과 흔적 위에서 액화된 동시대 시공간을 포착하려는 시도로서, 본인이 살아온 환경을 투영한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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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파편 장소 Place Fragment〉, 2024, 파라핀 왁스, 가변 크기. 사진: 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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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파편 장소 Place Fragment〉, 2024, 파라핀 왁스, 가변 크기.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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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 장소 Place Fragment>(2024)와 <Carriers>(2024)는 이동하는 삶 가운데 마주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중 <파편 장소>는 네덜란드와 한국에서 수집한 손잡이를 캐스팅하고 파라핀으로 채운 작품이다.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접촉하는 손잡이는 신체의 이동에 대한 감각을 남기는 사물이다. 그러나 파라핀은 열에 취약하기에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사물의 용도를 무용하게 하는 아이러니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애수를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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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Carriers〉, 2024, 혼합재료(스테인리스 스틸, 돌, 석고, 콘크리트, 아크릴 페인팅, 1m x 1m x 1,5m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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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iers〉는 바닥에 바퀴가 있는 여행 가방 모양으로, 앞면에는 실제 크기의 세탁기 모양으로, 뒷면은 가짜 돌로 이뤄져 있다. 김해의 레지던시 시절 편의점 안 코인 세탁실에서 마주친 피곤한 낯빛의 여행자들과 동질감을 공유한 일화로부터 제작되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공간에 대한 서사"를 담는다. 여행 가방, 세탁기, 가짜 돌이라는 묘한 조합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동의 기억 속에서 강하게 연결된 사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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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은 초현실주의 기법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 두드러진다. 데페이즈망은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이질적인 사물 간의 결합, 물체의 변형과 왜곡, 그리고 공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뜻한다. 녹아내리는 손잡이나 캐리어 모양의 세탁기처럼 사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외연을 익숙하게 표현하지만, 본래 기능이나 논리를 비틀어 형언하기 어려운 멜랑콜리아 (Melancholia)를 만들어낸다. 이는 작가가 지금 이곳에 있지만, 여전히 있어야 할 곳을 떠나왔다는 불편함과 이질적인 존재로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데페이즈망의 어원이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법은 작가가 이동하는 삶에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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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파도치는 집 Waving Home>, 2022, 투명한 비닐 위에 아크릴 페인팅, 가변 설치(페인팅 크기 540cm x 190cm),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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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작가는 몇 년간의 유목적 생활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단단하고 안정적인 기반이라 믿었던 공간을 이제는 ‘흐르는 물결이나 바람 같은 존재'로 느낀다고 말한다. 여러 도시에서 거주와 이주를 반복하면서, 심리적으로 '집'이라는 개념에 대해 획득과 상실을 거듭한 결과, 당연하게 여겼던 공간에 대한 개념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일상적인 질서에 벌어진 미묘한 균열은 익숙한 표면 아래 숨겨진 본질적인 것에 주목하게 했다. 이는 곧 개인의 공간이라고 믿었던 '집'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집은 개인의 공간이자 보금자리, 쉼터로 여겨지지만, 사실 집의 문, 창문, 벽지, 손잡이 등은 집을 거쳐 간 수많은 개인이 사용한 공유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집의 형태에서 개인과 집단이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현대 주거 형태의 초상'을 그려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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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파도치는 집 Waving Home>, 2022, 디테일 컷. 사진: 강종원 |
은희경, <파도치는 집 Waving Home>, 2022, 디테일 컷. 사진: 은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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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탐구의 일환인 <파도치는 집 Waving Home>(2022)은 작가가 거주하던 아인트호벤 집의 벽면을 1:1 크기로 투명한 비닐 위에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본인이 사용하던 가구와 물건, 창문 밖 풍경 등 사적이고 일상적인 집 내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감춰져 온 개인의 일상은 비닐 위에 그려져 투명하고 가벼운 것으로 변한다. 더 나아가, 관객은 전시장에서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진 작품 앞에 섰을 때, 집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끼게 된다. 이로써 개인의 내밀한 기억은 투명하고 유동적인 성질로 집단의 서사에 편입된다. 이는 작가가 느낀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 개념에 대한 표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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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바람부는 집 Windy House〉, 2023, 혼합 재료(콘크리트 위에 디지털 프린트, 도자, 돌, 소리), 2m x 2m x 2m 내외 가변 설치,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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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치는 집>이 개인과 집의 관계, 즉 동시대 주거에 대한 통찰이었다면, <바람부는 집 Windy House>(2023)은 주거 공간을 둘러싼 환경에 관한 작품이다. 작가는 아인트호벤에 머물던 시절, 주변에서 뼈대만 남은 건물을 마주친 이후, 그곳을 여러 차례 찾아가고 사진을 찍거나 구글 로드뷰로 옛 건물의 모습을 추적한다. 폐허가 된 눈앞의 건물과 옛 건물의 데이터를 비교하며, 공간도 저마다의 생애를 가진다는 생각에 이른 작가는 공간의 죽음을 추모하기로 결심한다. 작가는 인체 크기의 다리 도자 조각을 만들어 건물 앞에 놓는데,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콘크리트 위에 특수 프린팅한다. 철거된 건물 앞에 불현듯 등장한 신체 일부는 생애를 함께 했을 누군가의 발자국을 불러낸 것이다. 그 모습이 새겨진 콘크리트판은 도시화로 인해 세워지고 사라진 공간을 위한 상징적인 추모비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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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바람부는 집 Windy House> 작품을 위한 리서치. 어느날 빈 공터가 된 건물을 보고 로드뷰를 찾아 옛 건물의 모습을 확인한 작가. 사진: 최은총 |
작가의 〈바람부는 집 Windy House> 작품을 위한 리서치. 로드뷰를 동영상으로 수집해둔다. 제공: 은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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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집>은 다리 도자 조각, 사진이 프린트된 콘크리트판, 건물을 촬영한 동영상에서 추출한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이질적인 사물 간의 결합과, 맥락의 전치란 데페이즈망 기법을 변주하여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죽음을 맞이한 공간’을 표현한다. 파편화된 신체, 질감이 두드러진 판에 새겨진 흐릿한 환영 같은 사진, 그리고 도로에서 들릴 법한 일상적인 소음이라는 묘한 조합은 작품을 의미심장한 사건 이후에 남겨진 증거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바람부는 집>에 대한 작가의 시 중 '그곳에 삶이 있었겠구나'라는 구절은 '삶'을 지닌 주체가 '공간'임을 슬며시 드러낸다. 이처럼 작가는 개인의 기억 속에 담긴 공간의 모호함과 유동성을 초현실주의적인 외상으로, 즉 멜랑콜리아를 불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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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준 순간 중 하나. 아인트호벤 거주 당시 마주친 카니발 장면들. 사진: 은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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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작가는 자본에 의한 도시 공간의 순환 논리에 주목하며, 동시대 공간이 해체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팝업 스토어 '철거 현장에서 사람들이 핑크색 벽을 떼어내 건물 밖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도시의 모습을 바꾸고 한순간 사라진 타국에서의 카니발이 떠올랐다'는 그의 말처럼, 해체의 과정은 물질성이 감싸고 있던 환상을 벗겨내는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이 매우 빠르고 자연스러워져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마치 낮에 꾸는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통찰은 도시 공간의 순환 과정에서 남겨진, 건물의 기록물을 따라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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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백일몽 Daydream>(2024)을 위한 리서치. 철거 이전, 혹은 철거의 과정 중을 의 건물을 찾아가 3D 스캔하여 보관한다. 제공: 은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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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서울 지역의 철거된 건물을 연구하며 파편을 수집하고, 수많은 사진, 동영상, 3D 스캔물, 그리고 구글맵 링크 등을 모은다. 사진, 동영상, 3D 스캔물 등의 데이터화된 기록 속에서 공간은 점점 더 물결이나 바람처럼 '흐르는 것'이 되지만, 철거 현장에서 가져온 파편은 지극히 물리적이다. 이러한 탐구의 일환으로 제작한 <백일몽 Daydream>(2024)은 수집한 파편을 쌓아 투명한 큐브를 올리고, 큐브 위에 철거 이전, 혹은 철거의 과정 중의 건물 이미지를 재조합해 그린 작품이다. 10x10cm의 큐브는 공간을 '평방미터(㎡)'나 '비트(bit)'로 수치화하는 현상을 비유한다. 작가는 이미 해체된 건물을 ‘쌓고’, 액화된 이미지를 ‘재소환’하며, 자본주의 내에서 공간이 지닌 해체와 생성의 맥락을 전유한다. 익숙한 해체와 생성의 형태를 벗어난 <백일몽>은 자본 논리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공간의 죽음과 탄생 과정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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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백일몽 Daydream>〉, 2024. 혼합 재료(건물 조각, 아크릴 큐브, 아크릴 페인팅), 가변 설치, 사진: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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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작가에게 공간은 내밀하면서도 개방적이고,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물리적이면서도 가상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지나온 공간들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지만,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로 인해 그 존재는 점차 희미해지고 투명해진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사유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공간의 개념으로 귀결된다. 작가는 점점 더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한, 동시대의 액화된 공간에 대한 낯섦이 아닐까. 결국 그에게 공간, 집, 도시는 작가가 지은 전시 제목처럼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곳이다. 마치 그가 감지한 공간처럼, 전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분명히 존재하다가 이내 사라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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