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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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세 번째 뉴스레터] 스타팅 블록: 네 번째 블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는 서른 번째 레터부터 서른다섯 번째 레터까지 2022년부터 이어온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x 미술사학과 교류모임 ‘블록메이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스타팅 블록: 비평교류'의 결과물을 발행한다. 앞서 에포케 레테는 2023년 비평 교류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두 차례 레터를 발행한 바 있다. 2024년에는 외부 기고의 형식으로 비평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평가 x 작가로 이뤄진 15팀의 비평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에포케 레테는 비평가와 작가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비평 교류를 지지하며, 향후 다양한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포케 레테 x 블록메이트* 기획: 최은총 진행: 김수홍
* 이 글들은 2024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2024.04.24(수) - 04.28(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지금, 우리는...Present, Are We?] 김도연 비평가 x 천예지 작가
[② 침묵적 상실을 마주하여] 김동민 비평가 x 태현영 작가
[③ 불안 사이의 안락한 우연] 이선명 비평가 x 유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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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Present, Are We?
김도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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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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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간의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얼마 지나지 않은 최근까지, 인류는 고립된 상태로 생존싸움을 겪어야 했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종식된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그 밖에도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조차 매 순간 크고 작은 차별에 맞서서 소리없이 각개전투를 치르며 고독한 자리싸움 중이다. 자유를 표방한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한순간이라도 제대로 함께 있는가? 수많은 역사책과 박물관이 증명하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존재가 방증하듯, 인류의 지난한 역사동안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생존해왔다. 우리는 어떻게 계속해서 ‘우리’로서 살아갈 것인가. 작가 천예지는 그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투영한 작업을 통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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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천예지, World, 2024, Video, 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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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천예지, World, 2024, Video, 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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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예지는 회화, 영상, 그리고 3차원 오브제를 통해서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인간이나 동물과 닮은 혼종적 생물체 또는 기포 형상의 세포가 출현하며, 이와 같은 형상의 몸은 주변 환경과 연결되고 맞닿아진 상태로 표현된다.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대부분의 개체들은 홀로 두드러지거나 따로 떼어져 있지 않으며, 각각의 개체는 서로에 포개어지고 기대어진 채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상호공존하며 오롯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생태계 구성원의 운명과 그들이 이루는 세계를 암시한다. 작가는 그의 작업을 통해서 환경 오염, 전쟁, 혐오, 차별 등이 만연한 동시대에 우리 사회가 각기 다른 입장을 내세워 쌓아 올린 대립의 벽을 허물 것을 촉구한다. 동시에 뗄래야 뗄 수 없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곱씹어보게 하며, 나 이외의 존재와 상호작용이 필연적인 것임을 직시하도록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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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천예지, Part of World, 2024, Fur, resin, 20 x 20 x 2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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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천예지, Synthetic, 2024, Oil on canvas, 100.0 x 80.3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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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스텔 톤의 푸른색과 분홍빛 색조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처럼 친밀해 보이는 캐릭터의 구현은 작품에 대한 관람자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한다. 더불어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개체들은 자연스레 보는 이의 시선을 끌고,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유희적인 상호작용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작업 요소를 통해서 관람자는 경계심이나 어려움 없이 작품에 초대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관람자의 자율적 시간 속에서 작업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에 대한 다층적 해석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영상 및 3차원 오브제 등의 매체를 활용하여 그의 작업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약동하는 유기체 간의 관계 맺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회화 작업에서의 입체적이고 촉각적인 개체를 통해서 이미 예고되었던 3차원성은 3D 프린터를 통해 실제 세계에서 구현된다. 상상에서 구현되었던 새로운 세계 속의 생물은 만질 수 있는 오브제로 관람자 앞에 놓여, 본격적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해체의 과정은 회화, 영상, 오브제 등의 창조물 그 자체를 통해서 전개되며 작품 세계에서처럼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개체의 유기적인 관계와 공존 가능성을 암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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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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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는 침묵하면서 불안을 받아들이는 결의성을 통해 근원적으로 고독해짐으로써 본래적 자기(Sein)가 된다. […] 그 존재는 침묵한 채 자기 스스로 그것으로서,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내던져진 존재자인 것이다.”1)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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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러 멀어진 인연이나 포기한 관계, 한때 몰입하고 집착한 것들, 이제는 갈 수 없는 곳들을 떠올려본다면 기억이 추억보다 상실에 가깝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관련된 장소나 물건들을 보았을 때 더욱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향방 없는 회고는 때때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걷잡을 수 없는 퇴락으로 이끌고, 때로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여기기도 한다. 이처럼 상실은 불안의 방아쇠를 당기며 자기(Sein)에게서 도피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같은 기억과 상실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태현영은 스스로 내적 세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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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태현영, <전환기 환상>, 2023, Oil on canvas,
72.7 x 90.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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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태현영, <남은 것의 전이>, 2024, Oil on canvas, 72.7 x 90.9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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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영은 오래된 사진 속 인물과 사물을 재료로 삼는다. 우리네 기억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구성하고 있기에, 이것들은 현재의 관계 속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특정 지어지지 않은 채 익명의 타자가 되어 그에게 침투하며, 익명성은 대상을 물질로 경험토록 한다. 그 밖의 분별 불가한 사물들은 그의 인식 아래 머물며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다시금 제시한다.2) 모든 것은 분절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또 다른 추상적 풍경으로 응고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외부 세계와 자기 간의 역동적인 상호 교류를 은유한다.
고체화된 촛농, 녹아내린 나무를 닮은 추상적 형상들은 초와 나무의 성질이 뒤섞이듯, 익명의 대상들을 넘나들며 내면화된 타자를 그려낸다. 배경과 형상, 안과 밖의 정의는 의미를 상실하며, 자기 세계의 불확실한 흐름처럼 변용된 추상 형상들이 자리하게 된다. 반복적인 회상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현상을 왜곡한다. 화면에서 과거와 현재의 잔재들 또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이해의 단절을 야기한다. 이렇듯 태현영의 회고는 역동적이고도 침묵적이다. 이해 없는 응망(凝望) 앞에서 그는 더욱이 고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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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태현영, <반복되는 도피를 안아들고>, 2022, Oil on canvas, 91.0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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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태현영, <회상의 환상적 메커니즘>, 2023, Oil on canvas, 130.3 x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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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스러운 형상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태현영의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보편적인 인물상을 타인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하고자 했다”는 그의 말은 세계에 멋대로 ‘내던져진’ 우리가 저마다의 상실과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을 상기시킨다.3) 그는 대상의 눈과 얼굴을 가리고 형태를 왜곡하여 이를 유동적인 실재로 열어놓는다. 자꾸만 경계를 침범하는 추상 형상들은 기억의 장면을 감추며 거리를 벌려놓는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그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관객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보라 촉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쉽게 불안이라는 지점에 고립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상실감을 느끼진 않는가. 태현영은 이러한 지점에서 상실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마주해 보길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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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전양범 역, (동서문화사, 2016), 406.
2) 나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의식이고, 사물은 그것이 나의 자기성(自己性)의 회로 속에 도입될 때, 나의 고유한 가능성(에 대한) 나의 비조정적인 의식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물의 잠재성을 나에게 제시한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성 역, (동서문화사, 2009), 440.
3) “제가 느끼는 관계 속 감정들은 저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분명 관객도 같은 것을 느낀 적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가 표현하는 건 너무 사적인 재료로 가면 오히려 공감 가능성을 닫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태현영 작가와의 인터뷰 (2024년 4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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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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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영은 자기 작품을 어지럽히고 정리하는 과정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과정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익숙한 모습과 나름의 법칙을 찾는 우리의 본성과도 닮았다. 반대로 규칙과 압박 속에서 변칙적인 모습을 기대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양면적인 심리는 각자의 불안에 맞서는 방식에서 비롯되어 규칙과 자유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균형을 찾도록 헤매게 만든다.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망가트리지도, 완벽한 규칙에 맞추기도 불편해 결국 그 중간의 애매함을 택하는 것은 언뜻 우유부단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양 끝을 정확히 인식해야지만 나올 수 있는 선택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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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유지영, Blank type1, 2023, Oil on canvas 91 x 91cm |
(도 2) 유지영, Blank type 2, 2024, Oil on canvas 90.9 x 65.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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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상태는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운 상태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기에 걱정할 것이 없으면서도, 계속해서 무엇에 대한 결핍인지도 모를 막연한 것을 마주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 우연을 가장해 텅 빈 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물감들이 캔버스 위에 뿌려지고, 번지고, 밀려 나가서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의도가 아니라는 말로 가벼운 척 위태로운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회피하듯이 벗어난 반대편에는 자유롭지만, 끝이 없는 또 다른 불안이 있다. 작가는 끝과 끝 사이를 오가며 우연히 도달한 형태들을 찾아 나름의 조형 언어로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우연에서 출발한 유기적인 형태는 작가의 조형적인 탐구 과정에 따라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회화에 적용된 시간마저도 뒤틀어 놓는다. 그러한 시간차로 인해 생기는 생동감은 형태적인 생동감과 맞물려 보는 이가 비록 행동의 결과를 보고 있지만, 과정 그 자체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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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 type 1>(2023)과 <Blank type 2>(2024)가 보여주는 완벽히 정돈되지도 않은 화면은 매끈하면서도 까슬까슬하고, 쏟아질 듯 흘러내리다가도 탄력적으로 튀어 오르는 듯하고, 미끈거리면서도 보송보송해 보이는 다양한 질감들로 가득하다. 우연적인 기법들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물성들끼리의 충돌은 촉각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작가가 찾아낸 형태들은 끝끝내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보는 이들의 자유로운 연상작용을 자극한다. 관객들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형태들에서 어떤 구체적이고 정돈된 해답을 얻어갈 수는 없지만, 긴장과 조화가 끌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촉각적이면서도 시각적인 감각 속에서 또 다른 규칙성과 조형성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긴장되는 경험은 혼돈 속에 작가가 만들어 놓은 안락한 공간으로 초대해 우리가 근심을 잊고 현재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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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유지영, Winkle tracking, 2022, Oil on cotton, 57.0 x 67.0cm |
(도 4) 유지영, kids tracking, 2022, Oil on paper, 39.4 x 54.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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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지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우연적 요소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작용한다. <Winkle Tracking>(2022)과 <Kids Tracking>(2022)과 같은 트레킹 시리즈에서는 작가 본인이 만들어낸 형태에서 출발하지 않고 천 그 자체가 가진 주름의 의도치 않은 모양이나 아이들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다양한 형상들에서 시작해 조형을 탐구한 결과를 보여준다. 제목처럼 따라가다 보면 도달하는 형태들은 앞서 본인이 만들어낸 혼란이 아닌 또 다른 끝 지점을 탐색해 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데, <Technique Study>(2023) 시리즈는 형태적인 것뿐만 아니라 재료적인 고민을 거친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해 가능성을 실험한다. 다양하게 시도되는 우연성은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폭을 넓히면서도 회화의 표면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깊이 빠져들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준다. 다양한 불안 요소들을 파악하려는 앞선 탐구 과정은 어느새 불확실성 사이를 점유한 공간의 깊이를 확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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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유지영, Technicque study1, 2023, Oil on canvas 53.0 x 45.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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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는 주저 없이 내리그은 선과 면들이 보일지라도 작가의 시작은 텅 빈 흰 캔버스였다. 어지럽히고 다시 수습하는 반복적인 과정이 캔버스 틀 안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작가는 맨 처음 티끌 하나 없는 빈 공간 속에서 예기치 못한 형태와 마주 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지영은 언제나 용감하게 어지러트리고 다시 정리한다. 그가 제시하는 불안 속 부유하는 공간은 우리를 두려움과 안락, 우연성 사이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그 과정 속으로 끌어들여 우연한 척 우리가 마음 놓고 발 디딜 곳을 만들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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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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