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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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세 번째 뉴스레터] 가상의 재현, 디지털 믿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스물 세 번째 레터는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을 영상, 회화, 설치, 출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동시대 작가 임영주의 작업을 탐구한다. 최은총은 디지털 세계에서 발견되는 의심되는 믿음과 부정당한 몸의 관계로 임영주의 작업을 고찰한다.
[가상의 재현, 디지털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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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재현, 디지털 믿음
: ‘의심되는 믿음’과 ‘부정당한 몸’에 대한 동시대 작가 임영주의 반응
최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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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보와 재난 문자는 재난이 일어난 즉시, 심지어 예측하여 나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코로나19의 발병으로 한 개인의 사생활이라 믿었던 신체의 동선은 낱낱히 밝혀내야 하는 것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위험은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되며, 디지털 기기를 거쳐 나에게 뉴스 속보로, 재난 문자로 찾아오게 된다. 이윽고 감염자로 판명된 개인의 몸은 사 면의 공간에 갇혀 일주일을 보낸다.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의심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잡히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나를 따라다니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내 손 안의 전자 기기가 부여한 오묘한 형태의 믿음을 ‘디지털 믿음'이라 말하고 싶다. 디지털 세계의 믿음을 긁어모아 형체를 부여할 수 있다면. 형체는 있어도 물화 되진 못한 믿음을 현상한다면. 묘하지만 익숙한, 이 믿음이 임영주(IM Young zoo, 1982-)의 작업과 같지 않을까(도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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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어딜 가나 우릴 둘러싼 스크린들은 미술에서 재현의 대상마저 바꿔 놓고 말았다. 작품의 매체가 디지털화가 되는 것을 넘어, 디지털 세계를 현실 세계에 다시금 재현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차가운 기계장치가 뿜어내는 광원으로 조합된 색 덩어리들을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인터넷 세상이 너무나 익숙해져 버리는 순간, 10cm 남짓한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미약한 손짓만 필요한 신자유주의의 유령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카카오톡으로 평평하고 딱딱한 스크린을 쳐대며 메시지를 보내고, 초 단위로 시간을 조종해 가며 유튜브를 시청하며, 아이패드와 노트북으로 수없이 글을 읽고 쓰고 학습한다. 터치 하나에 순간 이동하듯이 인터넷 세상을 떠도는 우리는 모두 (물 Ding)이 영원히 결여된, 외상을 전제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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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나(人間科我)는 외부세계로의 이동을 향한 인간의 간절한 염원과 믿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인간과(人間科)의 환영(幻影), 환청(幻聽), 기술(技術)을 말한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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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생생한 이미지가 나타나더라도 스크린 액정의 표면만을 딱딱 두드려댄다. 작가들은 이 감각이 손끝에 남은 것처럼, 일상에 남겨진 형이상학적인 디지털 감각이란 징후를 어떻게든 덜어낼 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틈을 표현할 길은 재현할 원본이 없는 믿음과 디지털에 의해 부정당한 몸일 뿐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 임영주는 이를 작업에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임영주의 <인간과나 人間科我>(2019) 시리즈는 웹사이트, 퍼포먼스, 책으로 구성된 작업으로 이런 작가의 산발적인 표현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묶어 놓은 것 같다(도 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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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임영주, 『인간과나人間科我』,(나선프레스, 2019),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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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작품은 올라온 기포를 떠내는 뜰채처럼, 마치 표면를 긁어 표면을 드러내는 프로타주(frottage)처럼 동시대 징후를 그대로 현상한다. 이 외상은 묘하고, 어긋나고, 의심스럽다. 와중에 작가는 ‘합리적’인 과학기술을 적절히 섞어 이상한 ‘믿음’을 소환한다. <인간과나>에서 임영주는 이미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그래서 더 이상한 ‘믿음’들을 발견한다. "레드 썬”으로 전생을 알아보는 김영국 박사, 1992년 10월 28일 휴거의 날을 믿는 다미선교회, “한국초월”, “기 치료”, “내안의 기적” 등의 허무맹랑한 전국 명상원 이름, 운을 틔우는 풍수지리와 그에 따른 집값의 변동 폭 같은 것이다.5) 비슷하게 우리는 촛대바위에 해돋이가 꽂히면 열광하거나(<애동 愛東 AEDONG>(2015)), 돌 속에서 어떤 형상을 보고 ‘수석’이라 이름 지으며 절묘함에 감탄한다(도 4). 이렇듯 작가는 스스로 믿음을 양산하기보단 사람들이 물체에 부여한 문화에서 절묘한 타이밍과 형태를 발견하고 이를 맹목적으로 믿어온 현상 자체를 드러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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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당신은 두 발로 무수히 많은 땅을 밝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단합니다. 신체는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로막는 것일까요?”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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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임영주, <애동 愛東 AEDONG>, 201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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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래 인간이 완전하다는 환상 속에 살아왔던 우리에게, 작가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물체와 현상에 주목하게끔 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작품에 녹아있는 묘한 분위기는 공고한 믿음의 체계를 강화한다. 임영주의 "인간과나人間科我" 홈페이지 작업 <축지법縮地法: 땅을 접는 방법STAR TREK WARP JUMPS>에서 작가의 울리는 목소리와 최면을 거는 듯한 말투는 어쩐지 큰 공간에서 기도를 엿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도 5). 리시버(receiver)가 된 목소리와 독특한 말투는 그녀가 천착해 온 ‘믿음’에 관한 문제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마치 스스로 목사 혹은 샤먼이 되어 맹목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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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작가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몸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귓가에 삐__소리가 들리는 이명 환자, “헛것”을 보는 외계와 접신하는 명상가, 최면에 걸리거나, 빙의된 사람들.. 임영주는 <인간과나>를 통해 수많은 “그 인간”을 소환하게 된다. (임영주의 동명의 책 『인간과나』의 목차에는 전부 “그 인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도 6).) 작가에 의해 호명되는 “그 인간”들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믿기 어려운 종류의 일을 몸으로 겪고 있노라고 말한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은 실재하는 것일까? 가상적인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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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믿음이 향하는 곳에 원본이 있다면, 그 원본이 아닌 것들은 가치절하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원본 없는 것들은 어디서나 불쑥 발생하며 끝도 없이 복사되고 개개인에 맞춰 변형될 수 있다. 오히려 ‘원본-복제'란 체계에 얽매이지 않기에, 매개되지 않고 바로 닿기 때문에 이상한 믿음은 증폭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세계 안에 매일 같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끊이지 않는 다음(next)를 제공하는 유튜브의 쇼츠(shorts)와 인스타그램의 릴스(reels)는 우리에게 별다른 의심을 주지 않는다. 이들이 재현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겪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작가는 디지털 세계가 믿음을 부여하는 방식을 다시금 재현하는 듯 보인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를 마치 자료집처럼 긁어모아 논증하고, 출처를 밝혀낸다. 이를 묶어 출판하거나, 영상으로 만들거나, 홈페이지에 올린다. 지속적인 노출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이든, 학교이든, 회사이든 인터넷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인터넷 자료를 긁어모아 논증하고, 출처를 찾아내고, 이를 '노출'이란 자본의 논리로 다시금 순환하는 것까지 닮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상하다.
작가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대다수가 믿기 어렵다고 하는, 본인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모두를 믿게하는 방식으로 의심되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간극 덕에 그 틈(물 Ding)은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것부터가 믿음이며, 우리는 모두 자신의 믿음을 위해 틈을 메우고 있다고 말이다. 바로 몸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린 어느샌가 직접 겪지 않아도 믿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틈새를 스스로 채우지 못했을 때 불쑥 몸으로 체감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에서 보이는 환각, 환청과 유사한 표현과 명상, 최면, 빙의를 겪을 때 같은 묘함은 스스로 만든 믿음을 위한 강력한 증거로서 부정당해온 몸의 반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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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영주는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와 동대학원 회화과 석사를 수료하여 2015년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선정, 2016년 SeMA 신진 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수상하였고, 2019년 두산갤러리 뉴욕 레지던시와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등을 거쳐갔다. 아르코미술관,≪더블비젼≫(2020), 아트플랜트아시아≪토끼방향로젝트≫(2020), 부산현대미술관≪경이로운전환≫(2021), 아트선재센터≪선셋 밸리 빌리지≫(2021) 등 유수의 기관에서 단체전을 가졌으며, 최근에 아웃사이트≪M≫(2022), hall1, ≪인간과나 人間科我≫(2022)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2)“물 Ding”이란 실재계에 위치한 순수 존재의 대명사이자, 상실의 원형과 같은 것으로, 주체를 사로잡는 욕망의 이상을 말한다. 김석, 『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살림출판사,2007), 244-245.3) 임영주,『인간과나 人間科我』, (나선프레스, 2019), 49.4)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위해 회화, 설치, 출판, 영상, VR, 홈페이지 등 자유롭게 매체를 넘나든다.5) 같은 책, 71-73, 81, 132. 144.
6) 같은 책,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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