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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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한 번째 뉴스레터] 스타팅 블록: 두 번째 블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는 서른 번째 레터부터 서른다섯 번째 레터까지 2022년부터 이어온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x 미술사학과 교류모임 ‘블록메이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스타팅 블록: 비평교류'의 결과물을 발행한다. 앞서 에포케 레테는 2023년 비평 교류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두 차례 레터를 발행한 바 있다. 2024년에는 외부 기고의 형식으로 비평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평가 x 작가로 이뤄진 15팀의 비평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에포케 레테는 비평가와 작가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비평 교류를 지지하며, 향후 다양한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포케 레테 x 블록메이트* 기획: 최은총 진행: 김수홍
* 이 글들은 2024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2024.04.24(수) - 04.28(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파편의 뭉침, 무한 객체의 혼종 세계] 박윤서 비평가 x 이수빈 작가
[② 미서] 위동은 비평가 x 송금희 작가
[③ 그리드 바깥으로: 물렁한 존재(들)의 생존방식] 한문희 비평가 x 정주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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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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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턴가 문득, 당신은 사물과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 인가 보았던 공상과학 영화의 감각이 당신의 일상 속에 파고들기 시작한다. 걸으며 지나치는 사람들, 오토바이와 한 몸이 되어 질주하는 사람, 하늘의 새,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다양한 기계 부속품의 형상 등 눈앞에 자동생성 되는 듯 덧씌워지는 이런 이미지들은 무엇 때문에 현실의 감각을 비틀어버리는지, 당신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간섭의 사건들을 기술하는 수밖에.
이수빈의 작업은 기계 산업의 태동과 함께 착상되어 20세기를 관통하며 인류 공동의 상상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혼종적 이미지를 작가의 고유한 방식으로 화면에 투영한다. 감상자들은 전시장에서 이수빈의 모노톤 작업들을 마주하고 그가 그리는 혼종적 세계로 일순간 이동한다. 금속성과 유기체적 물질의 다양한 질감이 뒤섞인 화면은 기이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화면에 담긴 대상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감상자들은 어렴풋이 그 대상의 부분부분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온전히 알아보기 어렵다. 이는 작가가 인간, 기계, 생명의 혼종성을 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작업이 마치 에드워드 웨스턴의 사진처럼 대상을 크게 확대하여 대상이 갖고 있는 질감과 운동감을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일상을 섬광처럼 파고드는 이미지를 인지한 비인간 존재자의 지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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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이수빈, The Body, oil on canvas, 2023, 97.0 x 97.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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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이수빈, Final Attack, oil on canvas, 2023, 40.9 x 31.8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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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사선 구도의 <The Body>는 금방이라도 형체를 잃고 흘러내릴 것 같은 금속의 감각을 표현한다(도 1). 익숙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는 형체들의 왜곡된 혼합, 매끄럽지만 물렁해보이는 금속의 감각, 화면의 깊은 곳에서 유령처럼 드러나는 형체들, 모노톤의 강렬한 대비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는 요소들의 불완전성을 극대화한다.
<Final Attack>의 심해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푸른 색감은 깊고 차가우며 동시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하다(도 2). 이 틈을 찢고 빠르게 하강하는 새의 역동성은 흩어지는 형태감으로 나타나며, 이질적인 요소들과 혼합된 채로 비추어져 혼란과 불안감을 더한다. 또한 화면의 하단부에 픽셀처럼 샘플링되어 재현된 사각형들은 이 세계의 분절되지 않은, 연속적인 시각에 의문을 더하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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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이수빈, Flame, 2024, oil on canvas, 130.3 x 130.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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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me>에서 작가는 분홍색에 가까운 강렬한 붉은색의 배경에 금속 기계 부품으로 가득 채운 화면을 선보인다(도 3). 구획화되고 정돈된 말끔한 기계의 형태가 아닌, 울퉁불퉁하고 혼돈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놓여 있으며, 유기체적 요소와 무작위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화면은 이것이 만약 포스트 휴머니즘적 미래의 상상이라면 그 미래의 질서도는 낮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만든다.
이수빈의 이러한 탈경계적 이미지들은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고, 모노톤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것이 도래할 미래라거나, 어떤 우주에서는 존재할 수도 있는 대안적 세계를 보여주는 환각적 장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 이미지들이 완벽한 환영 효과를 극대화하기보다 회화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붓질의 방향과 흔적이 잘 보이는 것, 캔버스의 그라운드 작업이 두껍게 되어 가장자리 부분의 물질성이 짙게 느껴지는 것, 군데군데 홈이 패여 있는 것, 흘러내리는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페인팅을 하는 중에 흘러내린 유화 물감을 정리하지 않은 것은 ‘이것은 캔버스에 올려진 물감일 뿐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한편 동시에 두껍고 표면이 고르지 않은 그라운드에 흡수되어 부드럽고 건조해진 유화 물감은 이 이미지들이 오래전 콘크리트 벽에 그려진 것 같다는 인상을 자아낸다. 벽 위에 표현된 혼종적 상상의 이미지는 신화를 표현하는 고대적 방식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수빈의 작업은 생물학적 유기체와 기계, 사이버네틱스적 피드백 루프, 컴퓨터 시뮬레이션 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상정되는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미래를 예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신화’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1) 그러나 그렇게 예시된 환시는 불완전하며, 현재의 인류가 처한 상황과 지향하는 방향의 극단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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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서린 헤일즈,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 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역, (열린 책들, 2013),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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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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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자신의 저서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에서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니체는 이 파격적인 사유를 통해 유럽의 형이상학, 문화, 도덕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도교를 비판함으로써 전통의 해체를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신의 파멸 이후 기존의 최고 가치가 상실되고 삶의 중심 체계가 무너지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Nihilismus)이 도래한다. 하지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에서 니힐(Nihil)의 상태 속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을 제시한다. 위버멘쉬는 신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왜곡된 가치관을 깨닫고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세우는 해석의 주체를 의미한다. 니체는 우리에게 자신 안에서 발하는 삶의 생명력과 힘의 의지를 지니고 삶을 살아가는 위버멘쉬적 태도를 행하길 당부했다.1)
무교인(無敎人) 송금희는 완벽한 결과물을 선보이고 싶지만 결국 이를 창조하지 못할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력감에 빠진다. 종교인은 불완전한 나를 이끌어주는 절대적 존재를 신앙하며 교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무교인들은 의존할 수 있는 초월적인 대상이나 통일된 인생의 척도가 없다. 개인적 니힐의 상태에 빠진 송금희는 방향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지만 최상의 작업 성과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력하다. 방황하고 있는 창작 활동에서의 자아가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그는 자신만의 신 ‘미서’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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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서양화과 오픈 스튜디오 송금희 작업실 전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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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서양화과 오픈 스튜디오 송금희 작업실 전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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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는 숭배의 대상이 아닌 작가의 작업 활동을 지켜보는 관찰자이다.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미서에게 작가는 눈의 도상을 부여한다. 송금희는 〈숨바꼭질〉(2022-) 시리즈에 ‘내 안의 거울’, ‘우물’, ‘블라인드’란 소제목으로 나눠 연속적으로 미서의 도상을 회화에 담는다. 〈숨바꼭질_내 안의 거울〉(2022)의 광활한 초원에서 검붉게 타오르는 눈의 형상은 노란 광선의 수평선과 어우러져 공포스러운 힘을 발산한다(도 1). 〈숨바꼭질_내 안의 거울〉에서의 미서가 드넓은 대지에 위치해 있다면 〈숨바꼭질_우물〉(2023)에서 신은 이보다 한정적인 우물 안에서 주황빛의 태양이 동공이 되어 작가를 바라본다(도 2). 〈숨바꼭질_블라인드〉(2023)에서 그것은 실제 블라인드 뒤에 자리해 자신의 존재를 더욱 숨기면서 실내에 있는 작가를 응시한다(도 3). 산이 눈꺼풀을 되고 태양이 눈의 핵심을 채우는 자연과 융화된 미서가 있는 반면, 풀의 형상과 함께하면서도 빛을 잔잔하게 혹은 폭발할 듯 내는 추상적인 눈의 묘사 또한 존재한다. 소제목과 숨어있는 정도를 막론하고 눈의 형상으로서의 미서는 자연 속에서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작가 앞에 현전(present)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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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송금희, 〈숨바꼭질_내 안의 거울〉, 2022, oil on canvas, 109 x 22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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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송금희, 〈숨바꼭질_우물〉, 2023, watercolor on paper, 20.5 x 27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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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송금희, 〈숨바꼭질_블라인드〉, 2023, watercolor on paper, 32 x 20.5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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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갖지 않은 송금희가 미서라는 신을 창조하고 지속해서 회화에 담는 행위가 허황된 형이상학적 대상을 신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분명 유사종교(類似宗敎)와 차이를 가진다. 미서는 잘못된 사상을 전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 작가가 고안한 ‘내 안의 거울’ 즉, 제2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헤매고 있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미서라는 주관적 가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송금희는 니체가 역설한 위버멘쉬적 태도를 취한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작가로서 성장 가능성을 추앙하는 송금희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
아직 나의 신은 죽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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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재민,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와 하이데거의 해석」, 『인문학연구』24 (2018): 94-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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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바깥으로: 물렁한 존재(들)의 생존방식
한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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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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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물렁물렁하다.1) 액체 상태로 주사기에 머금어진 물감만큼이나, 조금씩 떨리는 피부의 촉감만큼이나, 머리 위에 늘어진 그리드만큼이나(도 1).2) 물렁거리는 존재는 변화무쌍해서 아무리 알고자 해도 전부를 알 수는 없다. 한 개체의 생애와 그에 내재된 거대한 세계를 언제나 명확히 해체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거기 서 있을’ 존재의 부피만을 느낄 뿐이다.3) 완전히 알지도, 완전히 모르지도 않은 ‘알지 못함’의 상태에 억울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의 생생한 존재 증명을 목도하며, 미완된 채 조금씩 확장 중인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단단한 이데올로기로 구축된 사회구조에 내던져진 물렁한 존재는 구르고 허우적대며 미약한 움직임을 지속한다. 정주희의 《Perspective》 연작을 보자(도 2). 사각형 캔버스 안에는 가로세로 1cm 간격의 네모난 그리드가 이어지는데, 작가는 주사기에 물감을 채워 그리드에 촘촘히 찍는다. 액체 상태인 물감은 캔버스에 찍힐 당시의 점성과 주변 환경 등 수많은 외적 요소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드를 채운 수많은 점은 작가가 캔버스 앞에 앉아 있던 긴 시간을 암시하는 동시에 각진 사회 규범에 제각기 다른 몸을 맞추려는 모든 개인을 은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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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2024 서양화과 오픈 스튜디오 정주희 작업실 전경, 사진제공: 정주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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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정주희, Perspective_12, acrylic on canvas, 2018, 125 x 125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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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자리에 가해진 모종의 압력에 반응하는 개인의 작은 몸짓은 《읽기 연습 Reading Practice》연작에서 이어진다. <Reading Practice 1>(2015)에서 작가는 머리 위로 서너 권의 무거운 책을 얹은 채 긴장된 호흡으로 텍스트를 읽는다. 책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 텍스트를 보는 것, 그를 읽는 것, 읽기 위해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 모든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숨은 점점 짧아지고 목소리는 작아진다. 그와 대조적으로 책은 작은 어긋남에도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이 볼륨 차이를 고려하면서, 가로세로 30cm를 넘지 않는 작은 책의 부피와 160cm는 족히 넘는 크고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작가의 신체를 비교해볼 수 있다. 공간을 점유하는 부피는 인간의 신체가 확연히 크지만, 소리의 크기는 책의 그것이 훨씬 더 크다. 여기서 책은 단순히 종잇장 뭉치가 아닌, 인간이 만들고 유지한 사회와 연결된다.4) 이처럼 살아 숨을 내쉬는 개인(존재)과, 박제된 지식의 무게감으로 대변되는 사회는 다방면으로 대조적인 볼륨을 갖는다. 읽기 ‘연습’은 작가의 손에 들린 텍스트가 뜻하는 것처럼 수많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여성-작가의 삶의 연습이자, 규범적 사회의 무게를 버티는 모든 개인의 살아내기 연습일 것이다.
거대한 구조로부터 자신을 지탱하려는 개인의 메아리는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데, 종아리를 맞으며 글을 읽거나(<Reading Practice 2>(2016)), 일 분에 한 잔씩 소주를 원 샷하며 잔뜩 취한 채로 글을 읽는(<Reading Practice 4>(2017)) 모습이 그렇다.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책, 체벌, 술-에서조차 읽기 위해 자신의 호흡을 조절하려 한다. 그것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밭은 숨이라도 쉬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중에 <Reading Practice 6>(2019)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무엇도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시리즈와 구별된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화된 규범을 억지로 읽는 대신, 그것을 읽게 만드는 구조 자체를 공격하려 한다(도 3). 맨 살의 여성은 어떠한 방해물도 없이 이백 장의 휴지를 있는 힘껏 던진다. 그러나 얇은 휴지는 팔랑대며 발밑에 쌓일 뿐, 그녀의 시선이 가닿은 곳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카메라 렌즈로 치환된 사회는 개인의 몸을 관조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저항을 그저 응시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사회의 하위주체를 서발턴(Subaltern)으로 설명하면서 서구 규범이 말소해 온 서발턴의 발화를 강조한 바 있다. 즉, 규범적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써 서발턴의 발화가 가진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5) 그렇다면 <Reading Practice 6>는 텍스트를 읽는 대신, 자신이 속한 사회 구조의 위계를 읽고 그에 대응하는 방향성을 발화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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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정주희, Reading Practice 6, 8' 00", 2019, 4K two-channel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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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thing Project》 연작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카메라에 담긴다. 이 인물들은 정면을 바라보며 숨을 '참음'으로써 '숨'의 존재를 극대화하고 있다. 일상적 행위인 ‘숨쉬기’를 자의적으로 제한하자 신체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눈물이 맺히고 얼굴이 붉어지는 등, 단조로워 보이는 초상은 미세하면서도 강렬한 변화를 얼굴에 만들어낸다. 이 때 숨을 참는 사람과 그 모습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생겨난다. 타인의 신체 반응을 알아차리는 것에는 관찰이 필요하고, 그 관찰이 항상 완전한 이해로 인도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는 오직 서로의 반응을 더듬으며 상태를 가늠할 뿐이다. 더글라스 크림프는 ‘메트로-골드윈-메이어Metro-Goldwyn-Mayer’의 사자를 언급하며 다 끝난 것 같은 행위를 미세하게 반복하는 화면에 주목해, 무언가가 완결된 것이라는 느낌은 파편화된 이미지와 뭉텅 끝이 잘린 지속에 의해 경감된다고 말한다.6) 정주희의 《Breathing Project》의 초상 역시, 시작도 엔딩크레딧도 없이 무한 루프되는 형식을 통해 숨을 참는 행위가 끝없이 지속되는 것처럼 나타난다. 존재는 (숨이 붙어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존재의 생존 방식은 사회를 향한 거친 불만도, 실패한 저항도 아니다. 미약할지언정 끝내 자신을 지탱하는 숨, 그 자체이다.
삶은 자주 전쟁에 비유되지만 치열함은 각자의 몫이라 우리는 타인의 삶까지 헤아리지 못하고는 한다. 정주희는 근작인 《In Tempo》에서 다시금 그리드를 소환하며 사회 속 개개인의 미시적인 존재를 말한다. 《Perspective》에서 단단한 캔버스 위에 고정된 한 점이었던 개인은 《In Tempo》에서 보다 자유롭게 흐느러지며 추상적인 그리드를 형성한다. 유연한 그리드는 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약간의 거리를 두고 허공에서 떨어진 실은 몇 겹이고 계속 겹쳐지며 모양을 서서히 드러낸다. 견고해 보이기만 하는 사회는 실처럼 연약한 개개인의 집합에 다름 아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자유로운 개인,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구조에 얽매여 있음에도 자신의 존재-호흡-를 내뱉는 개인. 정주희는 얼핏 지난할 법한 작업 시간을 자신을 ‘숨 쉬게’ 하는 시간으로 설명한다.7) 최선을 다해 사회를 살아내는 개인의 삶도 어쩌면 그렇게 고통으로만 차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우리는 더 물렁한 방식으로, 더 변수가 가득한 방식으로 사회를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숭숭 구멍이 나고 제 멋대로 모양 잡힌 당신의 머리 위 그리드가 그렇게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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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폴 사르트르, 『구토』, 강명희 역(하서, 2014), 179.
2) 이 글은 2024년 4월 정주희의 오픈 스튜디오 현장을 위해 쓰였다. 마침 당신이 현장에 있다면,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이 담긴 <Breathing Project> 영상, 머리 위에 걸린 실 그리드 <In Tempo>를 볼 수 있을 것이다.
3) “나는 거기 서 있을 것이며, 나의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178.
4) 영상 속 정주희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책이 미국의 정치권력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노엄 촘스키의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서구 패권주의를 지적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일제강점기의 비참한 현실을 살아낸 시인 김수영의 전집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서적은 권력과 위계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그에 억눌린 개인의 소외를 시사한다.
5) 가야트리 스피박 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태혜숙 역(그린비, 2013), 423-28.
7) 정주희 작가 인터뷰, 2024년 4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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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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