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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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두 번째 뉴스레터] 스타팅 블록: 세 번째 블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는 서른 번째 레터부터 서른다섯 번째 레터까지 2022년부터 이어온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x 미술사학과 교류모임 ‘블록메이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스타팅 블록: 비평교류'의 결과물을 발행한다. 앞서 에포케 레테는 2023년 비평 교류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두 차례 레터를 발행한 바 있다. 2024년에는 외부 기고의 형식으로 비평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평가 x 작가로 이뤄진 15팀의 비평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에포케 레테는 비평가와 작가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비평 교류를 지지하며, 향후 다양한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포케 레테 x 블록메이트* 기획: 최은총 진행: 김수홍
* 이 글들은 2024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2024.04.24(수) - 04.28(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숲 그리고 나무, 과일과 폭탄 그리고 운석과 사냥총 그리고 화산 폭발, 스프링클러 그리고 숲] 김다혜 비평가 x 조은시 작가
[② ‘능동적인 관찰자’로서 문은채의 그리기] 김수홍 비평가 x 문은채 작가
[③ 경치 좋은 방 A Room for a View] 오현경 비평가 x 방예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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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리고 나무, 과일과 폭탄 그리고 운석과 사냥총 그리고 화산 폭발, 스프링클러 그리고 숲
김다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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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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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 유리 조각, 진흙, 내리는 비, 절벽, 피로한 발.
개개의 단어를 쉼표와 마침표를 이용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자 머리 속에서 곧바로 어떤 상황이 그려진다. 앞서 나열한 단어는 모두 인간의 걸음을 방해하고 상처 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절벽을 마주한 이는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찾았을까 아니면 빗물에 젖은 바닥을 밟고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까. 혹은 피로한 발과 내리는 비에 외출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조은시는 상황적⋅조형적으로 서로 닮은 요소들을 한 화면 아래에 배치하여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조형 요소들을 분석하고 읽어내려는 우리의 인지적 작용을 이용하여 상상의 사건을 발생시키고 그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속상한 날 Distressed Day>에서 우리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붉은 색의 물체를 화면 오른편에 나열된 폭력적인 도구와 연결해 나무에 가해지는 폭력을 작품의 주제로 추측해 본다(도 1). 작품의 제목은 이러한 상상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배수진 Have One’s Retreat Cut Off> 역시 화면의 구성 요소들은 사건 발생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배열된 사각 프레임을 연결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읽게 만든다.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전투기의 실루엣은 비행 슈팅 게임의 장면과 연결되어 그다음 상황을 예측하게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일련의 사건을 화면에 매번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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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조은시, <속상한 날 Distressed Day>, 2023, oil on canvas, 162.2 x 112.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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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리고 나무, 과일과 폭탄 그리고 운석과 사냥총 그리고 화산 폭발, 스프링클러 그리고 숲.
<자연의 섭리 The Providence of Nature>에서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도 2). 이번에도 중앙의 총을 기준으로 화면은 분할되어 있으며 붉은색의 곡선이 사건의 발생 순서를 일러주는 듯하다. 그러나 화면 아래의 알에서 위의 새로 그리고 또다시 알로 우리의 시선은 특정한 시작과 끝이 없이 원을 그리며 반복해 돌게 된다. 왼쪽에는 벌레를 사냥 중인 새의 모습이 담긴 직사각형의 프레임이, 오른쪽에는 새를 사냥 중인 사냥꾼의 모습이 그려진 직사각형의 프레임이 배치되어 있다. 사냥이라는 동일한 사건이 사냥 대상만 바뀌어 반복되고 있으며, 새는 사냥하던 생물에서 사냥당하는 생물로 변하고 곡선을 따라 죽은 새는 또다시 알에서 부화하여 곤충을 잡아먹는 새가 된다.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새총을 만들어낸 문명과 인간이 순환하는 세계에서 벗어난 최상위 포식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작과 끝을 지정할 수 없는 순환적인 사건, 그리고 형태만 달리한 채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의 연결구조를 드러내어 우리는 하나의 뿌리를 가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마음 Same Way>에서는 폭발하는 화산과 스프링클러의 분출 이미지의 닮음을 통해 이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도 3). 아래의 공룡 뼈가 암시하듯 하나는 생명체를 삼켜 죽음으로 데려갈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을 촉진시키고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터져 나오듯 분출되는 모습은 매우 닮아있으며, 이는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파괴와 구축, 소멸과 재생이 사실은 이원 구조, 이원 체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들 속 구획된 화면은 자연과 문명, 동물과 인간의 이원적 대립의 장을 보여주고 그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사실은 매우 닮아있는 동일한 하나의 세계임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의 조형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나무로 숲이라는 전체 속에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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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조은시, <자연의 섭리 The Providence of Nature>, 2023, oil on canvas, 72.7 x 53.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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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조은시, <같은 마음 Same Way>, 2023, oil on canvas, 100.0 x 80.3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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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리고 나무 그림 그리고 나무판자 그리고 가짜나무.
나아가 작가는 숲과 나무, 나무와 숲의 관계를 캔버스 화면 안 가상의 세계에만 구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로 확장하고자 한다. 구획된 화면 내에서만 순환하고 기능하던 요소들은 나무판자를 경유해 현실 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가장 먼저 <가짜나무와 벌집 Fake Tree and Honeycomb>에서 실행되었다(도 4). 나무판자 위에 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려진 나무는 실제의 온전한 나무를 재현한 것이 아닌 가공된 나무 즉,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가짜 나무를 재현한 것이다.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 세계의 나무판자는 판자 나무와 하나가 되어 재현된 판자 나무의 실제 뒷부분이 된다. 혹은 그림을 관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받쳐주는 부수적인 역할이 아닌 판자 나무의 원형으로 숨겨진 실제 주인공일 수도 있다. 이렇듯 부분과 전체, 재현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유쾌하게 질문한다. <먼 친척 A Distant Relative>에서는 재현된 세계⋅모방된 세계에 있는 소용돌이와 이데아의 모방일지도 모를 현실 세계의 물을 연결하고, <말썽쟁이 Scallywag>에서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을 차용해 가상의 세계를 벗어난 현실 세계로의 착지를 시도한다(도 5). 반대되는 물살이 만나 형성되는 소용돌이, 서로 다른 공기의 흐름이 만나 생성되는 태풍, 이들은 이제 현실 세계와 연결되었다. 우리는 더욱 커진 소용돌이와 태풍에 휩쓸리게 될까, 소용돌이와 태풍이 소멸된 공간에 서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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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조은시, <가짜나무와 벌집 Fake Tree and Honeycomb>, 2023, oil on panel, 80 x 30 x 3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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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조은시, <먼 친척 A Distant Relative>, 202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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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인 관찰자’로서 문은채의 그리기
김수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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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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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채는 현실세계를 다루는 듯하면서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해내고, 가상 세계를 그리는 듯하면서도 현실세계를 말하는 것 같은 모호한 수수께끼 같은 화면을 그려낸다. 예를 들어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가 새잎이 돋고 푸르름이 진해져 만든 숲의 풍경, 놀이공원의 기쁨과 환상을 싣고 도는 롤러코스터 그리고 한입 베어 물면 천국의 문이 열리는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환상을 상기시키는 소재가 그의 화면을 구성하지만 그 베일에는 도통 짐작할 수 없는 분위기가 도사린다.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어린시절 익숙하게 알고 있고 보아왔던 풍경에서 멀어지면서 시작한다. 익숙하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은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수동적인 관람자가 되어 보아온 것들이 오래 기억되어 마음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고, 그것들이 하나의 완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익숙한 풍경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우리가 유년 시절에 익숙하게 바라보았던 것들과 멀어지는 방법을 터득한다. 새로운 장소에 던져지며, 친숙하게 느꼈던 세계가 친숙하지 않음을 느끼고, 낯선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목격한다. 문은채는 그렇게 낯선 장소, 시선, 분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점을 잡아낸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갑작스럽고, 장소들은 낯설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기에는 낯설면서 두려운, ‘언캐니(Uncanny)’한 감각이 존재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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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문은채, WAY FOR PEACE OF CAKE, 2024, oil on canvas, 162.2 × 97.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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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 FOR PEACE OF CAKE>(2024)에서 그가 옮겨 놓은 식물의 생기 있고 푸릇한 모습은 환상적이고 이국적으로 느껴진다(도 1). 식물들의 섬세한 초록 빛깔은 반대편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림자는 표면을 비집고 나타나 화면을 더욱 이중적이고 낯설게 만든다. 화면 한 가운데 놓인 케이크와 텍스트 역시 이질적인 풍경을 만드는 오브제로, 실재와 가상 사이의 경계를 드러내는 요소로 그의 그리기를 뒷받침한다. 작품 안의 이질적 요소와, 서로 충돌되는 오브제들은 낯선 분위기를 조성한다. 놀이공원이 멈춰 있거나 문 닫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그린 <Welcome!>(2024) 시리즈는 어떠한가(도 2, 3). 여기서 작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풍경의 숨겨진 이면을 그려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소의 낯선 면을 담아내면서 실재와 가상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고 모호하게 하는 '언캐니(Uncanny)’한 감각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을 다루는 그의 작업은 새로운 세계를 유영하는 주체의 불길함과 불안감에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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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낯선 것을 포착하려 하는 것은 역으로 세계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기존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낯선 것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작가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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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문은채, Welcome!-1, 2024, 60.6 x 60.6 cm, gouache and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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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문은채, Welcome!-2, 2024, 72.7 x 50.0 cm, gouache and oil on canv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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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채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이질적인 기표의 조합을 활용해 낯선 감각의 잠재성을 다룬다. 할 포스터(Hal Foster)는 초현실주의가 불안을 미학으로, 언캐니한 것을 경이라는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시도라고 보았다.2) 문은채가 만들어낸 환상적이면서 모호한 세계는 작가의 내면을 지배하는 불안을 미적체험으로 승화시킨, 초현실주의가 강박적으로 다룬 아름다움과 무관하지 않다. 언캐니는 또한 합리성의 부정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을 통해 문은채는 밝고 행복한 세상의 이미지에 반하는 소외감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과 부정적인 요소가 밝아 보이는 세계와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세계의 합리성에 대한 주체의 공포스러움과 두려움이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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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문은채, 〈빛이 드는 숲〉, 2023, oil on canvas, 227.3 × 145.5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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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우물가>(2024)와 <빛이 드는 숲>(2023)은 현실에서 멀어진 ‘게임’이라는 시각 문화에 뿌리를 둔 작품으로, 디지털장소를 배경으로 한다(도 4). 발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숲의 풍경과 가상세계 같은 인위적인 빛의 표현은 낯선 감각을 누적시킨 채, 디지털 장소 도처에 짧게 등장하는 오늘날의 불길함과 불안감을 표상한다. 더욱이 작가는 아예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작가의 애니메이션 작품 <바다로 가는 길 Way to the Sea>(2024)은 이전 작품과 달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낸 새로운 시도로서, ‘문명세계의 멸망’을 상상한다(도 5). 여기서 작가는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렇게 분열적인 세계에서 느끼는 불안과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를 작품의 주인공인 아이에게 투영시킨다. 한편 ‘바다’는 새로운 세계와 미지의 공간을 은유하는 소재가 되어, 그에 매혹되고, 닿고 싶은 작가의 욕망을 대변하기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 속에서 능동적인 관찰자가 되어 세계를 탐험하고 바다에 닿고자 앞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작가는 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시공간을 형성시키며, 이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와 세계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다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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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문은채, <바다로 가는 길 Way to the Sea>, 2024, single channel, 3' 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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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채의 작업은 세계를 향한 불안, 두려움, 혼란, 환상과 매혹 사이를 떠돈다. 작가는 낯선 감각으로 소환된 이 모든 감정이 우리 모두의 경험을 투과할 것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화면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를 비추는 도구로써 잠재성을 갖는다. 작가는 낯선 감각을 포착하며, 실재, 가상 그리고 환상의 사이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실험을 이어 나간다. 이 실험의 진가는 ‘뷰카시대’라는 불확실하고 낯선 상황에 내던져진, 혼란스러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데에 있다.3) 또한, 작품 속에서 낯섦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미적 체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우리에게 자아와 세계를 이해하고 재발견할 수 있는 ‘능동적인 관찰자’로서의 시각을 제안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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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캐니(Uncanny)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언급된 용어이다. 본고는 2008년 출판된 『예술, 문학, 정신분석』에 수록된 언캐니의 번역 ‘두려운 낯설음’을 참고하여 언캐니를 두려우면서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으로 간략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2)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 조주연 역 (아트북스, 2018).
3) 뷰카(VUCA)란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함(Ambiguity)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 만든 신조어이다. 변동적이고, 불확실하고, 복잡하고, 모호하여 예측이 어려운 사회·경제적 환경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흔히 이러한 상황을 '뷰카 상황', 이러한 특징을 가진 시기를 '뷰카시대'라 표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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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좋은 방 A Room for a View
오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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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 x 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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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자신의 지리를 알기 위해 여행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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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서울을 표류하다 마주친 당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곳은 한 산책자-수집가(die Flaneurin-Sammlerin)의 경치 좋은 방이다. 그는 자신의 방을 우리에게 열어 수집해 온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지금 이 순간을 표류하는 우리와 이 방의 조우가 서울이란 도시를 그리는 우리의 심리적 지도에 또 한 점을 찍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Das Passagen-Werk』에서 ‘산책자(der Flaneur)’를 도시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마주친 대상에 의해 감각적인 도취를 경험하고, 이렇게 자신의 몸으로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로 설명한다.2) 이러한 관점에서 방예은은 분명히 도시의 산책자다. 그는 마치 모세혈관처럼 넓게, 그리고 중층적으로 퍼진 도시의 건물과 건물, 거리와 거리 사이를 표류하며 그 공간들이 주는 다양한 자극에 도취되어 자신만의 심리적 지도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마치 아주 예민한 감각수용체처럼 스스로가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도시의 모호한 신호를 감지하는 수신기가 된다. 그는 도시를 산책하며 우리가 무심코 인지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던 번뜩이는 섬광, 흔들리는 형체, 가벼운 향기, 어지러운 데자뷔들을 그러모은다. 모든 것이 다 데이터가 되는 시대, 이처럼 수치로 기록되기 힘든 것들은 우리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 도시의 삶은 대부분이 수치로 기록되고 우리는 수치로 우리의 삶을 인식한다. 이 글을 쓰는 공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위도 127에 경도 37.6이고, 지금 시간은 2024년 4월 13일 토요일 새벽 2시(GMT+9)다. 구글 지도를 열면 바로 나는 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지금이 그리니치 표준시에 비해 얼마나 빠른 (혹은 느린) 시각인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데이터의 범람 속에서 정작 몸의 감각을 상실하고, 우리가 정말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다국적적이고 탈중심화된 통신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결국 개별 인간의 몸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감각적 지각을 통해 주변 환경을 조직화하며, 인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선언한다.3) 방예은이 이러한 초국가적인 데이터의 집적으로 축소되고 마는 삶에 대항해 산책으로 모호한 신호를 감지하는 방식은 제임슨이 새로운 문화 형식의 미학으로 제시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와 상당히 닮아있다.4) 그는 우리의 인지를 아득하게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대도시 안으로, 그 촘촘한 그물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 머릿속에 담담히 지도를 그린다.
이렇게 도시에 완전히 삼켜져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불시에 습격하는 것”들을 그러모아 자신만의 인지적 지도를 그려나간다는 점에서 그는 벤야민이 말하는 ‘수집가(der Sammler)’로 보이기도 한다.5) 방예은은 데이터 처리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표류의 감각을 거리에서 낚아채 자신의 스튜디오로 가져와 차근차근 이들을 수집한다. 산책으로 생성된 인지적 지도가 회상이란 과정을 거쳐 비로소 지극히 가벼운 거처를 얻는다. 방예은이 도시의 곳곳에서 수집한 매혹적이면서도 불가해한 신호들이 반투명한 막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서서히 스며든다. 그렇다, 그는 산책자-수집가, 즉 산책자이며 동시에 원래 수집될 수 없는 것들을 수집하는 수집가다. ‘수집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수집’이란 역설이 그를 물신, 지금 시대의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데이터 기반 경제에서 자유로운 산책자-수집가로 만든다. 방예은은 수집할 수 없는 것들을 수집하기 위해 지도 제작자가 되었다. 그의 지도 제작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애초에 수집을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기 때문에 지도의 원래 기능(혹은 본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수집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사물이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유용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말처럼 그의 지도는 우리를 서울의 어떤 지점으로도 안내하지 않는다.6) 목적지를 지시하는 것은 방예은의 지도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지도에 나타나는 여러 형상과 색채는 일반적인 지도의 재현적인 약호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를 어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데려간다.7) 수집된 지도로 둘러싸인 방예은의 스튜디오는 벤야민이 설명하는 수집가의 방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질서와 자본주의적 유용성에 저항해 자신만의 소우주를 형성한다.8) 이 소우주를 움직이는 질서는 바로 지도들이 서로 주고받는 감각적인 조응이다. 사라질 운명을 거스르고 이 방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송신과 수신. 그곳에서 우리 역시 발신자이자 수신자가 되어 무작위적인 신호를 주고받는다. 주고받은 신호를 해석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또 이 도시에서 우리만의 인지적 지도를 그려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 당신은 지금 한 산책자-수집가가 걸어가는 표류의 한 지점에 서 있다. 오늘의 전시가 당신의 인지적 지도에 한 점을 찍는 것처럼, 이 전시는 그의 여정에도 중요한 조우의 순간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이라는 표류의 과정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기대되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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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치고 잃어버리기>,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85 x 147 cm,
hop,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152 x 150 cm 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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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152 x 15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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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2024, acrylic on translucent fabric, 67.5 x 28.5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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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cel Réjà, L'art chez les fous: le dessin, la prose, la poésie (Paris: Société du mercure de France, 1907), 131,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역 (새물결, 2005), 963에서 재인용.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963-65.
3)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역 (문학과지성사, 2022), 111.
4) 인지적 지도의 개념은 앞의 책, 123-28을 참고.
5)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535.
6) 앞의 책, 532.
7)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은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2023), 11-26을 참고.
8)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52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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