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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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여덟 번째 뉴스레터] 제5원소를 찾아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더 이상 작품은 캡션란에 활자로 박혀있는 형태로 잔존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현란한 네온사인의 불빛으로, 누군가에게는 검은 쓰레기봉투로 만든 곰인형을 보고 떠올린 유년의 기억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타들어가는 향가루의 내음으로.
실재하지는 않으나 본질적인(quintessential) 제5원소처럼, 이제 작품 감상은 단순한 지각의 영역을 넘어 저마다의 제5원소를 찾아가는 짧은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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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950,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269.5 × 530.8cm,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 □□, 〈□□□ □□□〉, 1967, 스테인리스 스틸, 냉동장치, 91.4 × 92 × 4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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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명은 현대미술사에서 익히 알려진 두 작가의 작업에 대한 캡션이다. 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으레 작품을 보고, 캡션을 읽은 뒤, 다시 작품으로 시선을 돌린다. 캡션에 나열된 정보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고, 또 작품 앞에 머무르는 시간을 결정짓는 것은 아마도 작가의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작품명이 모두 가려진 위의 캡션에서, 당신은 어떤 차이점을 유추해낼 수 있는가?
첫 번째 단서인 제작연도를 지나면 – 두 작품의 시차는 약 15년이다 – 먼저 재료에 대한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편의상 첫 번째 캡션에 해당하는 작품을 A, 두 번째 캡션에 해당하는 작품을 B라고 칭하겠다. A는 일반적인 회화의 재료인 캔버스에 안료로 유채와 에나멜을, B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냉동장치를 재료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A는 회화, B는 설치일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마지막 단서인 크기를 살펴보자. 통상 높이(height) × 너비(width) × 깊이(depth)로 표기되는 작품의 크기를 감안할 때, A는 가로 5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이다. 이에 반해 B는 모든 단위가 1미터를 넘진 않지만, A와 비교했을 때 깊이 단위가 추가되어 평면이 아닌 입체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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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하나: 넘버 31, 1950 One: Number 31, 1950〉, 1950, 269.5 × 530.8cm, 뉴욕현대미술관(MoMA) 소장. ⓒThe Museum of Moder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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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한스 하케(Hans Haacke), 〈아이스 테이블 Ice Table〉, 1967, 스테인리스 스틸, 냉동장치,
91.4 × 92 × 49cm, 국립현대미술관(MMCA)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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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선구자로 알려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대형 회화 연작 중 하나로,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붓거나 뿌려대는 그의 드리핑(dripping) 기법이 구현된 전형적인 예이다(도 1). 폴록을 비롯해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등 뉴욕 스쿨 화가들은 행위적인 추상미술 작업을 통해 전전(戰前) 모더니즘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이론적 수호자였던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에 의해 흔히 대문자 ‘M’으로 격상된 모더니즘은 1960년대 후반부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1) 1967년 루시 리파드(Lucy R. Lippard, 1937-)와 존 챈들러(John Chandler)의 평론에서 제기된 바와 같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진입하는 이 시기부터 완성된 형태로 제작되는 ‘오브제로서의 미술(arts as object)’ 개념이 와해되고 작품 제작의 사고 과정이 중시되는 미술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경향이 등장했다.2)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매체에 빛, 소리, 행위 등의 요소를 결합하며 비정형적인 작품을 생산하였다.
몇 주 전 종료된 MMCA 소장품 특별전 《가변하는 소장품 Collection Variable》(2024.3.29.-7.21.)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가운데 무형(無形)의 상태와 비물질로 이루어져 다양한 조건과 가변적(variable) 특징을 보여주는 현대 및 동시대 작품을 소개한다. 현대미술에서는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매체를 탈피해 정확한 크기를 산출할 수 없거나, 전시 장소의 크기나 조건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나 구성으로 설치하는 경우에 ‘가변크기(dimensions variable)’ 혹은 ‘가변설치(installation variable)’라고 표기한다. 전시는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의 조각-설치로 시작된다(도 2).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콜렉티브였던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초기 멤버이기도 했던 하케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변화’와 ‘운동’에 대한 개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아이스 테이블〉(1967)은 그가 유체 역학을 실험하는 시기를 지나 기체를 실험하는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3) 공학자와 협업해 제작한 이 작품은 전시 공간 내 빛과 온도, 그리고 습도에 반응하며 형태를 변화시킨다. 주변 환경에 따라 테이블 위의 성에가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작품은 끊임없이 가변하지만, 작품의 기본 구조는 입방체라는 점은 흥미롭다. 미니멀리즘의 상징인 입방체 구조는 ‘오브제로서의 미술’의 극단을 보여준다. 공간적 요소를 소거해나가다 종국에는 사물(thing)이 되어버린 미니멀 조각과는 달리 하케는 변화를 긍정하며 “과정, 상황, 또는 환경과 소통하는 열린 체계”로서의 미술을 주장하였다.4)
이렇듯 하케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서막을 연 《가변하는 소장품》은 ‘가변하는 관계’, ‘가변하는 크기’, ‘가변하는 장소’의 3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었다. 주로 예술과 기술의 협업을 보여주는 ‘가변하는 관계’에서는 한국 미디어아트의 개척자 백남준(1932-2006)의 대표작이자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기도 한 〈다다익선〉(1988)의 일부와 육근병(1956-)의 봉분 형태의 미디어 설치가 전시되었다. 과천관의 램프코어를 꽉 채우고 있는 원작은 전시 장소에 맞춰 반원형의 보조대 위에 크기별 CRT 모니터 5개로 전환된 형태로 등장했다. 이외에도 홍승혜(1959-)의 그리드 파편과 ‘파이브 스토리가 아닌’ 이주요(1971-)의 〈파이브 스토리 타워〉(2019-2020), 김소라(1965-)의 사운드 조각 등 전시된 소장품들은 크기와 매체, 맥락과 오감을 종횡하며 관람객에게 확장된 예술의 형태를 쉴 새 없이 제시한다.
전시장 내에 은은한 향냄새를 풍기는 오인환의 작업으로 끝나는 《가변하는 소장품》의 실제 출품작은 20여 점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뉴미디어 작업은 이 전시에 무리 없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 실제로 2017년 리스본의 예술, 건축 및 기술 박물관(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Technology, MAAT)에서는 유사한 기획의 《가변크기 Variable Dimensions》(2017.2.8.-5.29.)이 열린 바 있다.5) 현대미술 작품의 캡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변크기를 건축의 영역으로 확장한 이 전시에서 예술가와 건축가는 작업의 형태와 규모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양태로 공간을 함께 점유한다(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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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가변크기 Variable Dimensions》(2017) 설치 전경.
Photo by Bruno Lopes. ⓒ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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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수스(Joseph Kosuth, 1945-)가 “뒤샹 이후의 모든 미술은 개념적”이라고 선언했듯 이제 형태의 문제에서 기능의 문제로 이행한 현대미술은 관객에게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진다.6) 더 이상 작품은 캡션란에 활자로 박혀있는 형태로 잔존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현란한 네온사인의 불빛으로, 누군가에게는 검은 쓰레기봉투로 만든 곰인형을 보고 떠올린 유년의 기억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타들어가는 향가루의 내음으로. 실재하지는 않으나 본질적인(quintessential) 제5원소처럼, 이제 작품 감상은 단순한 지각의 영역을 넘어 저마다의 제5원소를 찾아가는 짧은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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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ucy R. Lippard and John Chandler, “The Dematerialization of Art,” Art International 12:2 (February 1967): 31-36.
3) Suzanne M. Weaver, “Hans Haacke: An Investigation of Four Site-Specific Works that Incorporate Painting as a Means of Revealing Interrelated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s in Society, 1982-1984” (MA dissertation, University of North Texas, 1992), 21-26.
4) Hans Haacke, “Hans Haacke: Where the Consciousness Industry is Concentrated,” interview by Catherine Lord in Cultures of Contention, ed. Douglas Kahn and Diane Neumaier (Seattle: The Real Comet Press, 1985), 205, 앞의 글, 2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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