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
|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 일곱 번째 뉴스레터] 예술과 주체성의 교차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
|
|
어떤 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유리하고, 살아가기 더 편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하지 않는다. […] 계급횡단자를 구별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사회의 부동성으로 인해 거의 겪어 볼 기회가 없었던 극단적인 상태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계급횡단자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체험을 한 존재다.1)
샹탈 자케 (류희철 옮김), -계급 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中에서-
|
|
|
인종, 젠더, 성별, 출신, 집안, 외모, 재산, 직업, 학벌 등 수많은 계급 간 지표들은 매우 촘촘한 층위로 우리를 둘러싸고 ‘나’와 ‘타자’를 구분 짓게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기존(자신의 출신 환경)의 축에서 다른 축으로 횡단하려는 성과(成果)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그 현상에 관해 보다 깊게 파고들고 ‘사유’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한 개인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근사한 경로를 결과에 따른 성공신화, 즉 단선적인 원인과 그에 따른 ‘성공’의 유무로서만 판가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이 이룩한 층위의 전환을 분석하고 그 속에 뒤엉킨 원인들을 파악해내는 시도는 더 이상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창조된 신화로서가 아닌, 우리의 실제 삶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며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함에서 비롯되어져야 할 것이다.
1532년, 소포니스바 앙귀솔라(Sofonisba Anguissola, 1532-1625)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도시이자 밀라노 외곽에 위치한 크레모나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드물게 여성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훗날 스페인 궁정화가가 된다. 요컨대 그녀는 귀족여성으로 태어나,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관례가 아니었지만 자율적으로 예술가의 삶을 행한 주체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귀족·여성·화가’라는 상충되는 조건을 가지고도 이것들을 아우르는 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었을까?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는 상류계급의 여성이 남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수학과 천문학까지 익혀야 하는 인문주의적 교육문화로 인해 이탈리아의 귀족 여성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전통적인 역할에 덜 얽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앙귀솔라는 자녀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인문학과 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녀가 14살이 되던 해에는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그림의 원리를 배우기 위해 다른 가문에 보내지기도 하였다.2) 하지만 앙귀솔라가 귀족이라하여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미술교육을 그들과 차별 없이 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엔 화가라는 직업이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된 선례도 없었으며, 귀족 신분으로는 자신의 작품을 사적으로 매매할 수도 없었다. 앙귀솔라의 타자성(직업화가)을 향한 모험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녀는 아마 그녀에게 주어진 출신 환경으로부터 이익과 불이익 사이에 서서 깊은 갈등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추동된 저항의 감정은 그녀에게 강력한 동력이 되었고, 앙귀솔라는 자신에게 허락된 자리나 위치가 아닌 다른 층위로의 이동을 선택한다. |
|
|
(도 1) Sofonisba Anguissola, <노파와 함께하는 자화상 (Old Woman Studying the Alphabet with a Laughing Girl)> , c.1550s, Black chalk heightened with white, on paper mounted on canvas, 301x345m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
|
|
그녀가 이를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앙귀솔라는 생애 동안 약 75년에 거쳐 총 13점의 자화상을 남겼으며 이는 그녀가 자아조작(Self-Fashioning)을 통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시키고 있는지, 다양한 표현에 대한 그녀의 접근법을 알 수 있다. 우선 1545년에 그려진 <노파와 함께하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Old Woman)>에서 앙귀솔라는 ‘이중 초상화(Double-Portrait)’의 형식을 선택하여 자신이 구체화시킨 자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소박한 옷차림으로 보아 하인으로 짐작되는 노파는 책을 손에 들고 있고, 앙귀솔라는 그 옆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보여준다(도 1).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앙귀솔라가 노파를 옆에 세움으로써 강조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젊음이다. 이는 그녀 스스로를 실력 있는 예술가로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을 일종의 예술적 영재로서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짐작해 볼 수 있다.3) |
|
|
(도 2) Sofonisba Anguissola, <이젤 자화상(Self-Portrait at the Easel)>, c. 1556, Oil on canvas, 66 x 57cm, Muzeum-Zamek, Lancut
|
|
|
이러한 주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1556년 작품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의 깊이 있는 측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이젤 자화상(Self-Portrait at an Easel)>에서는 예술가 앙귀솔라, 그리고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 속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총 세 캐릭터가 등장한다(도 2). 이 작품은 종교화를 그리는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며 당대에 화가로서 자신의 기술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종교적 주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건하고 바른 여성으로의 자기표현(Self-Presentation)을 강화시킨다. 당대에 여성에게 종교화가 금기시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자신의 자화상에 자신이 그리는 종교화를 병치한 의도에서 그녀가 화가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더 과감한 주장을 펼치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성모마리아를 재현해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화가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화가로서 그녀의 작품에 일종의 ‘신성한 인정’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앙귀솔라는 이를 통해 남성들만이 종교화를 그릴 수 있다는 헤게모니를 무력화시켜 자신을 화가로서 그 위상과 자질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
|
(도 3) Sofonisba Anguissola, <앙귀솔라를 그리는 베르나르디노 캄피(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 Anguissola)>, c.1559, Oil on canvas, 111×109.5m, Pinacoteca Nazionale di Siena
|
|
|
반면 <이젤 자화상>과 불과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앙귀솔라를 그리는 베르나르디노 캄피(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 Anguissola )>(1559)의 초상화는 앙귀솔라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접근법에 있어 매우 색다른 전략이 구현되었다(도 3). 미국의 미술사학자 휘트니 채드윅(Whitney Chadwick, 1943-)은 이 작품을 통해 “아마도 여성 예술가가 의식적으로 주체-객체의 위치를 붕괴시킨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말한다. 4) 이를 설명하자면, 앙귀솔라는 수동적인 여성 객체이며, 캄피는 그림을 창조해내는 능동적인 남성 주체로 나타나지만 이 작품은 앙귀솔라의 손으로 제작된 작품이기에 결국 다시 그녀가 주체가 된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캄피에게 그림의 공을 돌리는 듯하지만, 앙귀솔라가 제작자로서 그 주도권을 재탈환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비스듬히 돌아선 4분의 3포즈와 고급스러운 옷과 장식, 부드러운 이목구비 위로 발그레한 볼 등 당대 16세기 귀족 여성들이 초상화를 제작할 때 쓰이는 전형적인 유형을 자신의 모습에 차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임과 동시에 원하는 모습을 손으로 정확하게 담아내는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5) 이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호감과 궁정에서의 자리를 얻기에 유효한 전략으로 통하였고, 결국 이 초상화가 그려진 직후 1559년에 앙귀솔라는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초청받아 남은 일생 동안 스페인에서 화가로서의 삶을 지낸다.
앙귀솔라는 이렇듯 그녀의 자화상을 이용하여 매번 같은 인물일지라도 다면적인 자아를 제시하여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나가는 전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투쟁 속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요건들이 교차하며 그곳에서 발현된 그녀만의 다채로운 욕망이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끝이 성공을 위해 앙귀솔라처럼 노력하며 기발한 전략을 떠올리라는 메세지는 결코 아니다. 살아감에 있어 본인이 어떤 층위에 놓인 사람이건 간에 정답은 없다. 모두 동일한 형태로 삶을 얻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만 우리가 방금 16세기에 살았던 앙귀솔라라는 개인을 둘러싼 경제적 후원과 정치적 제도의 제약 사이의 불협화음으로부터 추동된 감정의 물결을 읽었듯 가까운 내 가족과 친구의 생을, 접촉하고 관계하여 다시금 보자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거대한 말 속에 가려진 개개인의 장벽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자기 자신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주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 배치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은 나아가 자신 역시 이해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타자를 내 성공을 확인할 때나 필요한 도구로 두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알고 다름을 견디며 ‘타자로서 나를’, ‘타자로서 타인을’ 생성해나가는 것이 맞을까?
|
|
|
2) 사생아로 태어나 전통적인 귀족으로서의 교육을 받지 못한 소프니스바 앙귀솔라의 아버지 아밀카레 앙귀솔라(Amilcare Anguissola)는 인문주의자로서, 그들의 자녀들 또한 다재다능한 인문주의자로 키우려 하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야기』, 지봉도 옮 (동서문화사, 2011), p.10.
3)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관객의 시선을 피하며 피부를 노출시키는 당대의 여성 초상화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 역시 앙귀솔라가 단순히 귀족여성이 아닌 화가로서의 본인의 주체성을 담아내고자 한 첫 시도로 볼 수 있다. Black, Jennifer Brynn. Female self- portraiture in early modern Europe: Colonna, Anguissola, Whitney, and Peeters. Boston University, 2004. p.83.
4) Chadwick, Whitney. Women, Art, and Society. London: Thames and Hudson, 1990. p.100.
5) 16세기 여성 귀족을 위한 초상화의 범례로서 크게 유행한 티치아노(Titian)의 <라 벨라(LA Bella), 1536>는 대중화되어 당대 귀족 여성들이 초상화를 제작할 때 쓰이는 유형으로써 대중화되었는데, 초상화 속 라벨라의 복식과 자세, 생김새까지 앙귀솔라의 모습이 매우 유사하다. Sandberg, Claire E. Sofonisba Anguissola’s 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 Anguissola and the Ideal Cortigiana. American University, 2020. P.41. |
|
|
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