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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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두 번째 뉴스레터] 이창훈의 시간: 헤테로크로니아를 향하여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스물 두 번째 레터는 시간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창훈의 작업을 탐구한다. 김동민은 어긋난 시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시간이라는 관념과 믿음의 체계를 교란시키는 이창훈의 시간을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 개념과 연관짓고 궁극적으로 삶을 목격하고자 하는 그의 작업 태도를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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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의 시간: 헤테로크로니아를 향하여
김동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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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의 논의에서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현재가 지속(durée)된다는 아프리오리(a priori)한 시간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이르러 의식의 내재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로 인해 실제적인 시간은 “자신을 전개하는 삶의 운동”이며, “공간의 지평을 가진 나의 지각적 장에 의해” 체험된다는 메를로-퐁티의 구절처럼 실재하는 삶의 공간과 결부된다.1) 삶에서의 시간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창훈(Changhoon Lee, 1971-)의 시도는 온 카와라(On Kawara, 1932-2014)의 <오늘 Today>연작을 떠올리게 한다(도 1). 그러나 시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온 카와라의 시간과 이창훈의 시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온 카와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행위의 기록은 시간의 영속성과 같은 순수 시간에 대한 예술적 탐구에 가깝다. 그러나 이창훈이 주목하는 시간은 순수 시간이 아닌 경험적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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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온 카와라, <오늘 Today> 시리즈, 1966-2014, 캔버스에 채색, 가변크기,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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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이창훈, <2014년에 태운2015년>, 2014, 종이 위에 흔적, 67x78x12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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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삶에서 시간을 인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객관적 시간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루, 한 달, 일 년과 같은 주기를 가지고 순환하는 시간을 경험하기에, 시간은 원형적인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창훈은 그것을 순환적 시간이라 명명한다. 이창훈은 이러한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 구현하기 위해 시간의 기호(sign)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2014년에 태운 2015년>(2014)은 201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매일 담배 한 대를 태워 그 흔적을 기록하여 만든 2015년 달력이다(도 2). 이 달력은 달력 사진도, 날짜를 표기하는 숫자도 없이, 그저 종이 위의 담뱃재가 달력의 형식에 맞춰 나열되어 있다. 달력에서 숫자든 담배 자국이든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을 표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양자가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시간은 다르게 나타난다. 일반적인 달력의 숫자는 관념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그것은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시간으로, 누군가가 실제 경험한 시간이 아니다. 반면 <2014년에 태운 2015년>(2015)에서의 담배 자국은 작가가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통해 경험한 시간을 나타낸다. 담배 자국은 담배 피우기라는 매일 수행되는 일상적인 행위의 표시이자 흔적이다. 이창훈이 종이 위에 집적한 매일의 흔적들은 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이며, 그것이 한데 모여 보여질 때 우리는 시간의 구체적인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이창훈의 시간은 또 다른 의미를 함의하는데, 그것은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이다.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1984)가 『헤테로토피아 Les hétérotopie』(1966)에서 제시한 헤테로크로니아는 ‘정상성’을 벗어난 이질적 시간, 즉 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시간을 일컫는다.2) 푸코는 이에 대해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예를 든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각기 다른 장소, 시대, 취향을 가둬놓는 장소로, 시간 그 바깥에 있으면서 부식되지 않는 장소이다. 그 안에서 시간은 끊임없이 쌓이고 자꾸자꾸 꼭대기로 올라앉게 된다.3)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경험하게 되는 무한히 집적된 시간, 그것이 헤테로크로니아인 것이다. 따라서 <2014년에 태운 2015년>에서의 시간 또한 헤테로크로니아라고 할 수 있다.
이창훈은 “삶을 ‘살아 간다’고 할 때, ‘간다’라는 개념은 시‧공간과 뗄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4) 그는 공간 속의 시간들을 인지하는 것이 곧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이창훈이 주목하는 공간은 헤테로크로니아를 향해 열리는 공간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이다.5) 이창훈의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가 헤테로크로니아 용어와 함께 쌍으로 제시한 헤테로토피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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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이창훈, <무의미의 의미>, 2019, 도배지, 장판, 가변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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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테로토피아는 한 사회의 구성 조건을 형성하는 일종의 반-공간(contre-espace)이자 ‘정상성’을 벗어나는 공간 배치이다. 이러한 공간은 이후 이창훈의 작업에서 헤테로크로니아와 연결된다. 가령 <무의미의 의미>(2019)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철거 예정인 성남시 태평동의 어느 가정집에서 이뤄진다(도 3). 이 작업은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살림은 그대로 둔 채 이 집의 바닥재와 벽지를 새것으로 교체한다. 때 타고 세월감이 묻은 인형과 페인트통은,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긴 시간을 함축한다. 이러한 경험적 시간을 내포하지 않는 새롭게 덧입혀진 바닥재와 벽지가 낡은 사물과 병치될 때, 우리는 사물에 집적된 시간을 의미하는 헤테로크로니아를 단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 이곳은 과거 1960-70년대 서울 무허가 판자촌을 이주시키는 ‘광주 대단지 사건‘에 의해 조성된 주택단지 중 한 곳으로, 그 존재 자체로써 ’정상적인‘ 주거 공간에 대해 반박하는 헤테로피아이다. 이창훈은 “단지 순수한 시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작업이 관념의 세계에만 머물게 하려 하진 않는다”고 말한다.6)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성남시 태평동은 헤테로피아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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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이창훈, <원을 베어버린 사선>, 2016,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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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되어버린 재개발 지역의 흔적들은 새로이 지어질 유토피아적 전망과 이에 대한 부정, 지역과 사회간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기성품 달력을 사용했던 <수평적 리셋>(2015), <달력-헤테로크로니아>(2015)와 달리 <원을 베어버린 사선>(2016)은 재개발 지역에서 수집한 오래된 달력들을 활용한다(도 4). 그가 달력을 수집한 곳은 서울시 은평구 소재 현 서울혁신파크이다. 이곳은 과거의 질병관리본부가 타 지역으로 이전하며 방치되어 오다가, 서울시 지역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창훈은 달력이 걸려있던 장소를 그대로 사진으로 찍어 전시장으로 가져온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달력 사진의 “그것이-존재-했음(l'avoir-été-là)은 ‘인증’의 힘을 지닌다.”7) 벽지의 누런 자국들과 달력에 쌓인 먼지,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흘러버린 시간을 함축하며, 각각의 달력 사진은 기나긴 시‧공간의 과거의 실재성을 담보하는 지표적 특성을 띠게 된다. 이 작품이 전시되었던 난지 스튜디오 전시장의 형태가 원형인 것은 작품의 함의와 맞아떨어진다. 헤테로크로니아는 객관적 시간에 의해 흘러가버리고, 잊혀지는 과거를 눈앞에 드러낸다. 원형의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은 그 자체로 ‘원형을 베어버린 사선’이며, 우리는 달력에 축적된 개인적, 사회적 경험과 기억을 마주하며 복수적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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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이창훈, <꼬리>, 2020, 3채널 영상(13분 반복재생), 포집한 물, 냉동고, 그릇, 몰드, 목재, 분재, 가변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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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의 근작 <꼬리>(2020)는 작가가 선택한 장소에서 포집한 물이 그릇에 떨어지는 모습을 촬영한 3채널 영상과, 같은 방식의 설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도 5). 이창훈은 재개발 예정지로 철거 예정인 공간, 작가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공간, 그리고 자연에서 포집기를 통해 공기 속의 물을 포집한다. 이렇게 수집된 물은 역시 경험적 시간을 전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전시장에는 확보된 물이 언 상태로, 그가 선택한 장소에서 가져온 오래된 그릇에 녹아 떨어진다. 얼음은 시간을 공간 속에서 분리해 내 물리적 형태로 전환하며, 수석이나 그릇의 형태로 얼었다가 녹아내려 그릇에 오롯이 담긴다. 그리고 물은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가 포집되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이창훈이 말하는 순환적 시간을 윤회하는 삶을 은유하며, 축적된 시간의 헤테로크로니아는 우리로 하여금 비선형적 시간을 경험토록 한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삶을 목격하고자 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반-공간의 골동품들을 가져옴으로써 어긋난 시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시간이라는 관념과 믿음의 체계를 교란시킨다. 우리는 이창훈이 ‘포집’한 헤테로크로니아를 관측함으로써 비로소 입체적인 시간과 그에 축적된 오래된 기억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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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632.2) 헤테로크로니아는 ‘heteros(다른)’와 ‘chronos(시간)’의 합성어이다. 헤테로크로니아는 원래 생물학 용어로 ‘이시성(異時性)’으로도 번역되는데, 한 종에서의 발달 과정이 그 조상인 다른 종에서의 같은 과정과 비교해 시작과 분화의 시점, 속도가 다를 때 이를 가리키기 위해 쓰인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2014), 16.3) 미셸 푸코, 「다른 공간들」,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지성사, 2014), 54.4) 너와 나의 시간-이창훈 작가 인터뷰, 경기문화재단,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Qg5Ddw8w56I (2023년 10월 20일 접속).5) 헤테로토피아는 ‘heteros(다른)’와 ‘topos(장소)’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며, 다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이의제기하는 공간이다. 푸코는 이를 반-공간(contre-espaces)이라고 설명한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12-13. 6) 이창훈 작가 홈페이지. https://changhoonlee.mycafe24.com/ (2023년 11월 03일 접속). 7)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보편성‧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존재-했음(l'avoir-été-là)’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박상우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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