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
|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마흔 세 번째 뉴스레터] 기억하기는 우리의 미래시제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이번 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와 CDA 파빌리온을 둘러싼 논란들을 짚어본다.
거대한 사회의 불의를 마주할 때, 공동체와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하기는 우리의 미래시제다!]
글 정리가 지체되어 예정보다 늦어진 발행을 기다리셨을 구독자 분들께 죄송함을 전합니다.
|
|
|
CDA 홀론 파빌리온 규탄 현수막. 사진: 직접 촬영. |
|
|
CDA 홀론 파빌리온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제 15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포스터가 마치 이 길이 맞는 방향임을 안내하는 듯 걸려 있었지만, 오히려 그 주변으로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전시를 규탄하는 여러 개의 현수막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집단 학살 위에 세워진 미래에서 예술과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묘하게도 CDA 홀론 파빌리온의 전시 의제인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과 쌍을 이루면서, 거대한 사회의 불의를 마주하며 공동체와 예술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상기시킨다. 무엇보다 이 질문은 한국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가 서린 도시, 광주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예술 행사인 광주비엔날레에서 더욱 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재단에 의해 선임된 예술 감독의 기획으로 꾸려지는 본전시와는 별개로, 광주비엔날레 재단은 “국내외 미술 및 문화 기관의 네트워크 확장”을 목적으로 2018년부터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1) 그에 따라 2018년에는 팔레 드 도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헬싱키 국제 아티스트 프로그램, 필리핀 컨템포러리 아트 네트워크가, 2021년에는 스위스 쿤스트하우스 파스콰르트와 대만 동시대문화실험장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광주의 문화예술 기관에서 전시를 선보였다. 문화 기관들 사이의 교류를 표방했던 이 프로젝트에 국가라는 단위가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9개의 국가”가 참여했던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부터이다.2) 베니스비엔날레의 국가관에 비유하며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이 “국가 간 문화교류의 장이 될 것”이라 설명하는 고위 공무원 출신 재단 대표이사의 발언에서 이 프로젝트의 향방은 자명했다.3) 스위스, 캐나다, 폴란드,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 국가 이름으로 호명된 파빌리온 혹은 그것을 주최하는 문화예술 기관은 국가를 대표하며, 전시는 대사관으로서 문화 외교의 장으로 기능할 것이었다.
|
|
|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CDA 홀론 파빌리온 포스터, 2024.9.7.-12.1.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 사진: 직접 촬영. |
|
|
2024년 제15회 비엔날레 파빌리온이 1년만에 9개에서 31개로 규모가 폭증했을 때, 그 프로젝트가 국가 차원에서 전 세계 문화 패권의 구심점으로서의 광주를 상상하고 있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나라의 이름을 하고 있지 않은 곳은 두 군데 뿐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프로젝트에서 명시적으로 각 파빌리온을 대표하는 것은 국가 뿐만 아니라 도시와 기관이라는 “다양한 창의적 예술주체”이다.4) 그 중 하나인 CDA 홀론 파빌리온은 이스라엘의 도시 홀론(Holon)에 위치한 디지털 아트 센터인 CDA 홀론(The Centre for Digital Art Holon)의 주최로 기획되었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 파빌리온이 2023년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으로 참여했을 당시, 다니엘 하워드 재단(The Daniel Howard Foundation), 사단법인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KIFA), 아티스(Artis)와 함께 전시를 주최 및 주관했던 기관이다. 2024년 다니엘 하워드 재단과 아티스는 CDA 홀론 파빌리온에도 전시를 후원한다. 이 의심스러운 연속성 속에서 2024년 CDA 홀론 파빌리온은 어설픈 눈가림으로 2023년 이스라엘 파빌리온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재단이 2024년 현재 팔레스타인과 전쟁 중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서 논란을 우려한 조치인 듯 보인다. 이름을 바꾸어 국가적 대표성을 거부하는 것이 정치와 거리를 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에.
|
|
|
비판의 목소리는 존재한다. 하나의 예로,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팔레스타인문화연대(이하 팔문연)은CDA 홀론 파빌리온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모를 규탄하며, 이 전시를 용인한 광주비엔날레에 적절한 조치를 강력히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5) 그러나 재단 측에서는 어떠한 공식적 입장 없이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CDA홀론 파빌리온의 참여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에 대한 광주비엔날레 재단의 몰감각은 예술과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안이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비판적, 정치적, 사회적 의제에 집중”하고 “예술과 사회의 접점과 더불어 여기서 발생하는 정치 및 사회 문제를 탐구하는 공적인 미술 공간”으로서, CDA 홀론 파빌리온은 외부적 힘에 의해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묻는다.6)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탈정치적인 것으로 위장한 채 거대한 폭력의 한가운데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묻는 이 예술은 설득력 없이 공회전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광주비엔날레의 침묵과 묵인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 폭력에 동조하는 위선이다. 그러나 더욱 문제시되는 것은 이곳이 군사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의 장으로 쓰인 도시 광주라는 점이다.
|
|
|
CDA 홀론 파빌리온 참여 작가 퍼블릭 무브먼트(Public Movement)의 〈데모 DEMO〉(2024)는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구성체”가 되는지를 질문하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시위 운동을 부르는 다른 말이자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나온 단어이자 전시 제목이기도 한 ‘데모’는 조선대학교 학내 구성원들이라는 지역 커뮤니티 일원들에 의해 비엔날레 기간 광주 중심부 5•18 민주광장에서 진행된다. 여기서 광주의 역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는 겹쳐진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가자 지구의 집단 학살과 국가 권력의 폭력에 묵인하는 작가, 기관, 국가에 의해 진실된 “연대, 저항, 돌봄의 신체적 표현”은 실현되지 못한다.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자본과 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착취일 뿐이다.
누구의 역사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가 그 공동체의 삶과 의식을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는 기억하기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예술은 그 기억을 미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아픔을 어루만지고 미래를 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떻게 공동체가 만들어지는지를 질문하는 <데모>는 실패한 질문이다. 그 답은 오히려 길거리 곳곳에 걸린 현수막에 그려져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이번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지워지고 망각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현수막 표면의 ‘파빌리온’에서 가시화되고 있었다. 누군가 고요하게 외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세계의 미래시제다.”
|
|
|
CDA 홀론 파빌리온 규탄 현수막. 사진: 직접 촬영.
|
|
|
[1]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소개, 광주비엔날레재단 홈페이지, https://www.gwangjubiennale.org/gb/exhibition/biennale/pavilion.do (2024년 10월 17일 최초검색).
[2] “2018년 제12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총 3개 기관이, 2021년에는 총 2개 기관이 참여했으며, 올해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는 9개 국가가 참여할 예정이다.” 광주비엔날레 재단 홍보부, https://www.gwangjubiennale.org/gb/Board/11287/detailView.do (2024년 10월 17일 최초검색).
[3] 광주비엔날레재단 홈페이지, https://www.gwangjubiennale.org/gb/Board/11355/detailView.do (2024년 10월 16일 최초검색).
[4]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소개, 광주비엔날레재단 홈페이지, https://www.gwangjubiennale.org/gb/exhibition/biennale/pavilion.do (2024년 10월 17일 최초검색).
[5] 팔레스타인문화연대, 「광주비엔날레는 숨지 말라!」 https://docs.google.com/document/d/10HPmLixQObhkCQbItXgUvDyYXmUJNMjkuUOw2T8nll8/edit?tab=t.0 (2024년 9월 20일 최초검색).
[6] CDA홀론 파빌리온 홈페이지, https://gwangjubiennalepavilion.org/2024/cda-%ed%99%80%eb%a5%b8-cda-holon/ (2024년 9월 20일 최초검색).
|
|
|
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