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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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다섯 번째 뉴스레터] 울리세스 카리온: 매체로서의 책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종이와 책은 투명한 매체인가?활자는 물질적 토대 없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에포케 레테의 스물 다섯 번째 레터는 1970년대 예술 형식으로서의 출판이라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매체 형식으로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한 울리세스 카리온의 관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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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출판 문화는 예술 형식으로서 국제적인 흐름을 획득하였다. 전시 플랫폼 혹은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로써 출판사가 설립되었고, 대안적인 예술 형식으로서 다량의 잡지, 아티스트 북 등의 출판물이 발행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주도한 것은 딕 히긴스(Dick Higgins), 솔 르윗(Sol LeWitt), 에드 루샤(Ed Ruscha), 디터 로스(Dieter Roth) 등 다수의 예술가 뿐만이 아닌 아트 딜러, 큐레이터, 출판 기획자 및 편집자 등 예술 매개자들이기도 했다. 특히 아트 딜러이자 갤러리스트 세스 시겔롭과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인 루시 리파드의 출판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의 예술 출판이 1960년대에 예술의 기존 유통 경로의 대안을 찾고자 했던 제도비판 미술, 그리고 플럭서스와 개념미술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예술의 비물질화 경향과 관련이 있었음을 드러낸다.1) 이들의 실천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예술 출판의 결과물은 종이에 기록된 활자 언어의 ‘내용’ 만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1970년대의 개념 미술의 한 갈래로서 보통 다루어지는 예술 출판의 개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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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Installation of groupshow with G.J.De Rook, Ulises Carrión, Hetty Huisman and Pieter L. Mol, Coll. Pieter L. Mol, in the background works by Kristjan Gudmundsson and Ulises Carrión. |
(도 2) Photograph of Other Books and So, ca.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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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출판의 목표와 본질을 비물질화의 맥락에서 이해했던 당대의 경향과 달리, 출판 기획 및 편집자이자 큐레이터인 울리세스 카리온(Ulises Carrión, 1941-1989)은 출판물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 속성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독특성을 지닌다.2) 그는 암스테르담 최초의 예술공간인 인아웃 센터(In-Out Center, 1972-1974)(도 1)와 서점이자 갤러리인 아더 북스 앤 소(Other Books and So, 1975-1979)를 설립하였으며(도 2), 잡지 『에퍼메라 Ephemera』(1977-1978)를 발행하는 등 예술 매체로서의 책, 문학에서의 내러티브 전략, 인쇄 문화의 형식과 구조를 탐구하며 당대 유럽 전역의 아방가르드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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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세스 카리온은 「책을 만드는 새로운 예술 El arte nuevo de hacer libros」(1975), 「북웍스에서 메일웍스로 From Bookworks to Mailworks」(1978), 「북웍스 리비지티드 Bookworks Revisited」(1980) 등의 글에서 “언어에 대한 흥미”로부터 기인한 개념 미술가들의 출판물에 대한 관심과 “하나의 형식으로서의 책”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분명히 구분하였다.4) 전통적인 산문과 시의 저자가 글의 언어적, 문학적 내용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과는 달리,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책인 ‘아티스트 북’의 경우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5) 이는 순차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좌우로 텍스트를 읽을 수도 있다는, 예술 매체로서 책의 시공간적, 시각적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6)
다시 말해, 울리세스 카리온에게 책은 백과전서와 같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고 보존하는 기능만을 위해 탈매체화된 저장고를 넘어서 “모든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들의 총합”이자 자율적인 형식으로서의 매체를 의미했다. 그가 아더 북스 앤 소의 개점을 기념하며 발행한 엽서의 내용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도 3). “기타 도서, 비도서, 반도서, 의사(pseudo) 도서, 준(quasi) 도서, 콘크리트 도서, 개념 도서, 구조 도서, 프로젝트 도서, 일반 도서, 다양한 포스터, 엽서, 기록물, 카세트테이프” 등 장르와 내용이 아닌 형식 혹은 속성별로 출판물을 분류하는 엽서의 목록은 특히 출판 형식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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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Ulises Carrión, Other Books and So postcard, ca.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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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북의 제작에 있어 형식을 강조하는 주장이 무색하게도, 울리세스 카리온의 아티스트 북, 비디오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통일성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기 스크라에넨(Guy Schraen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본인이 직접 작업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에게 지침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업하였으나, 그 지침이 개념적인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고, 활자의 잉크를 손끝으로 감각하며 인쇄 문화의 산물로서 책을 이해했던 그의 관점은, 텍스트와 책의 구성 요소인 종이를 투명하게 만들고 탈매체화했던 개념 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에서 한발 나아갔다는 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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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스 시겔롭(Seth Siegelaub)은 출판사 인터내셔널 제너럴(International General, 1970-1971)을 설립하였으며,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솔 르윗(Sol LeWitt)을 주축으로 동료들과 함께 전시공간이자 출판사인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 1976-)를 설립하였다.
2) 울리세스 카리온은 멕시코 출생으로 1970년 네덜란드로 이주하였으며 말년까지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당대 네덜란드 및 유럽의 전역의 아방가르드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https://monoskop.org/Ulises_Carri%C3%B3n
3) 인아웃센터(In-Out Center)는 미첼 카르데나(Michel Cardena)의 주도로 울리세스 카리온, 랄 마로킨(Ral Marroquin), 피터 몰(Pieter Mol), 흐레인 프리드핀손(Hreinn Fridfinsson) 등 총 9인이 197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설립한 서점 및 전시 공간으로 1974년까지 운영되었다. https://inoutcenterarchives.nl/info/history; 아더 북스 앤 소(Other Books and So)는 1975년 인아웃센터의 폐관 직후 울리세스 카리온이 암스테르담에 설립한 서점이자 갤러리로서, 1979년까지 딕 히긴스(Dick Higgins),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등 예술가들의 개인전 및 아티스트 북 전시를 개최하였다. 1980년부터는 '아더 북스 앤 소 아카이브'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https://monoskop.org/Other_Books_and_So; 잡지 『에퍼메라 Ephemera』는 울리세스 카리온과 아트 반 바네벨드(Aart van Barneveld), 살바도르 플로레스(Salvador Flores)가 1977년부터 1년간 총 12권 발행한 월간지로서, 해외의 예술가들에게서 받은 우편물을 메일 아트로서 주로 게재하였다. 잡지의 원본 파일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monoskop.org/Ephemera
4) 울리세스 카리온, 『책을 만드는 새로운 예술』, 임경용, 이한범, 차승은 역 (미디어버스, 2017), 48.
5)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도록이나 자서전 등을 포함하여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책을 ‘아티스트 북’이라 명명하는 반면, 그보다 엄밀한 기준으로 “책을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형식으로 사용”하는 작품들을 ‘북웍스’라고 명명하였다. 카리온에 따르면 ‘북웍스(Bookworks)’ 는 “모든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들의 총합”이자, “페이지의 순차를 따르는 책의 형식이 작품의 고유함인 읽기를 결정짓는” 책이다. 위의 책, 48.
6) 울리세스 카리온은 구체시와 시각시를 이러한 가능성의 선구적 예시로 제시하였다. 위의 책, 47.; 기 스크라에넨, 「우리는 이기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울리세스 카리온과 그의 활동에 대한 비구조적 접근」, 위의 책, 68.
7) 위의 책,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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