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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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서른 번째 뉴스레터] 스타팅 블록: 첫 번째 블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는 서른 번째 레터부터 서른다섯 번째 레터까지 2022년부터 이어온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x 미술사학과 교류모임 ‘블록메이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스타팅 블록: 비평교류'의 결과물을 발행한다. 앞서 에포케 레테는 2023년 비평 교류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두 차례 레터를 발행한 바 있다. 2024년에는 외부 기고의 형식으로 비평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비평가 x 작가로 이뤄진 15팀의 비평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에포케 레테는 비평가와 작가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비평 교류를 지지하며, 향후 다양한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 담론의 장을 확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포케 레테 x 블록메이트* 기획: 최은총 진행: 김수홍
* 이 글들은 2024년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오픈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2024.04.24(수) - 04.28(일)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현장에 비치되었습니다.
[① 지긋지긋하고도 아름다운 몸에게 바침] 김송미 비평가 x 김영재 작가
[② 눈의 날갯짓] 윤다혜 비평가 x 이안진 작가
[③ 내가 나의 창조주일 때 해방하는(liberating) 몸] 임지윤 비평가 x 왕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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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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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체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자극에 노출되어 있다. 외부의 자극은 인간에게 때때로 폭력적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회피하거나 이들에게 적응하려고 시도하다가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충격의 강도에 절망하기도 한다. 김영재의 작업은 이렇게 자극에 반응하는 ‘몸’과 이 몸이 느끼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신체의 은유로 사용된 가래떡과 라텍스는 모두 본래 하얗고 부드러운 재료로, 습도와 빛 등 외부 환경에 취약하다. 이들을 불에 그슬리는 김영재의 작업 방식은 마치 자기 몸에 불을 대는 가학적인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가학성을 통해 지쳐 도태되려고 하는 육체 자체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외부 자극으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작품을 보는 관람자에게도 전달된다. 관람자는 매달린 가래떡 조각이 떨어져 큰 소리를 내거나 떨어진 가래떡을 밟았을 때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한다. 이때 그가 겪는 놀라움은 작품에 내포된 몸에 대한 불쾌에서 기인한다. 직접 몸을 연상시키는 작품에서 분리된 재료가 마치 몸에서 나온 불순물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순물이 제거되고 드러난 뼈대의 선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느껴져 작품이 가진 에너지의 흐름이 맹목적인 우울로 향하지 않는다. 이처럼 김영재는 불쾌가 특정 대상에 대한 거부감, 무력감을 유발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피하거나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게 함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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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김영재, Be skin and bones, 2023, 가래떡, 철근, 철판, 탱크지, 176x176x17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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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김영재, Immortality series 1-20, 2022, 가래떡, 레진, 17x30.5/ 17x2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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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쾌의 양가성에 주목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불행과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이 한편으로는 삶의 욕망도 없애버리는 고통을 유발하지만, 오히려 그것에 대해 체념하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울로 인해 주체가 존재의 무의미와 과거의 외상들을 계속해서 검토하고 그것에 동요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불쾌와 관련하여 크리스테바가 주장한 아브젝시옹(abjection) 개념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혐오감이자 반항심을 의미하는데, 김영재의 작품에서 이처럼 경계가 모호한 아브젝시옹이 드러나는 장소는 각각 삶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려는 충동이 공존하는 몸이다. 주체가 아브젝트(abject)한 대상을 통해 존재, 의미, 언어, 그리고 욕망을 가능케 하는 결핍을 인지하듯이, 김영재의 작품은 몸의 무력감으로 인한 우울과 그 우울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투쟁을 동시에 담는다.
손상된 상태로 제시된 재료와 형태를 유지하려는 재료의 병치, 즉 탈락과 지탱의 대조를 통해 작가의 작품은 아브젝트한 몸으로서 현현한다. <Be skin and bones>(2023)에서 떨어진 가래떡은 신체에서 탈락하는 물질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가래떡 부산물을 활용해 제작한 <Immortality series>(2022)는 유기체적인 생명력과 견고함을 지닌다(도 1, 2). 가래떡과 구멍 난 라텍스가 함께 제시된 <Ingrown>(2023)은 지쳐버린 몸, 또는 시체와 같은 인상을 주지만, 막을 뚫고 자라 나오려는 듯한 가래떡과 가는 실과 같은 부분으로 철판 프레임에 매달린 라텍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도 3). 쇠사슬과 볼트, 레진으로 만들어진 구조에 가래떡을 꽂은 <Newborn>(2024)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기관인 척추와 갈비뼈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갈비뼈에서 그을린 가래떡이 떨어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후 육신에 뼈만 남게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하지만 반대로 탯줄처럼 늘어진 쇠사슬이 갓 태어난 사람의 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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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김영재, Ingrown, 2023, 가래떡, 레진, 라텍스, 스테인리스 프레임, 42x2x29.7x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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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김영재, Newborn, 2024, 가래떡, 레진, 볼트와 너트, 쇠사슬, 40x48x2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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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가 제시하는 몸은 주체를 위협하는 자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지만, 동시에 이 자극은 주체에게 다가올 위협과 그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 몸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 또 그 거부감을 수용하고 살아나려는 의지가 동시에 투영되어 있고, 이 몸은 언제나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내부로부터 뻗어나가려는 에너지가 중첩된 공간에 놓이게 된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있는 듯한 긴장 상태에서 작품은 거부감과 희열을 동시에 전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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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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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갤럽(Jane Gallop)은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에서 선형적이고 규범적인 시간성에 저항하기 위해 “질서 정연히 배치되지 않은 순간에 초점을 둔 비틀어진 시간성”이라는 의미의 퀴어 시간성(queer temporality)을 제시한다.1) 이안진의 판타지 세계관은 이러한 퀴어 시간성을 바탕으로 정상성의 세계로부터 비끼어 선 존재들의 서사를 구축한다. 자신이 태초부터 불안정하고 여린 존재로 태어났음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죽음을 조우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에 이들에게 정형화된 생애 경로를 지시하는 직선적이고 전형적인 시간성은 한없이 무의미하다.
탄생은 곧바로 죽음의 계기가 되어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들에게 비극의 장막을 드리운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생애 최후의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를 반드시 경유하는 시간과 죽음뿐만 아니라, 규범적인 시간관이 요구하는 정상성마저도 이 존재들에게 고통을 안긴다. 사회는 일생에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과 행위를 규정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정상성의 범주 내로 포섭하고 통제한다. 그렇기에 삶 속에 산재하며 내면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사회 규범은 이들의 자아를 뒤흔들고 뿌리 없는 존재 방식을 더욱 위태롭게 한다. 이는 작품에서 하늘로 치솟는 불길, 쏟아지는 유성우, 황폐한 땅 등 삭막하고 재난적이기까지 한 주변 환경으로 비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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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이안진, <구멍은 시들 걸 알면서도 꽃을 피웠다>, 2024, 캔버스에 유화, 130.3 x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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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진의 근작은 이러한 비극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고정된 정상성에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연약한 존재들의 연대와 사랑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주제 의식과 더불어, 존재의 유한함으로 말미암은 비극성이 대두된다. 그러나 이 존재들은 비극에 짓눌려 절망과 슬픔 속으로 침잠하기보다는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수호한다. 이안진은 퀴어 시간성의 시각화를 통해 제도화된 규범적 시간성의 해체를 실험하고 판타지적 존재들이 필멸의 비극을 마주하는 방법을 묘사한다.
일례로 <구멍은 시들 걸 알면서도 꽃을 피웠다>(2024)에서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과감히 가로지르는 틀은 비극적 분위기를 강화하는 장식적 장치임과 동시에, 각기 다른 서사가 진행되는 공간을 구획하는 선이자 그 자체로 또 다른 서사를 담지하고 있는 장소이다(도 1). 화면에 묘사된 서사들이 전부 동일한 시간의 흐름 아래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는 틀의 구분으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그렇기에 한 화면에서 펼쳐지는 여러 서사는 별개의 사건으로 발생하는 듯 보이다가도, 한 공간의 시간이 다른 공간의 시간과 중첩될 때면 둘 사이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나간다. 생명체가 들판에 번진 불길을 피해 물가로 달아나는 와중에도 세계는 스스로를 구멍 내어 다른 공간의 척박한 땅에 물을 주고 불을 끄려 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 다시 말해 현존재의 모든 존재 가능성을 능가하는 가능성이자 현존재를 죽음을 향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에, 현존재는 죽음과의 관계를 향유함으로써 실존의 가치와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비틀어지고 뒤엉킨 시간적 순서 속에서 주체들은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코앞에 닥쳐온 죽음의 가능성을 목도하면서도 새 생명을 피워 내고 지켜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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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이안진, Morphin’ time, 2023, 캔버스에 유화, 80.3 x 1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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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안진의 작품 곳곳에는 나방이 빈번히 등장한다. 완연한 봄의 정취 속에서 나비가 자아내는 산뜻한 심상과 견주었을 때, 나방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언캐니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나방들은 정상성의 세계인 에덴동산의 바깥에서 태어난 이브의 감정에 공명하듯 주변을 유유히 유영하고, 이윽고 이브와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 양식을 시도한다. 나방의 날개는 이브를 공중으로 띄우며 이브의 눈은 나방의 날개 위에서 뜨인다. <Morphin’ time>(2023)에서 깜박임 대신 날갯짓을 시작한 눈은 그 자체로 반규범적이고 퀴어하다(도 2). 이종 간의 결속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가르는 경계선이 희미해짐에 따라 이들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시간이 주는 비극과 아픔을 견뎌낼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서사에서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탈피한 대안적인 시간이 지속될 수 있는 한 눈의 날갯짓은 계속될 것이다. 마지막 한숨을 내뱉을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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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인 갤럽,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섹슈얼리티, 장애, 나이 듦의 교차성』, 김미연 역 (현실문화, 2023),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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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창조주일 때 해방하는(liberating) 몸
임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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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레테 x ‘스타팅 블록' 미술사학과x서양화과 비평교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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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늘어뜨린 땋은 머리카락 옆으로 자유롭고 유연한 여성의 몸이 그려진다. 주인공의 오묘한 자세와 눈빛은 닿고 싶은 끌림을 자아낸다. 작가 왕칸나(1999 ~ )는 2024년 4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리는 이화여자대학교 오픈 스튜디오, 《그려봐요, 대학원 숲》에서 회화 및 드로잉을 선보이며, 작품 제작 과정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왕칸나의 회화는 부드러운 곡선과 최소한의 색으로 표현되었음에도 내면의 감각을 관철시키는 강렬한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인간의 몸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두 팔, 두 다리, 얇은 솜털의 피부, 분홍색 입술 등 먼 과거 우리 조상으로부터 그 형상이 유지되어 왔다. 내려져 오는 것은 외양뿐만이 아니다. 심리학자 마크 월린(Mark Wolynn)은 자신의 책, It Didn’t Start With You을 통해 부모 및 전 세대의 정신적 문제가 아이에게 유전적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우리는 태아일 때부터 부모의 감정을 물려받으며, 삶은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를 전해준다.1)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겉모습, 속마음, 생각, 사회적 역할 모두 나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부모의, 조부모의, 조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나는 곧, 나 자신의 창조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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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왕칸나, Don’t Pet, 2023, 종이에 혼합재료, 45.5x37.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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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왕칸나, On the Shyrdak, 2024, 나무판에 템페라, 65x5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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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해방감’이다. 왕칸나의 작품 속 대상들은 해방의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자세, 인간과 동물의 몸이 합쳐진 반인반수의 형상들은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느껴지는 괴리를 해소하는 과정에 있다.2) 작품 <Don’t Pet>(2024)과 <On the Shyrdak>(2024)이 그 예이다(도 1, 2).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이 존재들은 낯설고 언캐니(uncanny)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인간 사회가 지닌 단단한 틀을 깨부숨으로서 시원한 자유를 보여준다. 또한 체모로 뒤덮인 여성의 모습은 체모 제거 문화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체모는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고, 특히 여성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3) 사회가 부여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듯 작품 속 존재들은 털에 휩싸인 채 유혹적인 눈빛을 선사한다.
작가는 특히 사회가 부여한 이분법적 틀에 관심을 둔다. 인간.자연, 남.녀, 이성애.동성애, 백인.유색인 등의 관계들은 마치 법칙처럼 나뉘어 불균형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낳는다. 작가는 반복되는 불균형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4) 오픈 스튜디오에서 작업 과정을 선보이는 회화 작품 또한 이를 표현하였다. 땋은 머리는 작가의 고향 키르기스스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키르기스스탄 부족 40개의 통일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처녀의 순수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머리를 땋는 행위는 여성의 처녀성을 중요시하는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출발하였으나, 여성들끼리의 관계를 돈독히 해주어 공동체의 윤활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5) 작품에서 작가는 땋은 머리를 자유로운 여성의 몸과 함께 위치시키는데, 이는 마치 땋은 머리의 전통은 유지하되 이를 차별적 굴레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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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왕칸나, Thank You For A New Sister, 2023, 종이에 혼합재료, 21x1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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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대의 모습은 작가의 드로잉, <Thank You For A New Sister>(20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도 3). 작품 속 여자 아이들은 곧 맞이할 동생을 함께 기다린다. 손을 맞잡고 서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키며, 곧 다가올 동생의 모습은 한 마리의 새와 같다. 자연적 대상을 활용하는 서정적인 감수성은 작가가 평소 영감을 얻는 시에서부터 온 영향일 것이다. 작가는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 Мцыри를 언급한 바 있다. 러시아 제국 식민지 시대에 납치당한 한 남자, '노비스’에 대한 시로, 그는 고향을 찾으려고 도망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 속에서 3일을 보내게 된다. 왕칸나는 노비스가 야생에서 동물처럼 살아간 내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가 표범과 싸우는 장면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인간의 충동과 사람을 공격하는 표범의 충동이 서로 겹쳐 보이는 것을 경험했다. 이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집을 향한 욕망에 대해 고찰하게 된 계기였다. 마찬가지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 작가는 시의 주인공 노비스처럼 충동을 느끼며 자연 속 존재가 되곤 한다.6) 어느 땅에서든 살길을 찾아가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해방을 향해 울부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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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k Wolynn, It Didn’t Start With You, (New York : Penguin Books, 2016), 60.
2) 작가의 스테이트먼트, 2024.
3) 왕칸나, 「낯익은 낯섦」, 2023, 17.
4) 위의 글, 5.
5) 작가와의 인터뷰, 2024.04.03.
6) 작가와의 인터뷰, 2024.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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