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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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다섯 번째 뉴스레터] 디오니시아 축제: 비천한 자와 고결한 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다섯 번째 레터는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상연되었던 경연, 비극과 희극을 주제로 두 편의 영화를 다룬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는 가장 비천한 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상의 악을 향해 가장 다정한 공격을 행한다. 웃음 가득한 이 영화에서 희극의 고유한 특성인 '파라바시스'의 효과가 산출된다. 한편 비극적인 영화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2000)에는 감정이입이 불가할 정도로 윤리적으로 고결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본 글에서는 주인공이 어떻게 죽음을 통해 비극을 유발하는 '하마르티아'를 해소하고 있는지를 해명한다.
[① 파라바시스(Parabasis)와 멀티버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② 차갑고 서늘한 비극의 윤리: <어둠 속의 댄서>의 하마르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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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바시스(parabasis - παραβασις)”는 “넘어가다(a going over)”란 뜻을 지니며,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 코로스가 무대와 객석 사이를 넘나들며 극의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벽을 허무는 희극만의 고유한 특성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대 디오니시아 축제는 신을 위한 제의를 치르고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어우러지는 행사였다.1) 축제의 경험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만족감을 얻고 정체성을 다지는 기회로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비극과 희극 경연대회였다. 비극 경연대회는 3일동안 이어지며, 세 명의 비극 시인이 하루에 각각 비극 3부작과 사튀로스 극(satyric play) 한편을 상연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엔 뒤풀이 의미를 갖는 희극 경연대회가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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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BC446-385)의 희극인 「아카르나이 사람들 Ἀχαρνεῖς,」 (BC 425)의 결말 부분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투입되었던 시민들 앞에서 상연되었다.2)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소포클레스(Σοφοκλῆς Sophoklē̃s, BC497-406)의 비극 「필록테테스 Φιλοκτήτης」 (BC 409)를 차용해 희극에서 전하는 ‘평화’라는 메세지를 상기시켰다는 것이었다. 아르스토파네스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장군 라마코스와 평범한 시골 농부인 디카이오폴리스를 극에 등장시킨다.
리마코스는 말한다. “전우여 내 두 다리를 잡아, 잡아,
파파이papai [필록테테스가 고통 속에 사용한 것과 같은 특이한 감탄사], 꽉 잡아.” 디카이오폴리스는 말한다. “사랑스러운 나의 여인들이여 내 음경을 잡아, 가운데 있는 그걸 잡아, 꽉 잡아.” 3)
비극적인 대사마다 희극적인 응답이 따르면서, 희극적 영웅의 무절제와 추함이 일종의 치료법처럼 보이게 된다. 전쟁의 잔인한 파괴보다는 평범한 삶과 모든 인간이 좋아하는 쾌락이 제시되고, 부상자를 위한 병상보다는 쾌락을 위한 침대가 제시되는 것이다.4)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은 『정치적 감정 Political Emotions』에서 이 희극을 보는 관객들은 그 누구도 아픔에 몸부림치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라마코스의 운명을 지니고 싶지 않았을 것이며, 반면에 디카이오폴리스로 상징되는 삶의 좋은 면에 대한 갈망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인정은, “삶의 부드러움 면이라고 부를 만한 상태로, 디카이폴리스의 승리와 리카코스의 고통의 병치에 대해 웃다보면 가장 군인다운 관객 조차 자기 영혼의 어떤 부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5) 따라서 누스바움이 발견한 이 축제들의 정치적 역할은 이 연극 형식이 관객과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해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6)
아리스토파네스는 극 안에서 모순과 풍자를 사용해 당시 정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중 「아카르나이 사람들」의 ‘파라바시스' 장면을 눈 여겨 볼만 하다. 파라바시스는 희극만의 독특한 특성으로, 경연 도중 코로스가 가면을 벗고 연극적 환상을 중지시킨 뒤 코로스장과 교대로 작가의 세태에 대한 진단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제언하는데 특별히 실명으로 아테네에 의롭지 못한 자, 정치적으로 부도덕한 자를 단죄하고 매도하는 것이다.7)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의 형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듦으로써 일종의 연대를 만들어내고, 평범한 주인공이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평화의 가치를 전달하는 메세지를 남겼다. 또한 파라바시스에서 정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냄으로써 극을 넘어 현실에서 종전이라는 변화를 이끌어내려 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카르나이의 사람들」로 당해 희극 축제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누스바움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삶의 의미를 제시하는 정치적 역할을 발견 했듯이, 나는 영화관에서 비슷한 체험을 하고 왔다. 다니엘 콴(Daniel Kwan, 1988-)과 다니엘 샤이너트(Daniel Scheinert,1987-)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는 멀티버스를 소재로 하는 SF, 액션, 코미디 영화로, 제목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영화의 각 파트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가족의 따뜻함과 타인에 대한 공감,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힘을 발견했다. (그리고 개봉 이후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와 수상 경력을 생각하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이를 고대 그리스 희극과의 연관성을 통해 이 영화의 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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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오프닝 스퀸스 중, 출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캡처. |
(도 2) 오프닝 스퀸스 중, 출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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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감독들은 SF 장르를 선택해 과감한 연출법을 펼치며 수 없이 팽창하는 ‘멀티버스’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극중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수 많은 경우의 수 만큼 내가 발 딛은 다중우주로 분화하며, 그 속에서의 ‘나’는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거품우주론을 표현한 것이다. 거품우주 세계관 덕분에 영화는 ‘모든 것', ‘어디에나', ‘한꺼번에'라는 영화의 세 파트의 구현할 수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 주인공 에블린 왕은 모든 ‘나'를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의미심장한 오프닝 스퀀스로 시작된다. 거울을 가운데 둔 와이드 샷은 점점 클로즈업 되며, 잔잔한 배경 음악에서 위기감이 느껴지는 음악이 중첩된다(도 1). 그러다 한 순간에 샷의 움직임과 음악이 멈춘다. 이내 밤에서 낮으로 시간대가 바뀌고, 에블린이 분주하게 세금 조사를 대비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는 모습이 거울 안을 비추며 카메라가 거울을 통과하듯 영화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도 2). 이처럼 우리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수 많은 ‘둥근'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방금 소개한 ‘둥근 거울', 다중 우주를 옮겨 다니는 장치 속에서 구현되는 동그란 거품 모양의 ‘거품우주’, 이후 흑화한 딸 조이의 또 다른 이름인 조부 투파키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올려서 만들었다는 ‘에브리띵 베이글', 그 딸을 구원하기 위해 에블린이 사용하는 가장 다정한 무기인 ‘장난감 눈알'(도 3). 익살스럽고 장난스러운 모티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파멸을 몰고 올 블랙홀인 ‘에브리띵 베이글'이자, 결국 세상의 악인 조부 투파키를 구원하고 딸 조이를 구원할 히어로이자 엄마인 에블린의 무기, ‘장난감 눈알’ 이기도 하다. 이 둘의 ‘둥근’ 속성 말고도 주목해야할 점은 ‘베이글'이 안이 뻥 뚫린 형태인 반면에, ‘눈알'은 안에 채워진 형태라는 점이다. 에블린이 조이를 구원할 때 행하는 ‘포옹'은 히어로-악인, 그리고 엄마-딸의 ‘포옹’이자, 서로를 채워줄 두 주체의 만남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도 4).
이 둘의 유사성 말고도 ‘둥근 거울'과 ‘거품 우주' 또한 서로를 양면처럼 기능한다. 거품 우주 세계관에서 다중 우주를 넘나든다는 것은, 앞서 기술했듯 한 주체가 살아가는 고유한 시간대를 공유한다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수 많은 우주에서 에블린은 하나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나의 가능성-내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에서 거울을 활용해 다중우주 속 나를 표현한다. 다중 우주를 넘나드는 기술 “버스 점프(Verse jump)”는 에블린이 천재 과학자인 또다른 우주에서 고안해낸 기술로, 위대한 기술 이면에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분열이다. 우주를 넘나들며 수 많은 나를 조우하게 되면,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에 한계를 맞이해 결국 자아가 분열되고 만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에블린이 무리해서 수 많은 우주를 건너 다니다 한계를 맞이할 때, 거울이 깨지며 그 파편의 수만큼 에블린이 분화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둥근 거울이 깨지며 수 많은 우주의 나를 담아내듯이, 반대로 생각하면 이미 수 많은 우주를 품고 있는 것은 우리를 비추는 하나의 이 거울이라는 얘기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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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에블린의 다정한 힘을 상징하는 눈알, 출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메인 예고편 캡처. |
(도 4)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포옹, 출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메인 예고편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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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이 영화에서 익살스러운 모티브(심지어 성적인 코드까지)와 평범한 인물들이 결국은 ‘포옹'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평화로운 결말에서 고대 희극 축제와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재미있는 점은 이 유사성을 발견한 계기이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분명히 2시간 30분이란 러닝타임을 알고 갔는데, 1시간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엔딩크레딧이 한동안 올라간 것이다. 영화에 몰입하던 차에 뜬금없이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으로 인해 나뿐만 아니라 일행도, 같은 영화관 안에 있던 사람들도 당황하여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조차 감독의 영화적 장치였다. 영화는 제목대로 3부작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를 영화를 마칠 때 올라가는 표지인 ‘엔딩크레딧'과 영화가 시작될 때 보여주는 ‘영화 제목'이란 고정된 영화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장치 덕에 한번 숨을 돌리고 다시 영화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또한 영화관에서 같이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도 당황스러웠던 순간을 갈무리하고-긴장했던 몸을 풀며-이윽고 영화에 다시 빠져드는 같은 정동(affect)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효과가 마치 고대 그리스 희극의 고유한 특징인 ‘파라바시스'와 같다고 느껴졌다. 극의 진행 도중에 갑작스럽게 극의 형식을 멈췄을 때, 경연장에서 관객이 다같이 경험했던 강렬한 정동의 공유를 통해 다시 극이 시작했을 때 극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던 게 아닐까? 또한,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인 ‘원형'은 서로가 합쳐졌을 때 완전하게 만들어지고, 한 거울 안에 온 우주가 다 담긴다는 점에서 결국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까지 영화 속에 끌어당기는 구멍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 많은 원형의 모티브들이 포옹으로 합쳐지는 순간에 생성되는 영화의 메세지는 그 순간 영화에 생성된 구멍을 타고 나를 직접적으로 찌르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영화와 나의 경계를 잠시 무화시키는 역할로 작용하여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진한 여운을 주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를 깨닫는 순간, 표면적으로만 다가왔던 고대 그리스 경연장의 열기가 내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전쟁이란 힘듦을 공유하고 있었던 아테네 시민들이 이 정치 풍자극을 얼마나 재미있게 보았을 지, 파라바시스 구간에서 코로스와 함께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 지, 그리고 집에 가며 이 전쟁을 마치는 게 얼마나 이로울 지 곰곰이 생각해봤을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가 만들어낸 구멍 속에서 빠져나온 후, 여운에 잠겨 영화관에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삼삼오오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자리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마음 속에 피어났고, 결국 그 마음을 글로 표현하게 되었다. 정말 기쁜 것은 이 감동을 나만 느낀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다는 증거로 제 95회 아카데미상에서 7개의 부분을 석권한 것이다. 그 가운데 주요 출연자와 감독이 아시아계였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여성이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점 또한 역사적이다. 이러한 사실 또한 마치 그리스의 축제의 마지막 날 이뤄졌던 희극 축제에서 평화로운 메세지를 설파했던 아리스토파네스의 수상의 영예를 보는 것과 같았다. 오늘날의 축제이자 경연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한 작품들-비극적인 성격도 있을 것이다.-가운데 평범한 사람이 ‘사랑’을 위해 무한한 힘을 갖고 ‘포옹'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메세지가 상을 석권했다는 사실은 아직은 살만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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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혜진, 「고대 아테네에서 축제 기억하기-리시크라테스의 후원 기념물 사례 연구」, 『미술사학』 36 (2018): 7.
2) 아르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천병희 역, (숲, 2010), 272-273. 이 작품은 기원전 425년 레나이아 제의 희극 경연에서 우승한 작품이며, 아리스토파네스의 현존 희극 가운데 맨 먼저 공연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 지 6년이 지나자 농토는 황폐해지고, 피난민들이 득실대는 도시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식료품이 모자라 고생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아테나이 서북쪽에 자리 잡은 아카르나이 구역 주민들은 농토를 적군에게 거듭 약탈당하는 바람에 특히 고생이 심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극이 시작되면 앗티케 농부 디카이오폴리스가 그 옛날 평화로웠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민회가 열리기를 기다린다. 스파르테와 개인적으로 휴전조약을 체결한 디카이오폴리스는 호전적인 아카르나이 구역민들(코로스choros)에게 배신자로 처형당할 뻔한다. 아테나이의 호전적인 장군 라마코스를 포함하여 코로스는 디카이오폴리스와 전쟁과 평화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3) 김혜진, 10. 대 디오니시아 축제는 겨울부터 3월까지 포도주와 수확의 신 디오니시아를 숭배하는 제의이기도 했다. 연속된 축제들은 겨울철 농한기 동안의 얼어붙어 잠들어 있는 땅을 깨우고 달래며, 봄에 시작되는 농번기를 무사히 보내고, 가을철 수학기에는 풍성한 수확을 얻기를 기원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이를 위해 시민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 혹은 풍요와 대지의 여신인 테메테르를 성적으로 자극하여 풍요로운 생산력을 끌어내려는 목적으로 축제 기간동안 남근과 성적인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축제가 시작되면 아테네 사람들이 디오니소스 엘레우테레오스의 신상을 앞에서 행렬(pompe)에 참여했다. 이 행렬에 일군의 남성들은 나무로 조각된 남근상들(phalloi)를 들고 행렬에 동참했다. 흥분한 여신이 오르가즘 상태에서 숱한 열매와 곡식을 쏟아내리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희극에서 성적인 내용은 풍요를 기원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며, 삶을 긍정한다는 메시지로도 읽어낼 수 있다.
4)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 박용준 역, (글항아리, 2019), 407.
5) 앞의 책, 407.
6) 앞의 책, 408. 희극이든 비극이든 연극은 스타일뿐만 아니라 메시지로도 평가되었고, 중요한 기준은 시민의 묘사와 교훈이었다. … 공연은 진한 감정을 표출하는 기회였다. 관객에게 강렬한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예컨대 연극의 비극적 사건에 충격받아 임신부 관객이 갑자기 진통을 느낀 경우도 있었다) 이야기가 가득했다. 이러한 감정은 숙의와 논의를 기초로 한다는 민주주의 개념에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감정들은 정치적 토론을 위한 중요한 정보로 여겨졌다.
7) 류재국, 「아리스토파네스 3대 평화극에 나타난 평화관-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평화, 뤼시스트라테를 중심으로」,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39 (2018): 37. 각주 14번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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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서늘한 비극의 윤리: <어둠 속의 댄서>의 하마르티아
박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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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어둠 속의 댄서> 재개봉 포스터, 2019. 출처: 다음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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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식화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면, 덴마크 출신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1956-)의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2000)는 비극적인(tragic) 영화이나 비극 다운(tragedy) 영화는 아니라 할 수 있겠다(도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은 등장인물이 개연성과 필연성에 따라 말과 행동을 전개할 때 비로소 보편성을 지닌다.1) 인물과 스토리라인이 수긍 가능할 때 청중은 등장인물의 비극적 운명을 두고 연민(eleos)과 공포(phobos)를 느끼고, 이러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부여하는 것이 비극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연민은 누군가 겪어 마땅찮은 재난을 겪는 것을 목격할 때 생겨나며, 공포는 우리와 유사한 사람이 재난을 겪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2) 그렇기에 ‘남다른 덕성을 가진(epieikēs)’ 이상적 인물의 불운은 윤리적 측면에서 비극의 구조로 채택될 수 없다. 가장 고결한 자의 행복 추구조차 허무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도덕적 중간자인 청중에게는 도덕적 불쾌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3)
<어둠 속의 댄서>의 전반부는 이러한 비극의 규칙을 순순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 셀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사운드 오브 뮤지컬’ 류의 노래를 부르는 순수한 인물이자, 싱글 맘으로서 언제나 아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이유도 자신과 똑같이 시력이 퇴화중인 아들 진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눈이 점점 멀어가도, 직장에서 해고되었을 때에도, 진의 수술비 전부를 훔쳐간 이웃인 경찰관 빌이 차라리 자신을 총으로 죽여달라 애원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살해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서 비극의 파토스(pathos)는 점진적으로 고조된다.
그러나 그녀의 윤리적 불가해함은 자신의 치부를 비밀로 해달라는 빌과의 약속을 자신이 사형을 당한다 해도 끝까지 지켜내면서부터 드러난다. 재심과 집행유예를 통해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녀는 스스로 이를 거부하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자신의 변호사비와 진의 수술비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 주저하지 않고 아들의 수술비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셀마의 죽음을 불사하는 아들을 향한 무조건적 희생은 마치 순교자를 연상시킬 정도다. 형이 집행되는 날에도 그녀는 사형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음악 삼아 노래를 부르지만, 그녀의 노래는 교수형이 집행되고서야 비로소 멈춘다(도 2). 고결한 자의 윤리적 선택과 이를 비웃는 듯한 가장 잔인한 결말.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어둠 속의 댄서>는 오히려 끔찍하고 역겨운 감정을 유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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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셀마가 사형 집행 중 <107 Steps>를 부르는 장면, <어둠 속의 댄서> 스틸컷,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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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비극의 주인공은 선한 인물이나, 어떠한 중대한 착오나 실수인 ‘하마르티아(harmartia)’를 통해 비극적 운명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독해로 <어둠 속의 댄서>를 읽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셀마의 실수는 빌을 살해해 버린 것, 그 이후에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할 의지가 없이 불행을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하마르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약성서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본래 구원을 위한 원죄라는 의미를 지녔다.4) 그렇다면 셀마의 실수는 궁극적으로 아들 진을 잉태하고 출산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분명 영화 전반에는 셀마가 진에게 가진 죄책감과 책임감이 드러난다. 기찻길에서 그녀가 부르는 <I've Seen It All>은, 자신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으니 이제 진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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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seen it all, I've seen the dark 난 모든걸 보았어요, 어둠도 보았고 I've seen the brightness in one little spark 작은 섬광의 번쩍임도 보았어요 I've seen what I chose and I've seen what I need 내가 선택한 것도 보았고 내가 원하는 것도 보았어요 And that is enough, to want more would be greed 그거면 충분하죠, 더 원한다면 그건 욕심이죠 I've seen what I was and I know what I'll be 나는 내가 어땠는지 보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아요 I've seen it all, there is no more to see 난 모든 걸 보았으니, 더 이상 보아야 할 건 없어요
Björk, <I've Seen It All>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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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모성에는 어딘가 기이한 데가 있다. 왜 진을 낳았냐는 질문에 가만히 앉아 그를 안아보고 싶어서, 그리고 어머니가 되어보고 싶어 그러했다고 옅은 미소로 답한다. 다시 말해 셀마는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체감하고 싶어 진을 낳았다. 그런데 셀마는 진을 끔찍이 여기면서도 ‘진은 눈 수술보다 어머니인 셀마 당신이 필요하다’는 충고에는 악을 쓰며 반박한다. 마치 이제는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스 비극의 하마르티아가 그 원인을 주인공 자신의 행위에 두는 반면, 성서의 하마르티아는 주인공 자신의 행위 바깥에 둔다. 그러니 셀마의 하마르티아는 준비도 안된 채 진을 덜컥 잉태하고 출산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이 아이를 낳아 그가 자라 또다른 인간을 잉태하고 자신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굴레 - 다시 말해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인간의 삶이 원죄이며 그것이 비극의 모든 원인이라면, 비극은 죽음으로서 해소된다. 그래서 셀마는 원죄의 고리를 풀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이 포기는 윤리적 차원과 삶의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셀마는 죽음으로서 원죄를 해소하고 탈인간적 존재,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니 청중에게 <어둠 속의 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숭고의 영역에 남은 영화가 되었지만, 셀마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자신에게 펼쳐진 비극의 파토스를 승화시키고 떠나간 것이다. 청중이 알 수 없는 실재의 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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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15.
2) 권혁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적 비극과 ‘하마르티아’」, 『서양고전학연구』 58:2 (2019): 256.
3) 권혁성, 위의 논문, 257.
4) 박형철, 「성서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나는 인간 실존 단어들에 대한 비교 연구: ϋβρις, άμαρτία, θάνατος, φόβος 를 중심으로」, 『성경원문연구』 38 (2016):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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