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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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아홉 번째 뉴스레터] 물고기에게 물에 대하여 묻는 일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야스코 토요시마는 '예술'이 새로운 논리를 발명하거나 창조할 수 없으며, 단지 이미 존재하는 논리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 담담하게 되뇐다. 결국 그가 주장하는 예술의 존재 가치는 자칫 무형으로 남을 수 있는
현실의 관습, 무엇보다도 독단적인 교육 시스템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끄집어 냄으로써 무의식적 일상을
‘의식의 영역’으로 변모시키는 것일 테다. 물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와보지 않은 물고기는 물에 대하여 헤아려 볼 수 없다. 그러니 비록 그 과정에서 숨이 막혀 헉헉 거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잠시나마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주위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혹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공고히 존재하더라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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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받은 인문학 교육의 진가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즉 허구한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 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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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5년 케니언대학 졸업식 축사를 다음과 같은 우화로 시작했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친다. 그가 어린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니?” 그와 헤어지고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시 말없이 헤엄쳐 갔는데, 문득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한다. “도대체 ‘물’이 뭐야?”2)
물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작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고기. 이 비유를 통해 월리스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물) 대부분이 늘 비슷한 일상과 그것의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컨대 ‘일상으로 점철된 현실’은 생각의 대상으로 자리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도 월리스의 이야기 속 물고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다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가, 실제로 우리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버텨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며 세상을 어떻게 해석할지 보다 주체적으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스코 토요시마(Yasuko Toyoshima, 1967-)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사물들을 변형시킴으로써 당연시 여기던 ‘현실'을 해석해 볼 여지가 있는 무언가로 바꾸어주는, 다시 말해 생각의 전환을 발동시키는 작가로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학교교육, 사물과 도구의 메커니즘, 경제활동, 다양한 일상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각과 관습을 지배하는 틀과 규칙을 재검토하고 재해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불가피하게 내면화되고 자동화되어온 것들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의 사고 패턴과 사회,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일상의 규칙과 시스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관련하여 토요시마는 도쿄예술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한 교수가 비평회에서 "왜 네모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3)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작가는 이윽고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 또 자신이 배워왔던 예술 교육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던 중 대학 서점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이무라 타케히코의 책 '시각적 실험을 위하여(映像実験のために)'를 발견했다. 네모난 원고지를 영화의 악보로 사용한 실험적인 작품에 대해 읽으면서 그는 하나의 표현이 다른 형식으로 대체될 수 있고, 또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며 살아가는 체계와 규칙도 예술적 표현으로 거듭날 수 있음에 천착하게 된다. 특히 학습 체계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며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길러주지 못하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작업에서 드러내기에 이른다.
<Answer Sheet>(1989-90)는 답안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객관식 답안지의 지정된 ‘빈칸’을 채우는 대신 ‘빈칸 바깥’에 연필로 전체 영역을 표시하였다(도 1). 이를 통해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고사시킨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내는 객관식 정답 찾기 시험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객관식 문제는 출제자의 의도대로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의도 외의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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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Answer Sheet, 1989-1990, Collection of the artist Photo: Kenji Morita. Installation view from “Yasuko Toyoshima: Origination Method” 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2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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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토요시마는 어린 시절이나 초등학생 때 사용하던 재료를 가져와 주입식 교육 방식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는 오브제로 전환한다. 이를테면 색연필을 가져다가 가운데를 깎아 연필심을 납땜한 두 개의 연필처럼 보이게 만든 '연필' 연작 시리즈를 살펴볼 수 있다(도 2). 이때 연필은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연필이 되는데, 안쪽을 향한 심이 부러지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자' 시리즈의 경우 자, 각도기 및 기타 측정 도구를 오븐에서 가열하여 왜곡된 모양으로 비튼 작업이다(도 3). 두 시리즈 모두 작가는 교육 환경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는 사물들을 불균형하게 만듦에 따라 기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듯 토요시마는 문구류와 같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며 언뜻 중립적이며 매우 친근한 사물들의 역설적인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일상에 파열의 순간을 선사하는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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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Pencil, 1996, 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Photo: Shizune SHIIGI. |
(도 3) Ruler, 1996-1999, Collection of the artist, Photo: Yuichiro Ohm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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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토요시마의 소재는 점차 친숙한 학습 도구에서 사회 시스템 자체로 전환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특히 보다 은유적인 방식으로 일상에서 쉽게 간과하고 지나쳐버리고 마는 부분들을 가시화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게 만든다. 이를테면 <패널>(2013-)은 캔버스나 패널의 뒷면에 프레임을 연결하여 작품을 분해해야만 볼 수 있는 밀폐된 공간을 보여주는 작업이다(도 4). 그는 패널을 비스듬히 걸음으로써 원래는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진 패널의 뒷면을 관람객이 작품의 측면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라는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2016)의 말처럼 ‘뒷모습’은 숨겨져 있던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며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공간으로 오히려 앞면보다 많은 ‘진실’을 보여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4) 따라서 패널의 뒷모습을 조명하는 이 작업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규칙과 시스템 그 너머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을 전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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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Panel, 2013-, Installation view, “Yasuko Toyoshima: Origination Method” 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Tokyo, 2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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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토요시마는 '예술'이 새로운 논리를 발명하거나 창조할 수 없으며, 단지 이미 존재하는 논리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 담담하게 되뇐다. 결국 그가 주장하는 예술의 존재 가치는 자칫 무형으로 남을 수 있는 현실의 관습, 무엇보다도 독단적인 교육 시스템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끄집어 냄으로써 무의식적 일상을 ‘의식의 영역’으로 변모시키는 것일 테다. 물 밖으로 단 한 번도 나와보지 않은 물고기는 물에 대하여 헤아려 볼 수 없다. 그러니 비록 그 과정에서 숨이 막혀 헉헉 거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잠시나마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주위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혹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공고히 존재하더라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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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셸 투르니에, 『뒷모습』, 김화영 역 (현대문학, 2020),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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