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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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여섯 번째 뉴스레터] 서로의 불완전함에 기대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종이와 책은 투명한 매체인가?활자는 물질적 토대 없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에포케 레테의 스물 다섯 번째 레터는 1970년대 예술 형식으로서의 출판이라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매체 형식으로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한 울리세스 카리온의 관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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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기술 발전과 다변화하는 세계, 이러한 격동기에서 인간이 다채로운 흥분감과 동시에 많은 혼란으로 허우적대는 것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가령 물리적 제한을 극복하고 세계화를 현실적으로 이끈 기술 발전, 추상적인 실체였던 알고리즘이 개념화되어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 그 이면에 기계와 인간 사이를 횡단하면서 야기되는 수많은 영향에 두려움까지 엄습하게 된 것 말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어느 미래의 시점을 놓고 유토피아의 길인가 혹은 디스토피아의 길인가 하는 사안은 그리 명명백백 밝혀져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예술은 사회의 거울이라 하듯 이는 세계적인 화두인 만큼 국내외 할 것 없이 많은 작가가 채택하는 주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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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권병준, 춤추는 사다리들, 사다리, 모터, 레일, 가변크기, 2022 |
(도 2) 권병준, 오체투지 사다리봇, 사다리, 모터, 레일, 가변크기,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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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우선 기계-인간이라는 이 사이의 현상 자체를 파악하기 전에 전능함과 완전함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비합리적인 욕구임을 짚어가고 싶다. 이는 2023년 MMCA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권병준(1971-)의 인간과 비인간에 관한 본질적인 얘기를 다룬 작업에서 비롯된 생각이다(도 1, 2).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는 기계들은 하나같이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쓸모’가 없다. 인간을 닮아있는 이 기계들은 인간이 전능함에 대한 불가능한 열망으로 만들어진 실체일 뿐이다. 기계의 효용가치를 따져봤을 때 퇴화하지 않는 신체를 가진 비동물성, 타인에게 판단되지 않는-인간에게는 개인마다 감정과 이로써 판단되는 인성이 존재한다-순수성, 결핍이 없는 정상성은 그에 관한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병준의 쓸모가 없는 기계들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어 우리가 그러한 전능함을 기대했음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바랐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는 경험을 하게 한다.
왜 우리는 불가능한 완전함을 바라며 그 완전함에 도리어 인간이 잠식될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가. 권병준의 작업은 이러한 아이러니한 지점을 꼬집으며 ‘애초에 과학기술은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만들어져가고 발전해 가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그가 창조한 기계들이 마냥 기분 나쁜 좌절감과 수치심만을 주는 것이 아닌 건 그것이 인간을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우리에게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는 고통을 안겨주지만 이와 함께 모두가 완전한 이상을 확보할 수 없다는 안전성을 보장하기에 안온한 삶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어서고 앉고, 명상하는 등 어디에 오르는 기능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사다리는 '퇴화와 진보'라는 이분법적인 규정을 짓게 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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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필립 파레노,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헬륨, 마일라 풍선, 가변크기, 2022 |
(도 4) 필립 파레노, 여름 없는 한 해, 야마하 자동 연주 피아노, 인공 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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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술을 통해 인간의 이해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는 최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필립 페라노(Philippe Parreno, 1964-)의 개인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도 3, 4). 파레노의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부관장은 “파레노의 전시는 '보는' 전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하는 '공연' 같은 전시"라고 소개했다.1) 그의 말처럼 외부에서부터 미술관 안으로 이어지는 작업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설치작품 주위를 오가며 시각, 청각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관객과의 교감(interactive)을 유도한다. 생명력이 깃든 듯 파레노의 오브제들은 시각, 청각을 압도하며 그 공간 속에서 관객이 마치 전시장을 부유하는 타자가 되어 파레노의 자아에 침입한 듯한 느낌을 준다.
권병준이 기계를 인간화하여 우리에게 본질은 지각해 볼 기회를 전달했다면, 파레노는 자신의 파편적인 자아에 무단(?)침입한 인간들과 그의 기계(기술)가 자연스럽게 화해할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였다. 전시의 제목이 보이스(Voices)인 것처럼 그가 구현한 모든 오브제는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마치 인간에게 목소리가 그러하듯 오브제와 결합하여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그 존재를 드러낸다. 섬광 같기도, 해질녘 석양빛 같기도 한 주황빛으로 물든 공간 속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거대한 물고기와 녹고 있는 눈사람, 떨어지는 눈 속에서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와 번득하고 빛을 내며 작동하는 기계는 마치 서로의 영역이 없다는듯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이곳을 관객은 놀이터를 뛰놀 듯할 수도 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동심과 괴리감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이 교차하면서 혹자에게는 닥쳐올 미래가 유토피아일 수도,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는 묘한 상념을 촉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이동하는 가벽, 그리고 실제 인간을 기계화한 듯 기계 같은 소리를 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인터프리터를 통한 퍼포먼스 작업은 기술과 기계를 통제해야 한다-또는 할 수 있다-라는 기존의 믿음을 뒤엎고 인간을 그 속에 둘러싸여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낯설게는 느껴질지라도 폭력적이지는 않기에 '비인간-비정상'에 관한 기존 관점의 탈피를 유도하고 '기계-인간'의 공존의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가 일군 상상과 실존이 중첩된 세상은 우리가 그의 상상력 위를 걸으며 인간이 꿈꾸는 이상에 대한 염원이 그릇되지도 않았음을, 또 한편에 있는 현실 역시 주지해야 함을 일깨우게 한다. 이러한 양가적인 요소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이끈다는 것은 공동체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가 겪는 번민 속에 우리의 공통적인 열망이 담겨 있다는 핵심 때문이다.
권병준과 파레노의 작업에서 공통적인 지점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인간을 타자화시켜 비인간과 인간을 모두 공동체 안으로 수용하는 작은 사회를 보여준 것이다. 두 작가가 채택한 방법론이 다르듯 인간이 비인간과 연대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나 인간은 그 스스로 유한함과 유약함을 타고난 존재임을 인식하고 사회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세지를 찾아볼 수 있다.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를 회피하고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따라서 전능함과 완전함을 부추기는 사회는 인간의 불행을 초래할 뿐이다. 완전무결한 개인은 없기에 인간이 타자와 함께 상호교환과 호혜성을 바탕으로 꿈을 꾸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의 작품은 세계가 우리의 비합리적인 욕구를 채워주지도, 취약성을 보존해 주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문명 안에서 타자화되는 것들과의 관계를 놓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인간 역시 불안정하고 부분적인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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