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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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세 번째 뉴스레터] Found object, Pound object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세 번째 레터는 두 명의 예술가에 대한 글이다. 인도의 쉴라 고우다와 한국의 류성실은 작품(object)을 통해 현실을 발견(found)하고 자본주의(pound)를 폭로한다. 추상과 허구를 가로질러 이들은 다시금 현실에 닻을 내리고 현시대에 만연한 허위의식의 표상들을 끌어올린다.
[①쉴라 고우다 작가 비평] 쉴라 고우다(Sheela Gowda)의 발견과 실천
[②류성실 작가 비평] 동시대 블랙코미디 미술, 류성실 작품 속 기술적 이미지와 스펙타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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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라 고우다(Sheela Gowda)의 발견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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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라 고우다의 작품은 그것이 가지는 미학을 넘어서서, 작품의 재료를 말미암아 더 넓은 문화적, 경제적 현실과 예술가의 공고한 조형적 언어를 고려하도록 유도한다.” 1)
-큐레이터 실비아 차이(Sylvia Tsai)-
쉴라 고우다(Sheela Gowda, 1957-)는 인도 태생의 작가로 자국의 일상생활의 경험에 뿌리를 두어, 현대 도시 및 경제 변화와 함께 의식 또는 미신이 공존하는 인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시의성 있는 이미지(작품)로 환원해 우리를 보다 넓은 사유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고우다가 주변의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동안에 그녀 안에서 만들어진 개인적인 감정들은 그녀의 작업에 굉장한 활력이자 동기가 되어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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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Darkroom, 콜타르 드럼통, 가변 크기,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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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쉴라 고우다의 작품의 몇가지 특징 중 한눈에 들어오는 독특함은 바로 조형성이다. 작품의 조형성을 이루는 데에 가시적으로 큰 기여를 하는 건 단연코 재료가 갖는 물질성일 것이다. 고우다가 선택한 주된 재료는 금속 시트, 머리카락, 자동차 범퍼, 소똥과 같이 인도의 문화권 내에서 익숙하고도 ‘일상적’ 혹은 ‘전통적’인 물체(Found object)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감정과 이를 투영해내고자 작가에 의해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선택된 재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를 포함하는 내러티브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재료의 물성에 대한 근본적인 기대감을 깨고 작가의 손을 거쳐 상상할 수 없는 결과물로 연출되는 것은 그녀의 대규모 설치작업들이 결코 적절한 재료를 만나 우연하게 탄생한 빛좋은 개살구가 아님을 짐작 가능케한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를 사로잡는 고우다의 예술의 핵심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인도의 이야기가 우리 눈 앞에 현시되는 듯함을 느낄 것이다.
DarkRoom(2006)은 2005년에 이미 인구가 9천3백만 명에 달했던 인도에서 노동 인부들의 임시거처로 지어졌던 빈민가의 건축 양식을 재현한다(도 1).2) 이 작은 오두막집은 인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녹슨 콜타르 드럼통(석탄을 건류할 때 쓰임)으로 제작되었다. 관람객들은 앞쪽의 낮은 출입구를 통해 내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다. 외부에서는 그저 도시의 빈민가에 위치한 작고 임시성(집으로 생각할 수 없는)이 강한 집이지만 고우다는 이곳에 드럼통의 꼭대기에 빛이 들어오게끔 구멍을 뚫어, 별들이 마치 어둡고 창문이 없는 방에 희망과 열망을 가져다주는 듯한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재현을 위해 쓰인 재료(콜타르 드럼통)는 일종의 개발 도상국의 흔한 자원 부족과 경제적 박탈감 등을 암시한다. 현실적이지 않기에 불안정하고, 불쾌한 이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터전이며 몸을 놓이게 해주는 절실한 공간이다. 이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을 단순히 빈 깡통으로 보는 것은 고우다의 작품을 직면하기 전일 것이다. 이처럼 고우다는 직접 경험 중인 과정 속에서 독자 스스로의 어떠한 가치의 발견과 그에 따른 일종의 공감, 흥분, 경도 등의 몰입감을 지속하게 만든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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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Behold, 자동차 범퍼와 헤어로프, 가변 크기, 2009, 사진 출처: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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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9년에 테이트 모던에서 선보인 Behold 또한 몰입형의 대규모 설치작품으로, 차 범퍼와 머리카락이라는 일상적 소재가 쓰였다(도 2). 약 20대의 자동차 범퍼와 4킬로미터 길이의 인간의 땋은 머리카락이 함께 매듭지어져 갤러리 벽면, 천장에 매달려져 공간을 확장해 나간다.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두 재료의 ‘대비되는 물성’이라 할 수 있다. 좀처럼 양립될 수 없는 두 물질이 만나게 된 배경에는 인도의 ‘토속신앙’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새차를 사면 고사를 지내는 풍습처럼 인도에서도 예로부터 차사고와 같은 불운을 막기 위해 자동차 범퍼 주위에 인간의 머리카락을 매듭지어 두른다고 한다.
Behold는 일종의 주술적 믿음(미신)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심리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업 시스템과도 엮이는 문제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강철 범퍼는 도시에서 급증하는 차량의 수를, 더 나아가 신(新)차는 경제적 성공에 대한 척도로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가발이라는 자본주의의 산업성을 내비친다.4) 즉 고우다는 자동차 범퍼와 헤어로프로 ‘의식과 세속적인 경제’를, ‘수공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대량 생산된 물건들’을 다시금 연결하고 얽히게 하는 셈이다. 또한 머리카락을 땋고, 매듭짓고, 감아올리는 ‘노동집약적’인 특성은 고우다가 중요시하게 여기는 제료의 물질성을 통한 직관과 이것이 연상시키는 사회와의 직접성을 나타내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육체의 취약성을 지켜 달라는 믿음 속에서 한 땀씩 땋아지는 노동의 결실은 ‘생명’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위해 인도의 사회가 점차 보편적인 가치보다 속세의 한시적 가치를 중심에 두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내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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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What Yet Remains, Bandlis, 가변 크기, 2017, 사진 출처: 봄바스 젠스 홈페이지 |
(도 4) It Stands Fallen + And That Is No Lie, 빨간 천과 철제, 가변 크기, 2015, 사진 출처: 피렐리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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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와 같이 노동집약적인 고우다의 작업스타일은 계속된다. What Yet Remains(2017)에서 고우다는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흔한 산업 재료인 '반들리(Bandlis)'를 선택한다. 반들리로 가득 매워진 직사각형의 공간은 작가에 의해 미감을 올린 예술로서 치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건설 현장 같은 이곳은 산업, 노동, 물질 등 도시 성장에 관한 내러티브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도 3). 전례 없는 도시 성장의 중요한 요소는 주택과 고층 빌딩의 건설이다. 우리는 도시 현장에서 축조되는 건물들을 보지만 아무도 그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당장에 내 삶이 우선돼야 마땅하기에 이러한 관심이 오히려 사치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치에 대한 시선과 판단을 어디까지 유예시킬 것인가? 고우다는 이러한 급속한 발전과 통제되지 않는 도시화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고 있으며, 이 도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질문들로 삶의 저편에 내던져진 본질적인 얘기들을 다시금 재고토록 한다.
결국 고우다의 눈길이 닿는 곳은 대부분 다른 이면에서 소외된 계층이 속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It Stands Fallen과 And That Is No Lie를 합친 대규모 설치작품은 2019년에 밀라노 피렐리(Pirelli HangarBicocca)에서 열린 개인전의 입구를 장식하였다.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빨간 천은 ‘샤미아나(Shamiana)’ 또는 ‘판달(Pandal)’로 알려진 인도의 전통 텐트 천을 이용한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는 빨간색의 강렬함과 이것이 철제와 연결된 방식, Behold와 유사하게 ‘대비되는 물성’을 병치한 구성은 기존 작업방식보다 훨씬 많은 정보들을 제공하는 듯 하다. 고우다는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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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빨간색은 옆에 있는 다른 요소들과 관련하여 읽혀져야 한다. 분명한 것은 빨간색이 전 세계를 둘러싼 ‘노동조합’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관한 메시지로만 읽힐까 봐 관객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나는 다른 색상의 천도 조금씩 첨가하였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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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대로 끈에 연결되어 공중에 떠 있으면서 일부는 찢기고 널브러진 빨간 천은 '노동 조합'이라는 단어를 즉각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빨간색이 가진 상징성만이 고우다의 정치적 목소리와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바닥에서 위로 매달린 형태의 빨간 캐노피는 ‘붕괴와 상승(It Stands Fallen)’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다이내믹한 구성 방식의 요소 하나 하나가 의미로 이어지고 우리를 작업에 결부된 서사의 한줄기를 읽게 한다. 물론 고우다의 추상적인 구현 방식이 작품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구체적인 사건 또는 뚜렷한 메세지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일단 이 공간에 들어서게 되면, 작가가 심어둔 개인적 깨달음과 사유를 통해 사회현실에 반응하며 번민하기도, 낙관하기도 할 것이며 적어도 일종의 감성에 자극받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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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우다의 작품들은 (어떠한) 가치를 위한 '발견과 실천’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이 갖추는 완결성은 고우다의 작업적 영감에서부터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사이사이마다 영향을 끼치는 크고 작은 부분들까지 연결되고 맺어져서 이룩된다. 다시 말해 고우다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재로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간과되어왔던 일’들에 많은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고우다가 투영해 내는 보편적 가치에 관한 쟁점이 궁극적으로 이 시대에 얼만큼 보편타당하고 절실한 것인지는 필자 또한 구체적인 진단을 내리기보다 고우다의 작품을 경험하고 생각하는 혹자에게 유보하고 싶다.
하지만 쉴라 고우다는 비극과 고난으로부터 DarkRoom과 같은 작품으로 그녀만의 조화로운 탈출구를 만들기도, Behold를 통해 동시대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자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로부터 믿음을 만들어내기도, 이의 연장선상으로 여러 시의성에 맞는 이슈들을 잇는 It Stands Fallen + And That Is No Lie을 창조해내기도 하였다. 발 빠르게 변화하는 삶 속에서 어쩌면 쉴라 고우다의 작품들이 담지하는 보편적 가치와 자국의 문화, 전통, 사건 등은 진부하거나 우리의 삶과 유리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절대 남의 나라, 남의 얘기처럼만 전달되지 않는다. 그가 예술가로서 가진 가장 큰 능력은 일상의 재료들을 통해 우리 모두의 얘기로 환원되는 논쟁거리들을 다시금 생산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다른 이들이 쉽게 지나치게 되는 순간들을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질문하고, 하나의 쟁점을 달성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공간은 그 쟁점을 자유롭게 사색하고 사유하기만 하면 되는 공간이다. 얼마나 개꿀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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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tAsiaPacific’이라는 아시아, 태평양 및 중동에 속하는 67개 국가의 현대 미술과 문화를 다루는 잡지(정기간행물) 사이트에서 큐레이터인 실비아 차이(Sylvia Tsai)는 2015년 그녀의 기고문에서 쉴라 고우다를 소개한 바 있다.2) 실제로 쉴라 고우다가 살고 있는 카르나타카 주에는 총 약 2,000개에서 862개의 빈민가가 즐비해 있다고 한다. Anthony Downey, “Where to Now: Imminent Impermanence in the Work of Sheela Gowda”, catalogue published on the occasion of Sheela Gowda, (2017): 29-31.3) 도로 위에서 임시 주거지에서 살았던 노동자들은 그 위에 의복과 취사도구라는 기본 소지품을 쌓아두고, 안은 웅크린 자세로 잠을 청하였다고 한다. 고우다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정착한 도로 노동자들의 임시 주거지를 본 후, 그것을 만들기 위해 타르 드럼통을 평평하게 펴는 등 제작에 매료되었다. 쉴라 고우다는 작품에 대해, “보호소의 내부는 저에게 하나의 이미지였고, 계속 인상 깊게 남아있었어요. 저는 소재가 공간을 정의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고, 제 작품에 이것을 반영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Sheela Gowda, Christoph Storz, and Suman Gopinath, “Sheela Gowda and Christoph Storz in conversation with Suman Gopinath”, Afterall: A Journal of Art, Context and Enquiry 22 (2009): 50-51.4)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참조, ‘Behold’, Sheela Gowda, 2009 | Tate.5) Gowda, Sheela, Christoph Storz, and Suman Gopinath, 위의 글, 5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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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블랙코미디 미술, 류성실 작품 속 기술적 이미지와 스펙타클
김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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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술적 이미지와 텍스트 읽기
매체에 대한 미학적 성찰과 기술을 바탕으로 예술 이론을 내세운 여러 비평가들이 있다.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은 “모든 미디어는 우리 자신의 확장”이자 “미디어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영향은 우리 하나하나의 확장”이라 주장한다.1) 예술에 있어서 사진과 영상과 같은 기술 매체라는 뉴미디어의 등장은 새롭고 확장된 예술적 가치를 창출해 내면서도 순수예술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제기시켰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기술적 복제 가능성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변화하고 예술작품이 ‘제의 가치(Kultwert)’의 자리를 ‘전시 가치(Ausstellungswert)’가 대체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그의 저명한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5)에서 “아우라 상실”에 대해 논한다. 벤야민은 관람자와 대상(작품) 사이에 카메라라는 기술이 존재하고 우리는 작가가 설정한 간접적인 '체험'을 통한 수동적인 자세를 지닌다는 점을 지적한다.2) 그러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현실과 가상에는 그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가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가상이라고 주장했다.”3) 카메라는 현실의 대상을 주제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며 다양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4) 이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있지만, 이 같은 여러 입장을 고려했을 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입장은 어떠한가? 정답은 없다. 자신의 설정한 ‘예술’이라는 본질에 초점을 두고 다양하게 분석하다 보면 각자의 방식으로 뉴미디어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에 대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20~1991)가 주장한 문화사의 세 가지 단계 중 ‘기술적 이미지(Technisches Bild) 코드의 시대’로 작품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는 “기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상직 복합체로, 이는 텍스트를 의미"하며 “기술적 이미지는 예술, 과학, 정치로 분열되어 있는 텍스트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기술적 영상은 오히려 텍스트에 의해 분열된 세계를 반복”한다고 주장했다.5) 더 나아가 “장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메타적으로 사고하며 유희해야”한다며 “기계적 미디어 속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조명했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술적 이미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해독해야하는 상징이 아니라 세계의 징후”인 것이다. 본 글의 주된 목표는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매체에서 발현되는 기술적 이미지를 통한 텍스트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더불어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텍스트와 징후가 어떠한 흥미로운 방식으로 작품속에 내재되어 있는지 살펴보길 바라는 바이다.
2021년 늦여름, 아는 지인과 점심을 먹고 가로수길 끝자락에 위치한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동시대 미디어아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영상 매체를 통해 텍스트를 사용하여 작가들의 가치관과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오로지 ‘단어’의 나열들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직설적인 특징적 요소를 강조하며 사회에 대한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을 시작으로 바로 다음 마주한 작품은 ‘기발함’에서 ‘당혹스러움’ 이어졌다. 영상 매체 속에 나오는 여성은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메이크업과 왠지 모를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표정을 지으며 ‘핵폭발’과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위한 계좌’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녀가 강조하는 미래, 즉 세계관 속 천국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여러 명의 인물들이 그로테스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작품을 어떻게 읽어내고 받아들여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작품의 화면 왼쪽 하단에는 ‘천국으로 가는 좌표’라 일컫으며 ‘BJ 체리장’이라고 하는 인물의 계좌가 적혀있었고, 작품 속 주인공 ‘BJ 체리장’은 1인 미디어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를 보고 ‘진입 장벽이 낮은 동시대 1인 미디어 매체에서 발생하는 여러 자본주의 태세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는 희극적 작품이구나.’라는 짐작과 신선한 충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필자에게는 너무나도 인상깊게 와닿은 그 작품이 종종 떠올라 인터넷에 작가를 검색했다.
마주한 키워드는 ‘서울대학교 천재 화가’였다. 이 수식어는 필자에게 ‘요즘은 어떤 작품이 천재라고 일컬어 지는걸까?'라는 의문점에서 '어떤 요소와 매력들로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나’ 라는 호기심으로 변모되었다. 그녀의 대표 작품들 속에서 ‘체리장’이라는 주인공의 내러티브가 담긴 영상 작품들이 나열되어있는 유튜브 영상 플랫폼을 통해 대중들의 평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댓글에서는 그녀의 가상 세계관이 이미 실존하듯 상황극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심지어 댓글의 좋아요는 2천명이 넘었다), 그녀의 전시를 보고 왔을 당시에는 작품의 구성, 컨셉, 디테일한 부분들 모두가 인상적이고 훌륭했다는 대중들의 평가도 자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괴하고 무섭기도 한데 자꾸만 보게 된다는 중독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할 포스터(Hal Foster)가 언급한 “불확실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 다양한 매체와 형식들로 하나로 묶어지지 않는 동시대 미술” 속 류성실이라는 작가와 그녀의 작품 속 직접적인 기호와 텍스트들을 어떤 동시대의 흐름과 미술사적 가치로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6) 그러던 중 그녀가 작년 ‘제19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수상하여 올해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녀는 에르메스 재단 수상자 중 역사상 최연소였고, 작년에 열린 프리즈에서는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에게 인상적인 작가로 언급되기도 했다.7) 현재 여러 패션 및 예술 잡지에서도 그녀의 작품과 그녀에 대한 인터뷰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본 글을 통해 동시대가 주목한 그녀의 작품들과 ≪불타는 사랑의 노래≫(2022) 전시를 살펴보며 그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동시대의 미술계의 특징적 요소에서 비롯된 미디어아트의 미술사적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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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BJ 체리장 2018.04>, Video, Color, Sound, 6min, 2022, 영상 출처: 류성실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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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J체리장 그녀는 누구인가 - 류성실 작품 내러티브
BJ 체리장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첫 번째 영상 작품은 <BJ 체리장 2018.04>(2018)이다(도 1).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화면 속 상황은 혼란스럽고 다급하며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화면 여러 곳에 배치된 텍스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작품에서 BJ 체리장은 현재 핵폭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니 모두가 천국으로 대피해야하며, 천국으로 대피하기 위해서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리장은 ‘일등시민권’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늦었다고 고지하고 경고한다. 화면 속 BJ 체리장에게는 일반 시민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초월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있는 듯 하다.
체리장은 영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오빠들’이라고 칭한다. 영상 속 이미지를 보아 동시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1인 미디어 방송의 특성인 특정한 기준이나 규범없이 개인의 개성을 살려 자유롭게 개인 컨텐츠를 유통하는 형상을 보여준다. 더불어 그녀는 ‘한민족 평화 통일 홍보대사’, ‘핵미사일 대비 연구 자료’라는 단어를 나열하며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해 연구한 노트를 보여준다. 지구, 핵, 뉴스 등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들어 정보들이 나열되어있고 노트에는 그녀가 수집한 누구나가 알 법하면서도 나름 전문적인 정보를 기꺼이 제공하는 듯 하다. 사실상 이러한 BJ 체리장의 영상 속 '오빠들' 혹은 '핵폭발'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통한 메시지들은 1인 미디어시대의 욕망과 불안을 패러디한다. 더 나아가 BJ 체리장은 화려한 이미지들을 차용한 영상 속 배경과 함께 하얗게 분칠을 하고선 한껏 꾸미고 나와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며 자신의 계좌번호를 띄운다. 이후 체리장의 의문의 죽음과 동시에 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체리장의 배움과 영향 아래 자본주의적 활보를 이어나가는 ‘이대왕’과 그의 비서 ‘나타샤’이다. 이어지는 세계관 속 대왕트래블이라는 가상의 여행 회사 속 사장 이대왕은 ‘추억이 많아야 진정한 부자’라는 노래와 함께 자신의 회사를 홍보한다. 그는 풍부한 자본가가 되기 위한 아이템으로 ‘여행사’를 택했고 ‘대왕트래블’이라는 기업이 탄생시킨다. 대왕트래블이라는 세계관 속 <칭첸 맛보기 투어>(2019)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홍보영상과 유사하며 실제로 어르신 분들이 관광 하는 모습을 패러디 한다. 모바일로 진행되는 본 영상작품의 상단 위의 <광고>는 인터넷에서 흔히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피상적 자본주의적인 양상을 떠올린다. 고작 티켓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 한 점은 구매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듯한 느낌을 주듯 화려하면서도 소위 B급 감성을 보여주는 영상과 같은 장면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소위 흔히들 말하는 짝퉁 혹은 싸구려 관광 상품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이 이어지는 각각의 세계관들은 ‘한국 사회’와 ‘자본’이 만났을 때 펼쳐지는 모순들과 기이한 현상을 여러 세계관으로 구현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어 어떤 주제와 메시지를 의미하는지 계속해서 재고하게 만든다. 연이어 이대왕은 위대한 자본가라는 체리장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애완견 장례식'을 고안해낸다. 류성실 작가의 세계관 속에서 체리장의 자본주의 정신을 누구보다 진취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자본가 이대왕의 다음 사업을 살펴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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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The Burning Love Song, mixed media, variable installation, 2022, 사진 출처: 류성실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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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타는 사랑의 노래≫(2022) 전시에 관한 소고
작품의 제목은 왜 <불타는 사랑의 노래>일까. 작가의 말을 듣기 전 전시에 관한 내용을 들은 다음 각자 한번 이유를 추론해보길 권장한다. 이대왕의 다음 사업인 애완견 장례 사업을 보기위해 전시장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화환들이 관객을 환영한다. 화환이 사람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사람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마치 폭력배가 형님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입장하자마자 꽃을 의인화한 모습은 인간과 비슷한 키와 자세로 설정되어 왠지 모를 언캐니한 위압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다음 구간에는 마치 화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형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강아지들의 화장 순서와 진행 상황이 나와 있다. 관람자(혹은 이 곳에서 우린 조문객이 된다)는 밝은 조명아래 상반되는 암울한 상황을 동시에 마주한 채 전시장을 들어서게 된다. 그 곳은 실제 화장터를 연상케 하는 대리석으로 된 벽조 건축물과 한 가운데 영상 매체가 재생되고 있다(도 2). 여기서 관람객은 전시장 안에 설치된 거대한 담장을 마주하여 장례식의 조문객이 되고 관람객은 작품의 일부가 되며 영상속 매체는 관람객에게 경험적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영상에서 애완견의 화장이 시작되는 순간 화면에서는 실시간 초 단위를 보여주고 ‘대기’에서 ‘화장중’이라는 단어가 바뀌는 순간 영상 속 애완견 주인은 자신의 애완견인 ‘공주’를 찾고 울부짖으며 애타게 걱정한다. 그러다 강아지는 여행을 하는듯 상황과 밝은 표정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기존의 세계관 속 의문의 이유로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서 애완견을 보살피고 있는 듯한 BJ체리장의 모습과 함께 무사히 도착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이대왕이 준비한 무지개다리는 대왕트래블의 비행을 연상시킨다. 애완견은 “엄마 무사히 잘 도착했어요. 천국의 모습은 너무 좋아요”라며 마치 실제 사람들이 믿는 무지개 다리가 존재하는 것 같은 세계관으로 관람자를 통솔한다. 더불어 무지개다리를 건너 애완견이 만족하는 이대왕이 선보이는 발달된 기술 속 영상물은 신흥 세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아이템의 사업가인 이대왕은 자신이 만든 ‘진짜배기 사랑’이라는 노래를 기타와 함께 연주한다. 마치 주인과 세상 사람들을 위로라도 하는 듯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지점은 분명 견주들의 심금을 울리는 ‘불타는 사랑의 노래’인데, 영상 속 이대왕은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 같이 인상을 쓰고 자세를 잡아 힘껏 폼을 잡고 부르고 있다. 멜로디는 분명 암울하지만 정작 위로를 하는건지 돈을 벌어 기분이 좋은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에는 관람객에게 '진짜배기 사랑'이라는 이대왕이 만든 추도곡 합창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마치 선동을 위한 정치적 상황 혹은 사이비 교도를 연상시킨다. 진지하게 연출된 분위기 속, 진지한 듯 진지하지 못한 주인공 이대왕은 진지함을 위장한 사업가임이 느껴지는 구간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충격적인 장례식 현장을 지나 이대왕의 욕망과 대왕트러블의 자본주의 성향을 포착할 수 있었던 설치작품 뒷면이다.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담장 뒤편엔 대왕트래블(대왕에어)의 빼곡한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도 3). 앞서 애완견 ‘공주’의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른 생을 살 수 있는 하늘나라(이대왕이 선보인 하늘 나라는 마치 BJ 체리장이 강조한 천국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준 탓일까. 혹은 애완견 장례 사업을 전면에 내세워 이대왕의 자본주의적 계략이 숨은 뒷편에 존재한다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이와 같은 안내를 통해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한 교통수단(대왕트래블)을 이용하라는 제안인 것일까. 더 나아가 애완견 장례 사업과 더불어 자신의 또 다른 사업을 홍보하며, 업적을 과시하려는 것일까. 욕망이 다분한 이대왕은 오히려 이 모두를 원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애완견 '공주'가 실제로 BJ 체리장이 돌보고 있는 무지개 다리를 건넌 아름다운 하늘나라가 실존하긴 하는지, 공주가 잘 도착해서 주인을 향한 의사를 직접 보인건지 이대왕이 제작한 괴짜 영상인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지점은 이대왕의 욕망이다. 사람보다 생애주기가 짧고 비교적 회전율이 높은 반려견 장례 사업을 선택한 이대왕의 자본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아이템이라 보여진다.
더불어 죽어서도 자본주의적 성향과 가르침 아래 양상을 이어가는 체리장의 모습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자본주의 문화적 양상을 보여준다. 류성실 작가의 이전 작품이나 SNS에서 세속적인 삶, 조상, 속세에 관한 존재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웠는데 본 전시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속세에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양상들이 내세에도 이어지는 기이한 양상을 이어지는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는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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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The Burning Love Song, mixed media, variable installation, 2022, 사진 출처: 류성실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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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요즘 사람들이 '불멍'을 좋아하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타오르는 불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가 있는데요.
이를 다시 생각하면 뜨거운 열정을 쏟아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불멍, 불구경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이번 전시에 담고 싶었던 것은 불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
그 사람들을 보면서 계산기를 두들기는 또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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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본 전시에 관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불멍'은 요즘 흔히 접하는 단어이다. 현 세대에게 이러한 ‘불멍’은 '힐링'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불멍을 하며 멍을 때리고 불타는 모습을 관조하며 편안함 내지는 안락함을 느낀다. 우리가 불을 바라볼 때 ‘불’자체는 자의적으로 활활 타오른다. 때로는 우리에게 평온하고 안정감을 주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떤 요소에 의해 쓰임과 결이 달라지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원인 모를 불편함'을 단순히 관조할 것이 아니라, 타오르는 속불꽃을 포착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불을 관조할 게 아니라 불을 타오르게 하는 원인과 현상 속 내포된 의미 그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불멍은 우리가 무심코 관조하고 있는 혹은 외면하고 있는, '멍때림'이라는 행동으로 둔갑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양상에서 비롯된 사건과 현상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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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METAPHOR
류성실 작가의 이어지는 작품의 매체 속 이미지는 여러 혼합된 이미지 속 다양한 텍스트를 선보인다. 더불어 류성실 작품은 여러 이미지의 나열과 텍스트의 혼합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텍스트로 묶어 일종의 메타포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캐릭터들의 설정과 전반적인 내러티브는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한국 사회가 가진 소비주의적인 지점과 자극적인 미디어를 생산해 내는 지점이 맞닿아 해학적으로 묘사되었다. 일차원적이고 낙관적인 이미지들로 억측스러운 분위기를 몰고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때문에 류성실의 작품 전달 방식은 파격적이고도 담백하다. 더불어 즐거우면서도 불편하다. 하나의 작품에서 다양한 숨은 의미가 존재하고 각각의 텍스트 사이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에 곱씹어 생각하게 되고 잔상을 남긴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류성실 작가는 ‘천재’라고(대중들의 반응에 따르면). 천재의 기준은 면밀하게 들어가면 한 가지 의미로 정의될 순 없지만, 여러 가상의 인물과 내러티브를 체계적으로 서사하는 동시에 현실 풍자와 작가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교차하면서 획기적이고 뛰어난 전달력을 가진 면에서 동시대 흥미로운 천재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 여러 파격적인 행보들 가운데 차원이 다른 맥락을 선보인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본 작품은 당혹함에서 호기심으로 이끈 원인이기도 하다. 류성실 작품은 동시대 자본주의적 양상을 이미지화하여 욕망과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으며 현대판 소외주의 개념을 일각에 드러내는 스펙타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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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맥루한이 본 내용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Marshall McLuhan, Pour comprendre les média, (Paris, Editions HMH, Ltée, 1968) 65-67, Original title: Understanding Media, (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NY, 1964)에서 살펴볼 수 있다.
2)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7).
4) 질 들뢰즈의 "가능-가상" 혹은 "가상-현실"에 대한 변증법적인 개념은 일상적인 용어로 소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그의 전반적인 철학적 맥락을 살펴보길 권장한다. 더불어 보다 카메라와 뉴미디어에 있어 들뢰즈와 비슷한 맥락에서 참고할 만한 이론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이론을 참고하라. 그는 "현실의 본질"과 "가상의 이미지"를 구분하기 어려워지면서, 가상의 이미지가 본질을 넘어서는 가치를 만들어냄을 시사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미지의 가치에 대해 논한다. 더불어 미디어와 이미지의 관계 속 대중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의 대표적인 논문과 서적인 "사물의 체계 Le Système des objets"(1968) ,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Simulacres et Simulation』(1981), 『소비의 사회 La Société de consommation』(1970) 에서 살펴볼 수 있다.
5) 빌렘 플루서, 『그림의 혁명』,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22-23.
6) 본 내용은 Hal Foster의 글 "Re: Post"의 "(Post) Modernism"장에서 전개된다. Hal Foster, "Re: Post", in Art After Modernism: Rethinking Representation, New York and Boston, 1984.
7) 김하나, 「현대미술은 기술과 융합…서울은 21세기 예술 수도 될 만」, 『매일 경제』, 2022년 9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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