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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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 여섯 번째 뉴스레터] 흐름을 그러쥐어 보는 일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전시 《금비가 우유처럼》(2023. 11. 28. ~ 12. 6.)의 4인의 참여 작가-김승찬, 김소형, 고서연, 김수민-는 몸을 이루는 물질적 차원의 내외부의 구성물에 주목함과 동시에, 외부의 자극에 의해 변화를 맞이한 사이에 발생한 몸의 신체적 변화와 정서적 반응을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작품으로써 몸은 가진 것을 전부 내보이기 위해 제 속을 갈라내거나 무작위로 부풀기도 하며, 숨기 위해 다른 물체로 위장하고 딱딱한 외피를 입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을 반영한 전시 제목 “금비가 우유처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에 이야기에서 착안한 제목으로, 신체의 물질적 차원과 상상적 차원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상태에 대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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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살결은 작은 뼈 하나조차도 빈틈없이 감싼다. 뼈대는 관절과 연골로 접합되어 있고 사이로 근육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내부에는 수없이 얽힌 동맥과 정맥들, 미세 혈관들로 이어진 장기는 뜨겁고, 축축하며, 박동한다. 물질적인 몸(flesh)은 모두가 유사할 수 있으나, 구성물을 낱낱이 파헤치면 전부 다르다. 예컨대, 미시적 차원에서 몸은 계속 자라고 탈각되는 부산물이기도, 집어삼키고 배설되는 소화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당장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몸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혈액과 체액, 호흡의 교환으로 서로에게 감염된다든지, 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DNA를 파헤쳐보는 것까지 몸으로써 포괄한다면 말이다.
자신을 이루는 것들이 계속해서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몸(body)은 표현하는 것은 계속해서 흐르는 액체를 잠시 그러쥐어 보는 일과 비슷할 터이다. 유동하는 액체는 머무는 장소와 흐름에 따라 자신을 맞춰가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기에, 이를 그러쥐는 것은 가능하나 결국 손에서 빠져나간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비슷해 보이는 외형일지라도, 전체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가장 익숙하고도 신비한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몸을 상상할 때, 생명체가 제 갈증을 축이기 위해 어미에게서 나온 우유를 입안에서 굴려보는 일을, 살 틈에서 뿜어내는 끈적하고 새빨간 피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혹은 신화로 전해 내려오는 금비가 살 위로 쏟아지는 매혹의 순간을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1)
스무 개의 몸(작품)은 공간 곳곳에 녹아들거나 튀어나와 제 자리에 매달리고, 통과하고, 배치되고, 엉켜있다(도 1). 전시장 내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획되며, 독특하게도 구역마다의 벽면과 바닥의 색과 재질이 전부 다르다. 작가진은 이 안에 자신의 분신을 내어놓기 위해 인간이 한 세포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의 형체를 갖추는 열 달간 독특한 공간 구성에 맞춰 작품을 제작해 낸다. 각 작품은 <반짝임을 먹고 자란>, <말라 비틀어진 막>, <무명생명체>, <Sticky gloomy>라는 제목으로 의미심장함을 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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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갤러리 호호 《금비가 우유처럼》(2023. 11. 28. ~ 12. 6.) 전시 전경, 이미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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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김승찬, <파편에 달라붙은 덩어리>, 2023, 혼합매체, 가변설치 |
(도 3) 김승찬, <떨어진 반짝임을 먹고 자란>, 2023, 세라믹, 알루미늄 파이프, 게딱지, 전복 껍데기, 스컬피, 조화, 레진, 94 × 43 × 3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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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찬의 <파편에 달라붙은 덩어리>(2023)는 다른 작품을 만들 때 그에 속하지 못한 파편에 다리를 달아주거나, 점토로 부위를 만들어주는 등 쓸모를 다한 사물을 고유한 존재로 설 수 있게 한 작업이다(도 2). 이에 연장선인 <떨어진 반짝임을 먹고 자란>(2023)은 작가가 일상적으로 마주한 사물-깨진 도자 작품의 조각, 전복을 먹고 난 뒤 남은 껍데기, 사용하지 않는 삼각대-의 조합으로 서 있는 듯한 형상을 만든 것이다(도 3). 사소하고 작은 것. 쉽게 버려지고 소모되는 것. 일상적이나 하찮은 것들은 아이러니하게 저들끼리 재조합됨으로써 몸으로서 지위를 얻어낸다. 스스로 서 있는 이들의 몸을 누가 함부로 밟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지점은 이 작업이 서 있는 장소이다. 작가는 화이트 큐브 공간에 난반사를 일으키는 은빛의 바닥을 만든 <Twinkle Land>(2023)와 천장에 별 모양의 <Shining>(2023)을 설치한다. 바닥과 천장을 점유한 두 작업 사이의 바닥 면은 은은한 빛을 머금은 채, 빛나는 성좌가 떠 있는 상상적 피난처가 된다. 작가는 자리를 찾지 못해 내몰린 것들에 몸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머물 일시적이나 실제적인 장소를 제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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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김소형, <무말랭이>, 2023, 젤라틴, 철사, 실, 흡착고무, 13 × 12 × 5cm |
(도 5) 김소형, <거스러미>, 2023, 젤라틴, 봉합사, 시침핀, 26 × 8 × 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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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의 젤라틴 연작은 작가가 할머니와의 관계를 재정의하고자 한데서 기인한 <무말랭이>(2023)로 부터 시작된다(도 4). 누군가의 살과 뼈가 가루가 된 젤라틴을 다시금 물에 개어 액체로 만들고 끓여낸다. 이것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지는 와중에 모양을 잡고 멸균 침을 박아 넣는다. 완전히 굳어진 다음에는 바늘을 달궈 조각에 구멍을 내고, 실을 잇고, 엮어 내어 바늘이 그 몸체 안에 들어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도 5). 작가는 이와 같은 과정이 관계를 맺어가는 와중에 서로 주고받는 폭력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상처가 난 뒤에 부푸는 살갗, 그 안에 차는 진물과 고름, 그리고 그마저도 전부 빠져나간 후에 남는 허물 같은 것으로 말이다. 관계가 남긴 허물을 바라보자. 유연한 모양 위에 새겨진 기포와 주름은 얼마든지 뜨거울 수도, 차가울 수 있는지 말한다. 상처 입히는 건지, 아니면 계속해서 상처를 준 건지 모호한 바느질과 침을 놓은 흔적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상처와 치유를 가리키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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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6) 고서연, <검은호수>, 2023, 종이판넬에 연필, 볼펜, 아크릴, 120 × 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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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7) 고서연, <무명생명체>, 2023, 지점토에 실, 파라핀, 5.5 x 26 x 9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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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연의 작품은 전부 검은 색을 띠는 것이 특징적으로, 인간 존재가 형성될 당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 봤을 색이 검은색이었을 것이라 상상하는 데에서 검은색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어렴풋이 드러나는 씨앗과 같은 형상이나 산의 능선과 같은 풍경(<검은호수>(2023))은 어머니의 자궁 눈 뜨지 못한 이들의 시야를 엿보는 것이리라(도 6). 이름이 없던 비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의미를 담아 “무명생명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에 연장선에 있는 조각 <무명생명체>(2023)과 <처음 가진 것>(2023)은 언뜻 보기엔 단단해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연약한 재질인 호일에 검은색의 파라핀으로 여러 겹 감싼 것이다(도 7). 단단해 보이지만 한없이 연약하며, 새까만 와중에도 빛깔 차이를 지니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지, 스러지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이들. 무명생명체란 이름처럼 태초부터 아이러니하다. 아마 존재하지도 못했기에 만나보지도 못했던, 이름 없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를 작가의 향수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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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8) 김수민, <부푼우연>, 2023, 우레탄폼, 케이블타이, 수축호스, 식물, 43 x 113 x 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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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9) 김수민, <Sticky gloomy>, 2023, 주운호스, 실리콘, 점토, 비즈, 실, 가변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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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은 외부로부터 연원한 감정(emotion)과 정동(affect)을 비정형적인 형상을 가진 조각과 설치로 표현한다. 어디서 생성된 지 불확실하지만, 몸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는 감정과 정동은 결국 예상치 못한 곳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곤 한다. 어느샌가 심어진 불안의 씨앗은 점점 몸 안에서 증식하며 그 형상을 만들어내는데, 끝도 없이 부풀거나(<부푼 우연>(2023)), 끈적하게 본인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한다(<Sticky Gloomy>(2023))(도 8, 9). 작품을 이루는 가느다란 선에 매달린 호스들의 뭉치, 축축하다 못해 흐를 것 같이 덮인 실리콘은 곧 신체의 내장을 연상하게 한다. 내장과 같은 몸체를 지닌 작품에 안착한 식물, 레이스, 실과 비즈와 같은 의미심장한 오브제들 그에 얽힌 사연을 무엇일지 따라가게 만든다. 비정형적이고 모호한 재료인 실리콘과 우레탄폼과 지극히 평범하고 분명한 오브제의 조합은 작가가 계속해서 떠올렸던 잔상이 얼마나 생생했다가 이내 흩어지고 말았는지 떠올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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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해숙, 전시 서문 「금비가 우유처럼」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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