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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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네 번째 뉴스레터] 스타팅 블록: 다섯 번째 블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는 서른 번째 레터부터 서른다섯 번째 레터까지 2022년부터 이어온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x 미술사학과 교류모임 ‘블록메이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스타팅 블록: 비평교류'의 결과물을 발행한다. 앞서 에포케 레테는 2023년 비평 교류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두 차례 레터를 발행한 바 있다. 2024년에는 외부 기고의 형식으로 비평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평가 x 작가로 이뤄진 15팀의 비평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에포케 레테는 비평가와 작가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비평 교류를 지지하며, 향후 다양한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포케 레테 x 블록메이트* 기획: 최은총 진행: 김수홍
* 이 글들은 2024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2024.04.24(수) - 04.28(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그림 위에서 핥고, 쓰다듬고, 마구 뒤섞어보기] 박혜정 비평가 x 금소현 작가
[② 빛살을 가르고 눈에 닿은 색의 조각을 맞추는] 방경지 비평가 x 구유빈 작가
[③ 이준희 2024 신작에 부쳐] 이수빈 비평가 x 이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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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위에서 핥고, 쓰다듬고, 마구 뒤섞어보기
박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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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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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소현을 ‘이미지 수집가’라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작업 노트를 통해 가질 수 없는 대상과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유욕으로부터 작업이 출발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미지 수집은 욕망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소유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느껴지는 괴리를 해갈하는 방법으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작업에는 촘촘한 이미지의 더미나 집요한 묘사 등 수집벽을 내포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았다. 한정적인 소재를 다루고 이를 넓은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가의 표현 방식 역시도 수집가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듯하다. 그럼에도 디지털 이미지의 특징을 반영한 표현과 다루는 소재들을 살펴보면 그가 이미지에 주안점을 두고 탐구하는 것을 작업의 목표로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금소현은 이미지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이 질문을 풀이하기 위해서 그가 다루는 이미지의 배경이 되는 ‘아이돌 팬덤 문화’를 알고 금소현의 지난 경력을, 정확히는 아이돌 팬으로서의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금소현과 나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 남자 아이돌 그룹을 함께 사랑하는 동시에 달리 사랑했다. 나는 원전(canon)에서 남긴 힌트를 이어가며 세계관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좇고, 멤버를 수행적 존재로 바라보는 팬이었다. 반면 금소현은 소속사나 잡지사에서 발표한 사진 또는 홈페이지 마스터들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촬영하고 유통하는 사진, 소셜미디어를 수놓는 팬아트, 앨범에서 랜덤으로 나오는 포토카드, 포토카드를 볼 때의 뇌파를 측정해 만드는 용도 미상의 액체, 또 그것을 포토카드와 함께 촬영해 게시하는 사진 등에 관심을 두었다. 이처럼 그는 원전이 제공하는 이미지와 팬이 파생시킨 또 다른 이미지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실존하는 한 명의 인간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와의 유사도에 호기심을 가지는 팬이었다. 나아가 그는 팬덤 내부의 이미지를 조망한 뒤, 그중에 가장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것을 선별하고 재해석해 행사를 기획하고 굿즈를 유통하는 기획자형 팬이었다. 금소현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선별, 유통, 재해석하는 것에 목적을 둔 ‘이미지 운용자’에 가깝다.
가상의 아이돌인 ‘카이틀즈(Kaitrls)’를 소재로 한 시리즈에서 카이틀즈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2023년 개인전 《I×doll》(갤러리 자유)에서 발표된 이 시리즈로부터 카이틀즈의 구체적인 컨셉과 멤버 구성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참고 이미지). 카이틀즈는 아이돌 팬덤 내에서 이미지가 유통, 재생산되는 방식을 환기하는 장으로서 존재한다. 작가는 반-실사에 가까운 표현부터 SD(Super Deformed) 캐릭터화까지 데포르메의 점진적인 단계를 한 공간 안에서 보여준다. 카이틀즈는 벡터 이미지와 픽셀 이미지를 넘나들며 등장하고, 그림 안의 다마고치와 오락기 등의 소재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운용하려는 작가의 욕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즉, 카이틀즈는 작가가 팬으로서 목도한 이미지의 생성과 변이 과정을 풀이하는 이미지 게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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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미지) 《I x DOLL》(2023, 갤러리 자유)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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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미지) 《I x DOLL》(2023, 갤러리 자유) 전시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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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신작은 금소현의 이미지 게임이 시도되는 장이 변화함을 보여준다는 특징을 가진다. 작가는 카이틀즈 시리즈에서 회화를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하기보다는 전시 공간 내에서 연동시키고 이미지의 변주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는데, 〈네버엔딩 홀리데이〉와 〈기념일을 기념하는 방법〉 시리즈를 작업하면서는 회화 내부로 새로운 서버를 연다(도 1, 2). 첫 번째 개인전을 마무리하고 작가는 한 문화권 내의 행사와 명절에서 특정한 이미지가 기호가 되어 의미를 전달하는 현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담아낸 〈네버엔딩 홀리데이〉는 4면으로 구성된 회화 작업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레이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카이틀즈 시리즈는 일러스트의 문법이 인용되어 붓질의 흔적과 회화의 겹이 최소화되었는데, 이 그림에서는 서너 겹의 레이어가 구분된 채로 나타난다. 작가는 빠른 붓질과 큰 획으로 트리의 형상을 그려낸 면 위에 트리의 형상을 한 겹 더 추가하고, 그 위에 오너먼트가 그려진 면을 쌓아내 그림을 완성했다. 레이어의 등장에 따라 색채에도 큰 변화가 엿보인다. 위층을 차지하는 레이어는 실제 대상과 가까운 색으로 구성되어 트리는 비리디안 톤의 초록색으로, 오너먼트는 낮은 명도와 높은 채도의 빨간색으로 표현되었다. 반면 지지체의 가까이에는 옅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얇고 투명한 레이어가 형성되어 인공적인 안료를 사용한 물감 특유의 상업적인 색감이 드러난다. 레이어별로 색감을 구분하고 또 전체적인 화면에서 충돌하게끔 하는 것은 작가가 전작부터 이어온 이미지 운용의 또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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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금소현, <네버엔딩 홀리데이>, 2024, oil on canvas, 각 91 x 91cm |
(도 2) 금소현, <기념일을 기념하는 방법>, 2024, oil on canvas, 91 x 9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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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엔딩 홀리데이〉의 오너먼트는 온전한 형태로 그려지지 않고 이미지의 일부가 손상되거나 재현에서 누락된 것처럼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효과는 작가의 스케치 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금소현은 1차 스케치를 진행할 때 포토샵을 사용한다. 먼저 자신이 촬영한 사진 1-2장을 불러오고 자동선택 도구를 활용해 유사한 색상이 있는 부분을 추출한다. 다음으로 이를 복사해 여러 겹을 만든 뒤, 색을 바꿔가며 쌓아낸다. 스케치를 마치면 포토샵의 레이어를 껐다 켜 가면서 캔버스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독특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포토샵이 여러 이미지를 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지를 디지털 이미지로 분해하고 레이어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가 그림의 일부를 픽셀 이미지로 그려낼 때 픽셀을 기본 단위로 하는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맨눈으로 변환해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컴퓨터의 제안을 수용하는 동시에 거침없이 변형하고, 또 컴퓨터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디지털 이미지처럼 그려내는 작업 과정으로부터도 이미지 운영자로서의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카이틀즈의 활동 중단을 알리는 것처럼 〈기념일을 기념하는 방법〉 시리즈는 2023년 개인전에서 작가가 받은 꽃다발을 대상으로 삼으며 시작되었다. 제목에서 말하듯 이 시리즈는 기념의 방법론에 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미지를 변환하고 겹을 쌓는 것은 하나의 논증으로 제시된다. 그중 〈기념일을 기념하는 방법 4〉는 작가의 레이어 표현이 돋보이는 작업으로 어렴풋이 남아있는 꽃의 형태, 그로부터 추출되었을 면과 선이 레이어를 형성한다. 물감의 물성이 남아 있는 붓질, 그리고 작은 픽셀 표현이 어우러지고 실제 대상의 색상을 암시하는 색과 인공적인 색이 그림 위에 공존한다. 이렇듯 원형을 암시하면서 변형·파생된 이미지가 공명하게끔 하는 것이 금소현이 말하는 기념의 방법이고, 나아가 사랑의 방법인 것이다.
나는 금소현이 운영진으로 있었던 모 멤버의 생일카페에 방문한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멤버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를 잘 몰랐음에도 ‘그’를 촬영한 사진을 눈으로 핥고, 운영진에서 ‘그’의 가장 사랑스러운 면을 강조해 재해석한 이미지를 쓰다듬고, 나아가 이를 활용한 굿즈를 구매하는 등 ‘그’의 이미지 안에서 뛰놀며 실컷 그의 생일을 기념했다. 나에게 금소현의 회화는 그가 주최한 또 다른 임시-기념-카페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 그 원형을 상상하고, 가늠하고, 혹은 그와는 상관없이 변형을 유희하며 작가가 운용한 이미지를 플레이하는 장으로서 그의 회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임시로 열린 그의 작업실에 방문한 기념으로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영영 공개되지 않을 것인가? 인공적인 색을 주로 사용함에도 아크릴 물감이 아닌 전통적인 재료인 유화 물감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공지능(AI)이 매끈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현재, 픽셀은 이에 대항하는 요소로서 등장하는가? 왜 회화인가? 앞으로도 회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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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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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창문을 통해 보았던 풍경을 기억하려 하면 자동 환등기에 꽂힌 슬라이드 필름이 흰 벽에 투사되듯 선명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꽤 왁자지껄했던 소리, 짙어진 녹색 잎으로 뒤덮인 나무 등과 같이 각인된 감각만이 맴돈다. 애써서 기억하고자 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해 놓아도 그 안을 채웠던 감정과 대화는 시간에 휩쓸려서 희미하게만 남아있다. 이처럼 일상에서 수집하는 사진 이미지는 특정 순간의 감정, 감각 등을 모두 담아내기 충분하지 않지만, 구유빈은 그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 사진 이미지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재현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을 회화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되짚어간다.
작가는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사진을 보며 작업하는데, 스크린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고채도의 색채와 빛을, 장면을 수집할 때 느꼈던 감각과 접목하여 풀어낸다. 이를 위해 캔버스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 노출값과 채도를 조정하여 작가가 경험했던 사진 속 순간을 구현한 에스키스(esquisse)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사진 이미지를 통해서 작업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는 이유는 눈으로 마주한 순간을 사진을 참고하여 완벽히 재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서가 아니다. 작가의 눈에 닿은 그 순간을 복기하며 감정, 분위기 등을 빛과 색을 조절해 가면서 담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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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구유빈, 〈Pink Sunset〉, 2023, oil on canvas, 60.6 x 72.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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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Sunset〉(2023)과 〈Summer time〉(2023)에서는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이 주는 인상에 주목한다(도 1). 작가는 빛의 변화를 민감하게 좇으며 화면을 구성해 나가는데, 이는 꽃과 잎 사이로 혹은 유리컵과 창문을 통과하며 화면을 채우고 있는 빛을 묘사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요소인 빛을 캔버스에 담아내기 위해서 작가는 주된 색채를 먼저 얹고 블렌딩(Blending) 기법을 기반으로 붓질을 매끈하게 하여 나뭇잎, 꽃, 테이블 위의 컵과 같은 물건들에 빛을 침투시킨다. 특히, 〈Pink Sunset〉은 화면을 가르는 빗살이 눈이 부셔서 어렴풋이 보았던 풍경처럼 마치 일부분 블러(blur) 처리를 한 듯 흐리게 묘사되었다. 이는 불완전한 기억을 조금씩 회상해 나가는 작가의 작업 과정과 닮아있으며, 작업의 표제로 ‘일몰’, ‘여름’ 등 빛을 머금고 있는 단어가 붙여져 그 시기 개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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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구유빈, 〈틈 사이로〉, 2023, oil on canvas, 72.7 x 60.6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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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사이로〉(2023)에서부터는 화면을 장악했던 빛이 조금씩 걷히며 채도 높은 색상이 화면에 등장한다(도 2). 불규칙적이지만 모두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넝쿨과 같은 식물은 캔버스 한쪽에 여러 겹으로 쌓였었던 물감의 흔적마저 덮어버린다. 이전 작업에서 매끄러운 표면을 위해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틈으로 보이는 물감의 흔적이 공간감을 만들어서 ‘저 잎에 가려진 건 붉은색 깃털을 가진 새가 아닐까’하는 상상을 자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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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구유빈, 〈Magenta in the cafe〉, 2023, oil on canvas, 130.3 x 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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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구유빈, 〈Green Market〉, 2024, oil on canvas, 91 x 9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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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구유빈, 〈Blue to Coral〉, 2024, oil on canvas, 145.5 x 97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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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픈 스튜디오에서 중점적으로 선보이는 〈Magenta in the café〉(2023), 〈Green Market〉(2024) 그리고 〈Blue to Coral〉(2024)은 고채도의 색상이 더욱 과감히 사용한다(도 3, ,4, 5). 에스키스 단계에서 작가가 경험한 감각에 따라 전반적으로 채도가 높아진 색상은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어긋나기 쉽지만 작가는 한 조각씩 색상의 조응을 살피며 붓 터치를 진행한다. 또한, 이미 에스키스 단계에서 원본 이미지의 색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화면에 채운 색의 구성과 붓 터치 그리고 기억만을 의지한다. 화면을 구성하는 형태들도 〈Magenta in the café〉의 창밖 풍경과 구 모양의 조명에 맺힌 상들처럼 굴절되고 투영됨에 따라 본래 형태에서 벗어나 서로 어슷하게 맞물려있다. 특히 〈Green Market〉의 좌우 측 가장자리 부근은 쉽사리 물건을 적재해둔 팬트리로 추측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선반 위의 물건들은 세밀하게 표현되지 않고 도형 혹은 붓 터치로 묘사되어 있다.
가장 최근 작업인 〈Blue to Coral〉은 작가의 이전 작업의 과정이 확연히 드러남과 동시에 향후 이어질 작업을 짐작하게 한다. 빛과 색이 모두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Green Market〉의 화면 왼편에서 비치는 듯한 빛을 일부 표현했던 것에 비해 〈Blue to Coral〉을 보면 바닥, 철제 선반으로 추측되는 구조물,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식물에 빛이 비침으로써 변하는 색을 적극적으로 묘사했다. 앞선 작업에서 빛을 묘사할 때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매끄러운 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면 색을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푸른색에서 산호색으로’ 변하는 색의 구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작가는 꽤 오랜 시간 화면에서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되짚는다. 잘 들어맞지 않는 조각이 생기면 문장을 새롭게 쓰듯이 다시 사포질하여 다른 조각을 만든다. 이러한 빛살을 가르고 눈에 닿은 색의 조각을 맞추는 구유빈의 작업 과정은 기억, 감각, 경험 등이 중첩되어 어느 순간 작가를 그리고 관객을 의미의 한가운데로 가져다 둘 것이다. 그러니 기대하고 자신이 만든 이전 조각을 함께 바라보자. 그 순간에 가닿을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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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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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이준희, <움직이며 거주하는 별들>, 2024, 캔버스에 유채, 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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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이준희, <별의 추락>, 2023-24, oil on canvas, 97.0 x 145.5cm |
(도 3) 이준희, <별의 추락2>, 2024, 캔버스에 유채, 연필, 97.0 x 145.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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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준희(b.1996)는 종교와 신화에서 빌려온 상징으로 빚어낸 마술적 세계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에 집중해왔다(도 1, 2, 3). 태양계와 환상극장, 아담동산과 대홍수의한복판 … 심오한 질서로 지어진 듯한 무대에는 괴물들이 산다. 힘 빠진 표정의 태양이 행성 무리를 호령하는 한편 조악한 총은 괴물 인간의 얼굴과 빛줄기를 내뿜고, 이목구비 달린 중지를 올린 주먹이 화염을 일으킨다. 이들은 인간의 축에도 신의 축에도 끼지 않은 채 온갖 성스러운 것들로 가장하며 위대한 아버지 신의 수상한 키치 버전이 되어간다.
그의 작업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규격 외 세계로 떠밀려 나온 존재들에게서 느낀 모종의 동질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작가에게 괴물이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속하는 존재이자 규범에 편입되지 못한 배제된 몸의 은유다. 이준희는 이분법 규칙에서 탈락되어 갈 곳 잃은 이들을 ‘괴물’로 은유하며 회화라는 평면 위 허구의 시공간으로 이주시켜왔다. 그런 괴물들은 어떤 속성을 공유하는데, 바로 자신이 아닌 무언가와 자꾸 결합하려는 습성이다. 결합은 성경과 철학과 연금술의 영역을 넘나들지만 마냥 무겁지 않고 친근한데, 작가를 스쳐 지나간 것-때론 그에게 스며들어온 사소한 것들까지도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와 ‘아브락사스’, 평평한 멸망의 접붙음은 유쾌하고 진지한 농담이다. 괴물들은 마구잡이로 조합된 것들조차 허용될 흑백논리 너머의 세계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작가는 최근작에서 이전의 도상들을 추상적으로 풀어내 회화에서의 시간성을 연구한다. 이준희는 줄곧 거주할 곳 없는 형상이 머물 자리를 찾아 헤매는 여행 중의 멜랑꼴리를 다루어왔는데, ‘여기 아닌 어딘가’로 떠나는 여정의 시간과 ‘지금 바로 여기’서 벗어나고픈 괴물의 발버둥이 발산하는 힘은 수천 회 쌓인 붓질이 되어 폭발하려 한다. 그것은 터질 것이고, 멀리 날아갈 것이며, 빛의 속도로 떠나게 되리란 예감이다. 작가가 새롭게 천착하는 ‘빛’의 테마는 그의 세계-만들기가 그러했듯 작은 균열로 침투해 구획된 모든 그림자를 밝히고 날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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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이준희, <불의 꿈I>, 2023, oil on canvas, 90.9 x 72.7cm |
(도 5) 이준희, <불의 꿈II>, 2023, oil on canvas, 31.8 x 40.9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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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불의 꿈’ 연작은 흩날리는 촛불과 그 결과의 과거인 듯도, 아닌 듯도 한두 점의 그림으로 구성된다(도 4, 5). 꿈에서 깨고 난 뒤 남은 장면 같은 이 시적인 프레임들은 촛불의 확산에 가능과 불가능이라는 서로 다른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열어둔다.
멸망의 징후가 있다. 나쁜 것들이 매일의 언젠가 불쑥 우리에게로 온다. 새 시대의 밀레니얼은 쉽게 자행되는 폭력으로부터 쉽게 세상의 ‘평평한 멸망’을 엿본다. 부정이 기만이라면 수용은 절망이다. 우울과 기쁨이 교차하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된 이 순간 유효한 진리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리란’ 아이러니일 것이다. 극작가 자크 그레뱅(Jacques Grévin, 1539~1570)이 오백 년 전 말했듯 “나는 나의 웃음을 유감스러워하며, 나의 울음을 비웃으며, … 나의 고통을 슬퍼한다. 모든 것이 나를 울게 만들고, 모든 것이 나를 웃게 만든다.”
이준희의 괴물들은 교착 상태의 괴로움을 유머로 경유한다. 그 여정은 속력을 더하고 있다.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을 쫓으며 내뿜는 에너지가 과연 한없이 공고한 벽을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이준희가 마련한 거주지에서 그들은 오늘도 존재한다. 그 장난스러운 세계-만들기는 혜성의 꼬리로 최후를 점쳤던 어린 목동의 예언 그 오래된 놀이의 연장선이다. 머물 곳 없는 이들만이 유성이 되므로, 멸망의 예감에도 웃으며 반짝거리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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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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