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레터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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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네 번째 뉴스레터] 미끄럼 방지턱: 엮어내거나 관통하거나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네 번째 레터는 기술과 예술의 접촉에 대한 글이다.
「미끄러운 세계에 여러 겹 괄호 치기」는 인공지능과 인간 큐레이터를 비교한 전시인 《알고리즘 받침대(The Algorithmic Pedestal)》를 통해 창의적인 큐레이션에 대해 고민한다.
「평행-세계를 뚫-고」는 기술의 한계로 보이는 질감이 캔버스로 전도되는 현상을 주목하며 기술의 발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①] 미끄러운 세계에 여러 겹 괄호 치기.
[②] 평행-세계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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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운 세계에 여러 겹 괄호 치기.
심하린
1.
최근 오픈 AI 챗봇 '챗GPT'가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며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예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또다시 불거지는 양상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창의성조차 AI에 대체당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에 따라 인공지능 시대에 예술의 패러다임이 전환될 것이라거나, 혹은 그저 장르의 확장일 뿐이라는 등과 같이 AI가 예술 창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큐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즉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 전시 기획에 있어서 인공지능은 인간 큐레이터를 압도하게 될 것인가.
2.
이와 같은 질문과 관련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인터넷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2023년 1월 11일부터 17일까지 런던에 위치한 J/M 갤러리에서《알고리즘 받침대(The Algorithmic Pedestal)》라는 전시를 선보였다(도 1). 연구원 로라 허먼(Laura Herman)은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과 인간이 주도하는 큐레이션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알고리즘이 진정 미술 큐레이터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술가 파비엔 헤스(Fabienne Hess)와 인스타그램에게 각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오픈 엑세스 컬렉션에서 자유롭게 예술품을 선별하여 인스타그램 계정에 전시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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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The Algorithmic Pedestal, photograph by Fabienne H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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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는 '상실'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골랐는데, 상실은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고유한 경험이라고 믿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에 따라 3년 동안 메트로폴리탄의 컬렉션을 물리적으로 탐구하고 각 작품에 담긴 서사를 파악하는 등 호기심, 그리고 인내심과 같은 ‘인간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상실의 데이터 세트”를 제작하였다. 이와 같은 헤스의 큐레이팅 방식은 인간적인 선택 기준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에 따라 선정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헤스와 겹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울러 몸과 얼굴이 드러나는 이미지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광고나 판매 카탈로그 스타일의 ‘상업적으로 보이는’ 그림들도 다수 관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허먼은 미적 가치보다는 알고리즘의 수익 중심의 관심사가 반영된 것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추정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차이는 인스타그램이 선택한 작품들은 뚜렷한 맥락이 없이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헤스의 큐레이션은 ‘상실’이라는 하나의 스토리를 전달고자 하는 시도가 드러났으며, 각 작품들은 통일된 맥락 안에 묶이는 양상을 띠었다. 이에 대해 헤스와 허먼은 ‘상실’이 매우 인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알고리즘 받침대》는 AI와 달리 인간은 작품을 감상하고 이미지를 바라볼 때,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대한 것인지 질문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맥락 짓기’를 중요시함을 보여준다.
3.
비단 ‘상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은 쉽게 규정하기도 분류짓기도 어렵다. 요컨대 우리의 세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고정된 범주에 정착하지 않고 미끄러져 나가는 개념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미지들을 묶어 맥락을 설정하고, 그 맥락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해석을 다시 만들어 감으로써 이것들에 다가가길 시도해 왔다. 이렇듯 AI와 차별되는 지점으로 ‘맥락’을 강조하는 전시를 약 한 페이지 분량으로 길게 소개하는 까닭은 내가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적어도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는 말이다).
독일철학자 후설은 사물에 대해 기존의 관점과 선입견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며 이를 괄호치기로 명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괄호치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신선한 관점을 갖추고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한편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한번 혹은 여러번 새롭게 중괄호(curly bracket,{})를 쳐볼 것을 제안한다. 영문법에서 중괄호는 같은 맥락의 글 혹은 문장을 묶음 표시하기 위한 기능으로 사용된다. 미끄러운 것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기존의 습관적 이해에서 벗어난 후 다시 여러 겹의 괄호를 치다 보면, AI와 상관없이 인간의 큐레이션이 창의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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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챗GPT는 오픈AI가 개발한 자연어를 기반으로 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이다. 대화, 작문, 번역과 검색 기능이 있다. 여기서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Model’의 약자다. 약자 GPT에서 알 수 있듯이 차별화되는 중요한 특징이 세 가지 있다. 제일 먼저 기존 인공지능 모델과 달리 텍스트 속의 문자와 문장뿐 아니라 문단의 ‘맥락(Context)’까지도 학습한다. 예를 들어 각 단어 사이의 관계 중요도를 파악해서 서로 연결하는 맥락 연결망(Attention Network)을 갖췄다. 연결망은 책의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전체 맥락을 서로 연결한다.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2/15/AWSM3CNZPFFDNDUXUPC6ENVBSQ 참조. 챗GPT의 능력에 대해 인간과 마찬가지로 맥락까지 학습한다는 낙관적인 기대감이 존재하지만 아직은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AIi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개진시킬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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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매끄럽고 물컹하며 보기 전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던 상상-그것도 상상이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은 현실이 된다.
1.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과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은 미술관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며, 우리는 이러한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작업을 보고 이것이 AR인지 VR인지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1) 현실에 그래픽을 덧입히는 AR에 비해 VR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과 물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최근 아트 선재의 《강현선:포스트미》(2022.12.08.-2023.01.29.)에는 <이성(理性)의 정원>이라는 VR 작업이 전시되었는데, 작가는 식물학자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의 식물일지와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식물 종을 시각화해 상연하였다. 위의 예시가 보여주듯 가상현실 기술은 상상의 결과물을 임의의 공간에 펼쳐놓는 것을 가능케 한다. 한정된 전시 공간에서 새로운 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리미널리티(liminality)를 획득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기술은 예술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전시는 제법 보지만 기술과는 전혀 친하지 않은 나에게 AR과 VR을 이용한 일련의 작업들은 뭐랄까, 베스트 프렌드는 아니지만 만나면 인사는 할 법한 어색한 지인 같은 게 되어버린 것이다. 작업이 있으면 곧잘 체험하고 때때로 아주 마음에 들지만 여전히 그것이 돌아가는 방식 따위는 잘 모르는 채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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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아트사이드 갤러리, 《그래서, 나의 시선 끝은》(2023.01.13-02.11) 전시 전경. 출처=아트사이드 갤러리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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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R과 VR이 구현하는 화면은 ‘대체로’ 사실적이다. 단단하고 구조적인 사물은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이지만, 생물체를 표현할 땐 움직임과 외형이 어색하게 구현되기도 한다. 그 원인은 특유의 매끄럽고 물컹해 보이는 질감 표현에 있는 듯한데, 디지털 화면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미끈한 촉감은 최근 오프라인의 캔버스로 전도되는 양상을 보인다.
김시안(1992- )의 작업은 매끄럽고 물렁하며 보기 전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물체들-회화보다 VR에서 보았을 법한 어색하고 뒤틀린 형상들-은 캔버스에 안착시켜 평행하는 가상의 레이어를 뚫어낸다. 여기서 가상의 레이어는 중첩된 수많은 세계를 말한다.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실재하는 세계 위에 차곡히 쌓이는 층(layer)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 층들은 실재 세계에서 물질적으로 감각할 수 없기에 가상의 레이어로 평행하게 쌓인다. 김시안이 그리는 물체들을 보자, 이 일그러진 물체들을 VR에서 보았다면 그저 조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도 1). 그러나 가상 공간이 아닌 물리 공간 속 캔버스에 그려짐으로써 물체는 사실성을 획득하고, 만질 수 있는-가상의 촉감이라는 모순을 재현하며 실재 세계와 가상 세계를 관통한다.
3.
전통적으로 회화는 재현(representation)의 예술이었다. 캔버스는 세계를 재현하고 작가는 캔버스를 경유해 세상에 발붙인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말을 빌리자면 회화는 작가가 세계에 접지(grounding)하는 방법이 아닐까.2) 콘에 대해 거칠게 부연하자면, 그는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적 사고가 인간의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한 편 “상상력에 의해 열린 모든 미래의 가능성”이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하고 공황 상태를 야기한다고 설명한다.3) 다시 말하자면, 손에 잡히지 않는 무한한 상상이 나를 세계에서 분리시킬 때 우리는 공황을 느끼고 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세계 속에 다시 나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면-상상의 세계를 부유하는 작가에게 캔버스와 물감이란 말 그대로의 ‘접지’, 상상의 연약하고 순간적이며 추상적인 지점을 붙잡아 물질적 속성을 지닌 캔버스에 안착시켜 땅에 닿게 만들어주는 매개가 아닐까.
이 지점에서 회화와 AR, VR 등은 아주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되는데,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재현함에 있어서 회화는 비록 추상적으로 보여지더라도 물리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한편 AR과 VR은 여전히 바이트(byte)로 이루어진 평행 레이어에 위치해 현실에 고정되지 않는다. 실제 공간을 점유하는 회화의 물질성은 불안정하고 물컹한 가상 공간의 물체들을 붙잡아 현실에 박아 넣는다.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두 특성을 관통해내는 작가들의 작업은 그래서 흥미롭고 ‘상상’의 범주를 다시 설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의 지적 영역이 자리를 잃고 있다고 불안해하지만, 인간의 ‘창조성’을 회의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은 어느 지점에선가 다시 인간의 상상과 맞닿고 있을지도 모른다-우리가 보기 전까지 해본 적 없던 상상은 그런 식으로 현실이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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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두아르도 콘은 인류학자이자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로, 인간과 비인간의 생은 기호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콘은 이런 식의 논리 전개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3)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역, (사월의 책, 2018)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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