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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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마흔 두 번째 뉴스레터] 폐가, 사라짐(廢)에 덧입혀진 것들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버려지고 잊힌 것들, 구질구질하고 사랑하지만 갖지는 않을 것들.
이번 글은 전시 공간으로 자주 소환되는 폐가에 대한 소회이다. 거대한 폐건물은 제 나름의 새로운 공간성을 유지하며 지속되지만, 폐가의 지속성이란 유약하기 그지 없다. 전시라는 목적 하에, 이 초라한 공간은 무엇을 덧입고 있나.
[폐가, 사라짐(廢)에 덧입혀진 것들은]
글 정리가 지체되어 예정보다 늦어진 발행을 기다리셨을 구독자 분들께 죄송함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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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핀 벽지, 서리로 뿌예진 창문, 변색된 전등갓. 들어가 살기에는 을씨년스러울 내부 요소는 ‘주거’라는 목적을 떼어놓을 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된다. 근래 폐가(廢家)가 전시 공간으로 자주 소환되는 까닭은 그곳에 삶이 아닌 노스탤지어(nostalgia)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어 있는 공간에는 비참함이 없다. 폐가가 자아내는 노스탤지어는 긍정적인 어조로 구성되는 과거 기억의 환기이기 때문이다.1) 애처로움은 있을지언정 삶의 비참함은 없고, 머무를 수는 있지만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폐가는 작품과 전시의 내러티브를 강화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폐가, '버려진 주거 공간'이 갖는 특징은 여타 폐공간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폐공장이나 폐교 등 버려져 처분이 어려운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재활용하는 사례는 미술계에서 숱하게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은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재활용한 사례로, 35m의 높은 천장과 웅장하기까지 한 내부 설계를 특징으로 한다.2) 이러한 폐공간 재활용은 국내에도 그 양이 상당하다. 일례로 서울 한복판의 국군기무사 터를 확장해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3) 바로 근방에 폐교를 활용한 서울공예박물관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전시 공간일 것이다. 모두 명시할 수는 없지만, 폐공장을 리모델링한 레지던시나 폐호텔을 개조한 전시 공간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규모가 크기에 스펙타클(Spectacle)을 구현하기에 적합하고, 비교적 교통이 편리하다는 명확한 이점이 있다. 그에 반해 폐가는 2m 내외의 천장이 다인데다가 방이 쪼개져 있기에 큰 규모의 작품을 전시하기에 어렵고 주택가에 위치한 만큼 찾아가기에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폐가는 매력적인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비엔날레가 폐가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비엔날레는 지역 활성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도 기능하기에 지역 전반에 걸쳐 다양한 파빌리온을 두고는 한다. 이 때, 행정적으로 처리가 곤란한 폐공간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은 비엔날레 주최 측과 지역행정부 모두의 필요를 충족한다. 또한 이러한 공간들엔 내러티브가 자욱이 쌓여 있어 작품의 의미를 별도의 설명 없이 감각하게 만든다는 특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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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비엔날레의 몇 사례를 돌이켜보자면, 2022년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의 파빌리온이었던 ‘초량’과4) 2024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의 파빌리온 ‘빈집’이 있다.5) ‘초량’은 노동자들이 60년대 경제개발 정책의 여파로 밀려나면서 만들어진 곳으로, 가난한 도시빈민의 애환이 담긴 장소이다.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초량의 한 가정집에는 송민정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작품은 남편을 따라 이주한 일본인 여성 ‘하루코’의 서사를 담고 있었다.6)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고국 일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은 외따로이 떨어진 초량의 공간성과 맞물려 직관적인 감상을 가능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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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빈집’은 양림동의 한 가정집을 활용한 공간이다. 특히 집 내부, 20인치는 될 법한 세 개의 브라운관에 상영되는 미라 만(Mira Mann)의 작품 <엄마의 기억은 다를 수도>(2022)는 노이즈 가득한 브라운관의 화질과 함께 낡은 집에 녹아든다. 작품은 한국에서 독일로 이민을 간 어머니의 서사를 ‘심청가’와 엮어 전개된다. 집안 곳곳에는 구성진 판소리가 정확하지 않은 영어 자막을 단 채, 이민자 어머니와 서독 출신 작가의 간극을 그리듯이 함께 흐른다. 어머니와 고향, 이 두 단어는 공통적으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라는 노스탤지어를 향한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 그 집 특유의 냄새가 난다. ‘초량’도 그러하지만 ‘빈집’ 역시 공간을 재구성하거나 인위적인 수리를 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공간에 살았던 이들의 흔적을 냄새로 먼저 감각하게 되고 그 후에 집의 구조와 작품을 보게 된다. 공간에 들어서면 오래 비워져 있던 공간 특유의 쿰쿰한 냄새와 습기, 곰팡내가 섞여 후각을 자극한다-이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폐가에 천착하게 되는 이유는 그 공간은 다시 버려지고 잊힐 것이라는 게 못내 걸려서인 것 같다. 나뭇재를 흉내 낸 장판이나 내 돈으로는 사지 않을 빨간 자수 방석 같은, 그립고 애틋하며 사랑스럽지만 내가 염원하지는 않을 것들이. 과거이기에 그립고,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애틋하며 곧 떠날 것이라 사랑한다. 이율배반적인 사랑이 공간의 역사와 결을 같이한다. 도심에서 밀려난 노동자의 삶은 휘발되고, 누군가의 터전이었던 공간은 해체된다. 이 더럽고 아늑한 공간은 다시 (완전히) 사라진다. 웅장하고 대단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그런 방식으로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조금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추억되는 노스탤지어가 가리키는 바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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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희진, 디지털 공간에 구성되는 노스탤지어의 사회적 리얼리티, 인문사회21 9:3(2018), 1021.
2) 김명옥, 폐건물의 재생에 의한 현대미술관의 운영전략과 프로그램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실내자인학회, 18:3(2009), 32-33.
4) 이번 2024 부산비엔날레 역시, 2022년도와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초량재’를 파빌리온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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