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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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두번째 뉴스레터] 어긋난 세계에서 살아가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두 번째 레터는 송상희, 박관우 작가에 대한 비평이다. 송상희와 박관우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 이 어긋남은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에서 출발하거나,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서 시작한다.
[① 송상희 작가 비평] 인식론으로서의 몽타주, 뒤틀린 영원에 잔존하는 예술, 그리고 당신과 나
[② 박관우 작가 비평] 박관우의 ‘현상(Rendering, phenomena)’된 세계-제 3의 시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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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으로서의 몽타주, 뒤틀린 영원에 잔존하는 예술, 그리고 당신과 나
박예린
이 글은 작가 송상희(Sanghee Song)의 개인전 《자연스러운 인간 Homo Natura》 (서울시립미술관, 2021.12.16.-2022.2.27.) 을 중심으로, 인식론으로서의 몽타주가 어떻게 역사 서술과 시간 감각의 재인식을 이끌 수 있는지를 밝히고, 그 과정에서 주체와 재현의 윤리의 문제를 다루어 ⏤ 인류의 역사와 까마득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아우르는 우주의 역사 ⏤ 시간 속에서 당신과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성찰하고자 한다.
1. 인식론으로서의 몽타주
전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최초의 성서적 역사인 창세기의 알레고리인 〈사과 Apple〉(2021)로부터 그 대서사를 시작한다. 일종의 디지털 ‘삼면 제단화(triptych)’와 같은 3채널 오디오 비주얼 설치 형식으로 담기기에는 다소 과격한 그 내용은, 베어 물은 사과 한 입으로 인해 ‘선악의 저편’에서 방황하게 된 인류의 혼란, 혐오, 소외의 단편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도 1). 스파이와 동성애자라는 비난에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베어물고 세상을 등진 컴퓨터 과학자의 말로 그리고 백설공주의 독사과, 어느 날 갑자기 갑충으로 변신하여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죽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속 주인공의 이야기와 실험용 동물들, 자신의 연구 대상인 지구와 원자핵을 두고 당국의 정치적 결정과 학자로서의 신념 사이에서 갈등했던 16세기와 20세기의 과학자, 이들의 이미지가 각각의 스크린에서 ‘단속적’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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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사과 Apple>, 2021, Three-channel Video Installation, Color, Sound, 15 min. 15 sec., 사진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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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정확히 맞붙이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탄력 있게 배열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맺고 있는 몽타주이다.1) 송상희 작가는 이전의 작업에서 근대국가의 정체성에서 ‘구성적 외부’로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기념비와 권력자 등 권위의 표상을 투명하고 연약한 테이프와 같은 재료 혹은 작가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복제하거나 패러디 함으로써 선형적 거대 서사로서의 역사에 균열 내기를 시도해 왔다. 반면 몽타주 기법은 그가 개인에서 가정으로, 국가로, 대륙과 지구의 차원까지 문제 의식을 확장하면서, 리서치와 아카이브 연구에 기반한 2010년 중반부터의 디지털 미디어 작업에서부터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 〈사과〉에서도 역시 드러나듯, 송상희의 최근 작업에 대한 “몽타주 기법의 파편적 성격에 치우치는 경향”을 지닌다는 평가는 그런 면에서 일견 정당해 보인다.2)
그러나 우리가 작가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몽타주를 생경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우연적 조합이라는 제작 방식을 지시하는 용어를 넘어서 타인과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일종의 인식론적 태도로 이해한다면, 광고, 퍼포먼스, 공공미술, 기념비적 설치의 형태를 넘나들었던 이전 작업을 포함하여 작가가 작업세계 전반에서 몽타주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에게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합이 만드는 몽타주는 세계의 떳떳치 못한 셈법을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과 간극이라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변증법’으로 가름하거나, 공통의 척도 없는 것들로부터 더욱 거대한 본질적 구조를 ‘상징’적으로 유비하는 식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지각’을 경유해서만 사유될 수 있는 경험,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시간성’을 지닌 몽타주이다.3) 또한 그것은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이미지에 대한 경험이라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송상희가 직조하는 몽타주는, 작품 속에서 속절없이 중첩되는 어긋난 이미지와 텍스트 아카이브의 변증법적 구조를 통해, 과거-현재-미래가 중첩된 시간으로 우리를 이끄는 태도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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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꿈 Dream〉 2021, Single-channel Video and Multi-media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 사진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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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뒤틀린 영원에 잔존하는 예술
시간 - 이미지를 통해 경험하는 다중의 시간 감각은 연대기적 역사관을 뒤흔들고, 역사학으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지식’ 외에도 ‘무의식’을 도입하게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꿈 Dream〉(2021)은 송상희 작가 본인이 말하듯,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라는 “모든 시간이 내 옆에 있는” 시간 감각에 관한 내용이다(도 2).
카카오톡 메시지, 복제된 미술품과 모조 바위, 그리고 단채널 오디오 비주얼로 구성된 혼합 매체 설치 연작인 〈꿈〉은 미약한 빛을 따라 우연히 들어간 다른 차원의 평행세계로서의 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꿈은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답고 행복한 몽유도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보통 사람에 비해 턱없이 조그만 데다가, 제 작은 몸을 감싼 옷이 아니었다면 너무 투명해서 존재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을 유령 같은 인간들이 고시원 방 한 켠과 2호선 구의역 플랫폼에 고정된 음울한 세계이다.4) 특히 역사(驛舍) 내부에 맥락 없이 놓인 바위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로 소모되어 죽음을 맞이한 ‘전자벌레’인 인간이 화석이 되어 20억 년 후에는 우주를 떠도는 소행성이 되었다는 설명으로 정리된다. 〈꿈〉의 마지막 장면은 나풀거리는 천조각인지 인간인지 모를 그것과 한때 인간이었던 둔중한 화석을 병치한다(도 3). 너무나 부자연스러워서 지하철이라는 일상적 공간조차 생경하게 만드는 이 조합의 진원은 숭고함과 두려움이다. 잔인하도록 광막한 우주의 세월에 함께 존재할 바위에 견주자면, 인간의 생리학적 육체에 허락된 시간은 너무나 미미한 찰나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필멸과 종말론적 미래를 암시하기에 이 장면은 더욱 더 재난과 같이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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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꿈 Dream〉, Still cut, 2021, Single-channel Installation, Color, Sound, 20 min. 20 sec., ⓒ Sanghee S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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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조건과 이들 사이의 20억 년이라는 지고한 시간을 무화(無化)하지도, “바위를 프롤레타리아화”함으로써 꿈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에 던져놓는 뭉툭한 병렬을 택하지도 않는다.5) 인간과 바위의 아득한 시간의 간격을 묶어주는 것은, 죽음 이후의 인간이 육체가 스러져 흙과 바위의 일부로 회귀할 것이라는 지표성, 곧 ‘전자벌레’ 화석이 될 인류의 필멸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돌표면에 선명하게 잔존하는 라스코 동굴 벽화의 존재와 같이, 인간의 감정이 충적된 물질로 역사에 영영 남게 될 상흔으로서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제목 그대로 〈꿈〉은 명백하게 정신분석학에서의 무의식의 구조와 이미지의 운명을 유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고립계에서 에너지가 새로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임을 밝히는 ‘열역학 제1법칙’처럼, 인간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깊은 슬픔과 공포의 기억이 퇴적된 상태로 ‘억압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6)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잔존하다 사후적 순간에 현재의 지층에 비집고 올라와 등장할 징후가 될 것이다.
오디오 비주얼에 등장하는 장-프랑수아 밀레의 〈만종〉(1857-59), 파울 클레의 〈산 정상 위에서〉(1917),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아키텍톤 고타〉(1923), 그리고 모조 바위가 작품 속 ‘꿈’에서 불쑥 솟아나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전시장에 현현하여 실재하는 오브제로서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것은 이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질 운명이지만, 무한한 세월이 지난 “최후의 순간에 살아남는 것은 멈춘 시간 속” 이미지이다.7) 과거와 현재에 잔존했던 이미지를 생각하고 미래에 도래할 징후를 기다리면서, 그것의 영적인 힘을 작가는 가슴 깊이 믿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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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고 당신과 나
한편으로 이러한 이미지 앞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 만약 이미지에 대한 완전한 조화, 완전한 지성, 완전한 의식을 가진 통일적 인간이 아니라, 단선적 역사를 거부하며 찢기고, 모순되고, 무의식적인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몽타주라면 더더욱.
송상희는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과거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위치에서 자신의 작품이 소개되는 과정이 꽤나 괴로웠다고 회고한다.8)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과 모순의 구조를 빗면의 각도로 포착하겠다는 작가의 태도는, 역사 쓰기의 문제에서 재현과 주체성의 윤리적 문제를 환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 어떻게 가벼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변강쇠가 The Story of Byeongangsoe 2016 : In Search of Humanity〉(2015-6)의 ‘변강쇠와 옹녀’의 설화를 마지막으로 한 패러디의 전략에서 종교적이리만큼 엄숙한 스타일로의 변모는 예술가 자신의 윤리주의적 성찰의 발현일지 모른다.
한편으로 작가는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 Come Back Alive Baby〉(2017)에서 취했던 인간적 취약성에 대한 연민으로 침잠하지도 않는다. 슬픈 타자에 대한 연민이 곧 우리의 무능력함을 한탄하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면, 혹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자기방어의 소산이라면, 슬픔을 끝낼 방법은 죽음 뿐이다. 그 자리엔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존재하는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을 대신할 것이다. ‘불 타죽는대도 상관없는’ 전자벌레처럼 우주의 숭고한 빛을 향한 레퀴엠을 연주할 것인지, 혹은 타인을 ‘업고 말걸기’할 것인지의 기로에서, 작가는 후자를 택한 듯 보인다.9)
이번 전시의 구성만을 보건대, 〈사과〉에서 그것이 ‘선악의 저편’에서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진실과 거짓 등의 이분법을 근원적 내러티브를 유비하여 완곡히 거부하는 모호한 태도로 드러났다면, 〈기거, 너, 그리고 나 Geegers, you and I〉(2018)는 네덜란드 이민자인 한국인 여성으로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화면에 병치하여 현재와 과거 사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누가 과연 가해자이며 피해자인지를 살핀다. 물론 이는 누가 옳고 그른지를 명명백백히 밝혀내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기거(Geeger)’라는 가장 강한 괴물로 의태해야만 살아남는 사회의 질서 속에서, 개인들은 죄를 짓기도 상처받기도 하면서 결국 타인이 괴물인지, 내가 괴물인지 모르는 순간에 이른다. 결국 ‘나’와 ‘너’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과거와 현재에서 “어디가 어떻게 맺힐지 모르는 수많은 관계”로 정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0)
주디스 버틀러와 수전 손택은 허무주의의 위험을 뒤로하고 슬픔과 애도 속 윤리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들을 경유하여 〈업고 On My Shoulder〉(2021)를 바라보노라면, “꼭 살아야 하나” 싶다가도 무력함을 극복하고 넝마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혹은 당신이 너무 낯설거나 미워도 힘 닿는 데까지 마음을 내어줘 ‘업고’ 가겠다는 브레히트적인 생의 의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16등분된 프레임 각각에서 파열하고 공명하는 목소리들이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가 결국 ‘당신의 질문으로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고 답하는 〈말걸기 Talk to You〉(2021)의 과정과 꼴을 같이하는 것이다.
미시적 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의 원리가 우주의 구조를 관찰하는 렌즈가 되어주듯, 나약하리만큼 사소하고 미미하며, 넌더리가 날 정도로 구저분하게 서로를 혐오하고 사랑하는 인간도 아득한 우주의 시간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송상희가 말하듯 “‘자연스러운 인간’이란 지리멸렬한 인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자기 욕망을 알고 타협하고자 노력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이기에.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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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의 작가상, ⌜Song Sanghee / 2017 Korea Artist Prize⌟, https://vimeo.com/233762752, 2022년 10월 20일 검색.2) 백지숙, 「Critic 1」, http://koreaartistprize.org/project/송상희/, 2022년 10월 22일 검색.3) Georges Didi-Huberman, Devant le temps.4)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플랫폼에서 만19세 용역업체 직원이 열차와 스크린 도어 사이에 끼어 사망했다. 개인 과실로 인한 사망이라는 서울메트로의 해명과 달리, 해당 작업이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는 안전 규정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었다. https://v.daum.net/v/20160530204016605. ‘스크린도어 2인 1조 작업 규정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2022년 10월 20일 검색.; 2018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청계천 인근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당했다. 거주자들은 주로 주변 사업장의 근로노동자인 50대 이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해당 건물은 소방법상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는데다 거주민의 요청에도 건물주가 스프링클러 설치를 거부한 바 있어, 해당 사건은 더욱 큰 피해로 이어졌다. https://m.hani.co.kr/arti/society/area/869621.html#cb, ‘종로 화재 고시원, 스프링클러 설치 신청했으나 건물주가 거부,’ 2022년 10월 20일 검색.5) 곽영빈, ⌜돌은 세계를 갖는가?: 동시대 (한국) 미술의 암석적 전회⌟, http://www.busanbiennale2022.org/learn/journal/2/does-a-stone-have-a-world-lithic-turn-of-contemporary-korean-art#fnref1:23, 2022년 10월 20일 검색.
6) 송상희, 〈꿈〉(2021)에 삽입된 자막 내용.
7) 송상희, 〈블랙홀 생물체〉(2021)의 내용.
8) 올해의 작가상, ⌜Song Sanghee / 2017 Korea Artist Prize⌟, 위의 링크, 2022년 10월 20일 검색.
9) <꿈>의 한 장면은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하나의 시를 비춘다. 시의 문체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외벽에 붙은 시민 공모시를 떠오르게 한다; 별님, 별님 / 서쪽 밤하늘의 푸른 별님 / 부디 저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 불에 타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 저처럼 못생긴 벌레도 불이 붙으면 작은 빛을 내겠죠 / 부디 저를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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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의 ‘현상(Rendering, phenomena)’된 세계-제 3의 시선-에 대하여
최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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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 같았어요. 그 짧은 순간에.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1)
"어쩌면 평생 다시 만나지도 못할 사람 앞에서 왠지 모를 눈물이 나는 엄청난 경험" 2)
1)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17일 관객)
2)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19일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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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박관우(Kawnwoo Park, 1990-)의 작업은 일반적인 감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제시하여 작품을 보고 지각하는 데 의문을 던진다. 먼저, 박관우의 첫 개인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2020)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세상의 해상도를 ‘현상’할 ‘장치’-작품-를 제시한다. 전시장에서 감상자는 작가가 A~F의 알파벳으로 제시한 일련의 작품의 감상 순서와 방식이 적힌 글을 받는다. 해당글이 이끄는 대로 작품-장치로 대변되는-을 감상할 때 감상자는 미묘한 지각의 균열을 경험하게 된 다.3) 가령 A, <미확인 장면 Unidentified Scene>(2020)은 일부러 전시장 맞은편으로 주소를 잘못 고지 받은 관람객들이 망원경을 통해 전시장 안을 확대해 들여다보는 방식을 취하게 하거나, B, <닫힌계 3- 일 분에 한 바퀴 도는 원형 거울 Closed System 3 - The Mirror that rotates once a minute>(2019)은 둥근 거울에 점을 발견하면 그제서야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한다(도 1). 이렇듯 작가는 ‘장치’를 통해 ‘보는’ 방식의 밀도를 조정하여 인간의 지각과 인식을 재사유하게 하는 일련의 방식을 제공한다. 이런 방식은 박관우의 작품 세계 전반에 관통하는 ‘제 3의 시선’이라고 생각된다.
‘제 3의 시선’은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인 두 눈의 지각에서 어떤 ‘실재’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나, 꼭 작품 앞에(안에) 현존하게 한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적이다.4) 박관우는 ‘실재’와 현존 사이에서 ‘제 3의 시선’을 장치를 통해 현상(Rendering)한다. 그렇다면 이런 ‘제 3의 시선’은 무엇인지, 누구의 시선인지 질문해야 한다. 박관우 작가의 ‘장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재’의 영역이 존재하며, 그 ‘실재’에 대해 탐색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한 깨달음을 주는 듯하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장치’가 보여주는 시선은, 이 자체로도 이미 박관우의 시선에 한번 ‘현상(Rendering)’이 된 것이 아닌가?
사실 박관우에게 ‘현상’은 중요한 개념이다.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란 마치 사진을 찍은 이후 그 모습을 ‘현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이 과정에서 본질은 한 번 걸러져 카메라가 받아들인 빛의 양과 필름에 새겨질 수 있는 색감만이 사진에 남게 된다. 또한 ‘현상’에는 한글로 사진 현상에 해당하는 ‘Rendering’과 사물의 모양, 상태를 뜻하는 ‘phenomena’라는 뜻이 존재하며 작가의 작업에서 동음이의어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시하는 ‘현상’에는 두 가지 뜻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현실 안에서 현상(Rendering) 과정을 거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현상(Phenomena)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실재의 본질에 해당하는 날것의 데이터를 장치를 통해 지각하는 방식으로 제시함으로써 관람자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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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미확인 장면 Unidentified Scene>, 2020, Plinth, Binocular, Size Variable, 사진 출처 : 박관우 작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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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렇듯 작가는 장치를 활용해 인간의 지각과 인식에 대해 질문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찍히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시차가 있는 카메라와 모니터, VR, 인공지능 등을 활용하였다. <내일 Tomorrow>(2014)은 24시간 전, 같은 공간의 모습을 관객들이 쳐다보는 액자 표면에 프로젝션한 작품으로 2014년 12월-2015년 1월 두 달간 서울시민청의 출근 통로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액자 안에서 24시간 전, 같은 시각, 그 장소에 서 있었던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이어서 <타인 Stranger> (2017)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잠망경 구조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듯 보이는 구조물의 텅빈 구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이 보이게 된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2 Tell me that I'm here 2>(2019)는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착용한 두 명의 퍼포머가 외나무 다리의 양쪽 끝에 서서 서로를 응시하나, 사실은 상대방의 헤드셋에 붙어있는 가상현실 카메라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도 2). 퍼포머는 약 30분간 11m길이의 외나무 다리 위를 조심스레 걷는 와중 그들 스스로의 모습을 가상현실의 프레임 속에서 응시하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시선과 발끝의 감각이 혼합된 현실에서 자신을 응시하나 타자와 육체적으로 맞부딪히며 조우하게 된다. 이렇듯 박관우의 ‘장치’를 따라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현상(Phenomena)이면의 “인간이 확정할 수 없는 세계의 무한성”에 닿게된다.5) 이어서 박관우의 ‘장치’는 앞서 활용한 기계 장치를 포함하여, ‘현상’을 다루는 신체, 관계, 사건 등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박관우가 ‘장치’를 활용하는 방식은 실재가 드러나는 찰나의 순간들을 포착하거나 재현하는 것으로, 관람자에게 지각 방식을 제공하는 매개이지, 매체나 기술적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관우의 작업은 인간의 행동과 인지 전반을 예측한 후, 그 행동과 정서 그리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장치’인-물리적 환경을 포함한-‘상황’ 과 ‘사건’을 조성한다. 이처럼 박관우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장치’로 제시한 ‘제 3의 시선’을 인간의 행위로 조직하는 것으로 작품 형태를 이행해나간 것을 ‘사건’이라 칭한다.
박관우의 ‘사건’은 정동을 주창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56-)의 『가상과 사건 Semblance and Event: Activist Philosphy and the Occurrent Art』(2011)의 “사건발생적 예술”과 유사하다.6) 마수미는 “예술-형식은 ‘매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효과인 경험적 사건의 유형에 따라 분석”하는 것을 “사건발생적 예술”이라 칭한다. 따라서 박관우의 ‘사건’은 일반적인 매체의 분류 체계보단 마수미가 주장한 “지각작용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종류의 추상”인 “생성적”, “내재적” “유형학”으로 파악하는게 적절해 보인다.7) 작가에 따르면 ‘사건’은 복수의 ‘상황’들의 집합으로 이루어 져 있다. 작가에 따르면 ‘사건’은 관람자에게 작품을 구성할 권한을 넘겨주는 것이다.8)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관람자의 경험은 오롯이 개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람자가 작가가 구성한 ‘상황’에 응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치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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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내가여기에있다고말해줘2 Tell me that I'm here 2>, 2019
Performance of walking towards each other while wearing a VR headset and VR camera. Each camera is connected to the other performer's headset, so they can see themselves through the counterpart's camera. Size Variable, 사진 출처 : 박관우 작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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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난데없이 삶에 나타난 타인과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 <늑대와 함께 춤을 A Dance with a Wolf>(2021)에서 관객의 반응을 반영하도록 훈련받은 퍼포머와 관객은 수상한 장소에서 10분간 만나게 된다(도 3). 작가는 이런 환경적 조건, 즉, ‘상황’을 구성한다. 관람객이 경험한 전부 다른 ‘사건’은 개개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꿈같은 것이 된다. 또한 <클럽 리얼리티 Club Reality>(2022), <래빗홀2052 Rabbit Hole2052>(2022)에서 작가는 ‘상황’을 제공하되 참여자가 ‘사건’을 스스로 구축해가는 ‘워크숍’을 구성한다. 8-12주의 워크숍 기간 동안 작품의 참여자는 가상의 주체성을 생성해나가며 어떤 존재의 양태를 시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참여자들에게 매일 가상 정체성으로서 일기를 기록하게 하는데, 그 기록은 ‘증언’으로서 기능하고 ‘증언록’ 으로 편찬되어 스스로의 가상 정체성의 존재와 작품의 현존을 증거하게 된다. 두 워크숍 모두의 마지막 날 파티의 형태로 전시가 구성되며 가상 정체성으로 참여한 참여자들과 일반 관람객 들은 가상 정체성으로서 교류하는 파티를 경험하고 ‘증언록’과 영상 ‘증언’ 그리고 전시 서문과 전시 설명문으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게 된다. <졸다가 꾼 꿈 The Dream During The Nap>(2022)은 텅 빈 전시장에 안대를 쓰고 입장하는 전시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롯이 참여자만 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참여자들이 남긴 ‘증언’ 기록만이 전시의 의의를 설명해준다.9)
‘사건’에 속하는 작품은 작가가 제시한 일련의 상황 안에서 감상자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자기생성적이다. 또한 감상의 과정에서 감상자는 특유한 관계 안에서 정동(精動, affect)된다. 따라서 박관우의 작품은 시각적 감상을 관계와 정동의 범위까지 확대해 ‘삶’을 ‘현상’하려 했다는 점에서 예술 감상의 저변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안에서 박관우가 끊임없이 질문하는 “세계인식의 틀 자체”를 잠시 벗어나 “판단을 잠시 유예”하는 시공간을 창조한 것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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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늑대와함께춤을 A Dance with a Wolf>, 2021, Constructed Sitaution Size Variable, 사진 출처 : 박관우 작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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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확대된 감상이 사실상 세밀하게 조율된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박관우의 작품에는 매뉴얼이 뒤따른다. 이는 마치 교육과도 같은데, 작품 감상 이전에 메뉴얼을 숙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슨트가 연상되기도 하고(늑대와 함께 춤을), 리얼리티 쇼처럼 워크숍 참여자에게 매번 특유한 상황을 주기도 하며(클럽리얼리티, 래빗홀), 감상자에게 안대를 씌운 후 메뉴얼을-독특한 방식으로-읽어주고 입장시킨다는 점에서 최면을 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졸다가 꾼 꿈). 이런 일련의 교육을 받은 감상자는 작가가 제시한 감상의 태도를 취한 채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데 정답이 있을까? 일반 대중에게 난해하고 생소하게 여겨지는 현대미술을 ‘애초에 이해할 수 없으니, 느끼라’는 박관우 작가의 작품은 분명 감상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과정에서 촉발된 정서와 정동은 그렇다면 감상자 고유의 것인가?
앞서 언급한 브라이언 마수미는 사건발생적 예술을 “체험된 추상”, 즉 “활력 정동”은 “존재의 퍼펜셜(Potential)들”의 “매개 변수를 기술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 제시했다.11) 다시 말해 작가는 전략적으로 상황을 선별하고 활성화하는 “수행 범위를 설계”함으로써 관람자에게 “극한의 감각- 경험”, “강도적 경험”을 제공한다.12) 이 과정에서 감상자는 “공간 속에서 부유하는 그 순간”에 “자신에 대한 지각의 세계-정동적 연속의 비감각적 지각과 출현적인 경험(확정적인 말을 촉발하는 서사화 가능한 경험과 제스처를 촉발하는 도구화 가능한 경험)의 사이에 리듬-"를 체험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가 같은 상황을 제공했을 때, 세밀하게 조정되었다는 점에서 어떤 공통된 경험이 나올지라도, 그 안에서 “미시적 -간격”이 유발될 수 있다.
따라서 박관우 작가의 작품에서 개인의 특색에 따른 다양한 감상의 평이 나온다. 반면에 박관우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나, 작가가 제시한 방식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경험했음에도 무언가 촉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작품을 한 발짝 떨어져서 감상하는 자들을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13)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의 작품은 여타 다른 작품이 그렇듯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물질적 작품을 기록하기보단 감상자가 남긴 ‘증언’으로 작품을 기억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증언’은 다시금 글, 영상으로 기록된다는 점에서 편집되고, 고정되고 만다. 그러므로 필자는 ‘증언’을 남기지 않은 감상 과정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의 향유를 보고 싶다. 미끄러진 향유는 ‘현상’된 세계-제 3의 시선-가 사실상 감상을 이끄는 ‘장치’였음을 드러낸다. 결국 그 장치는 해부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장치의 구성과 작동 메커니즘을 알려주는 설계도-설계를 역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의 역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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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17일 관객). 2)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19일 관객). 3) 작가는 본 전시의 관람 동선을 알파벳 a-f 순서대로 제시하며 각 작품에 숨겨져 있는 “점”을 찾아보라 제안한다. 관람자에게 작품에서 동선의 의미와 점의 존재를 의식하며 작품을 스스로 추적하듯이 관람하게 된다. 박관우,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하여》, 2020, 스페이스38(현SAGA). 4) Christopher N. Gamble, Joshua S. Hanan, Thomas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Vol. 24, 2019,
111-134.이 논문에 대한 박준영의 한국어 번역본은 ‘호랑이의 도약’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다.http://tigersprung.org/?p=2494 (검색일: 2022.10.07.) 박관우가 작품에 채택하는 사변적 실재론은 신유물론에 속하나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몸문화연구소,『신유물론: 몸과 물질의 행위성, (필로소픽:2022), 12.“부정적 신유물론에 속하는 메이야수와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을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라는 비판점을 피해갈 수 없다. 메이야수와 하먼은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이들의 이론이 관념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물자체를 정신적으로 물질화한 프리드리히 셸링의 동일성 철학이나 물자체를 의지 의 운동으로 설명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혹은 20세기 앙리 베르그송의 생기론이나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5) 배혜정, 「세계를 현상하기 그러나 답을 유예하기-2022년에 박관우의 작업을 돌아보며」(2022), 5. 6)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과 사건 Semblance and Event: Activist Philosphy and the Occurrent Art』, (갈무리, 2016), 정유경 역, 150. 박관우는 인터뷰에서 마수미의 ‘사건’개념에서 자신의 작업 키워드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 어를 얻었다고 언급했다. 7) 앞의 책, 150-151. “이런 종류의 유형론은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변형을 생성하며 ... 새로운 역동적 형상들은 언제나 내재적으로 출현하고 있다.” 8) 박관우의 포토폴리오 중 발췌.“박관우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도처에 겹쳐진 채로 존재하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 없이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 는 이상한 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가 하려는 것도 결국에는 그 계기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뭉쳐져 있을 뿐인 원자더미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글마저 쓰고 있다는 일상적인 사실을 대단히 수상하고 특별한 일로 여긴다. 원자더미간의 피아식별이 이루어지는 이상한 세계의 흐릿한 경계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는 마치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처럼, 그 현상을 포착하고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 박관우는 이를 위한 장치를 만들고 상황을 구성하며, 장면을 연출하고, 특별한 사건을 기획한다.”
9) https://studiokwanwoopark.simplybook.asia/v2/(검색일 : 2022.10.20) 전시 소개글 중 발췌.
10) 배혜정, 「세계를 현상하기 그러나 답을 유예하기-2022년에 박관우의 작업을 돌아보며」(2022)
11) 브라이언 마수미, 140.
12) 앞의 책, 133-135.
13) 해당 글을 작성하는 필자는 박관우의 어시스턴트로 2019-2022 기간동안 근무하며 작품의 진행을 도우며 자료를 수집했다. 박관우의 ‘증언’은 작품 감상 이후에 수집되었으므로 중도에 작품 감상을 스스로 중단하거나, 매뉴얼을 숙지하지 않는 등 여타 이유로 증언이 수집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특히 글로 감상을 남기지 않은 증언은 수집되기 어려웠다.
14)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19일 16:30분 입장). 15) 박관우의 <늑대와 함께 춤을>(2021)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1년 10월 21일 17:20분 입장).
16) 박관우의 <졸다가 꾼 꿈>(2022)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2년 9월 20일 이지윤 관객).
17) 박관우의 <졸다가 꾼 꿈>(2022) 관객 도큐멘테이션 로우데이터 중 발췌. (2022년 9월 20일 Jazz039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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