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레터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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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뉴스레터] 불가능을 인정하고 기꺼이 재현하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첫 번째 레터는 두 명의 예술가에 대한 글이다. 중국의 저우 타오와 태국의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은 서로 다른 미감을 보여주면서도 어딘가 상통하는 지점을 공유한다. 이들은 재현(representation)의 대상과 방식을 고민하고, 이를 영상 작업으로 풀어내 놓는다.
[①저우 타오 작가 비평]
[②아라야 라스잠리안숙 작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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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 타오(Zhou Tao)의 ‘다큐멘터리’에 구현된 제3의 현실
심하린
1.
저우 타오(周滔 Zhou Tao, 1976-)에 대한 기존의 서술들을 살펴보면 그는 ‘다큐멘터리 작가’ 혹은 적어도 다큐멘터리 형식을 이용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저우 타오의 작업을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을까? 먼저 다큐멘터리가 담아내는 예술 작업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질문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는 실존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에 초점을 맞춘 기록물로, 사실을 기록하길 시도하는 논픽션 형태의 시각 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에서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사실을 기록’한다는 부분으로, 이는 재현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다큐멘터리가 사실 혹은 현실을 묘사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인식론적 논쟁이 이어져 왔다. 리얼리즘 지지자들은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외관을 충실하게 재현한다고 믿는다. 반면, 구성론자들은 현실이란 개념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이며 다큐멘터리가 묘사하는 것은 권력 의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1) 양쪽 모두 한계가 분명하기에 쉽사리 한쪽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인 히토 슈타이얼은 다큐멘터리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일어나는 의심은, 인정해선 안 되는 다큐멘터리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특성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다큐멘터리는 매우 불분명하고, 또 불확정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현실의 재생산이 아니라 대상의 재현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재현’ 능력에 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발맞추어 디지털 이미지 수정기술의 발달은 객관성과 사실성에 근거하는 다큐멘터리의 신뢰성을 더욱 감소시키며 ‘포스트 다큐멘터리’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예컨대 ‘포토샵’과 같은 디지털 이미지 변조/생성 기술은 객관성과 사실성을 핵심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2) 언뜻 다큐멘터리의 위기로 보이는 이 상황은 오히려 객관성이나 진실성과 같은 기존의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주관성, 창조성, 상호작용과 같은 대안적 가치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확장시켜 포스트 다큐멘터리로의 이행을 만들어내고 있다.3)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렇듯 내적 딜레마와 예술적 전회(転回)를 지니는 커다랗고 복잡한 단어 ‘다큐멘터리’로 저우 타오를 읽어내길 시도하는 것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부유함으로써 그의 영상에 드러나는 ‘제3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2.
저우 타오의 초기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다큐멘터리에 분명 근접해 있다. 예컨대 〈One Day〉(2007)와 〈Time in New York〉(2009)은 작가의 일상을 가지고 전개된 작품으로, 그는 지루하고 일상적인 행위들을 경건하고 독창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기록함으로써 이를 연극의 형태로 변화시키고 있다. 12분 길이의 〈One Day〉는 옷부터 가전제품, 식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판매되고 제공되는 낙원인 백화점에서 보낸 하루를 기록한 작업이다. 영상은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플립플롭(flip-flops)을 신은 작가가 베개 위에 앉아 판매되기 위해 벽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을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후 그는 매장 안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질, 면도, 심지어 샤워까지 하며 자신의 일과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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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time in new york(still), 2009, single-channel video, 16mins. Courtsey of Vitamin Creative Sp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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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점철된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나 쉽게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곧 세계 자본주의에 내재된 물질적 상품의 과포화를 폭로하는 것이다. 비록 덜 노골적이긴 하나 〈Time in New York〉에서도 이와 같은 과잉감이 재연되고 있다(도 1). 이 작업은 그가 뉴욕 맨해튼에서 레지던시를 하며 느낀 압도감을 구현한 것으로, 도시의 번잡함과 언어 장벽에 가로막힌 작가는 식료품을 살 때를 제외하고 스무날 동안 조그만 아파트에서 나가지 않기를 시도한다. 17분이라는 짧은 길이로 축약되고 편집된 이 영상에서 작가는 주머니 속에 실타래를 넣고 밤낮으로 움직이며 하루를 보낸다. 그 결과 그의 행적이 기록된 마치 거미줄과 같은 형태의 그물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그물의 물리적 구조는 두서 없기 보다는 어느 정도 일정한 질서를 따르고 있기에 오히려 복잡한 사회 현실과 달리 그에게 편안함과 영속성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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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After Reality(still), 2013, single channel HDV, 14min 20sec, Courtesy of Vitamin Creative Sp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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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0년 본국으로 돌아온 이후의 작업부터 저우 타오의 영상에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형식주의 실험에 보다 몰두하는 인상이 드러나며, 이와 함께 서사의 역할이 약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는 특히 두 곳 이상의 다른 장소들을 편집하고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제3의 현실’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After Reality〉(2012)는 중국 광저우와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편집을 통해 공존하고 있다(도 2).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파리 카디스트 예술재단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향하기 전까지, 그는 광저우 교외의 도시화된 지역들 사이에 위치한 버려진 교외를 영상으로 남겼다. 도시 간 고가도로 아래로는 마구 자란 덩굴과 초목들이 황폐한 벽을 뒤덮고 있으며 인근 강에서 용선(dragon boat) 경주를 위해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시간의 흔적이 은폐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에서 노 젓는 사람들 사이로 약간 느린 속도로 걷거나 미묘한 자세를 취하는 작가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서 제3의 현실을 만들기 위해 그는 파리에서 촬영된 이미지를 광저우에서 찍은 편집본에 통합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에 따라 중간중간 삽입된 파리의 정돈된 도시 풍경은 광저우의 것과 대비되어 이질감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동양(중국)-자연’ 그리고 ‘서구(프랑스)-도시’라는 고리타분하고 문제적인 이분법적 구도를 답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논픽션과 픽션, 존재하는 현실과 지각된 현실이 모두 중첩되는 일종의 비역사적인 시간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겨울의 파리와 더운 여름의 광저우가 편집을 통해 마치 같은 위도상에 위치하는 듯 제시됨으로써 영상의 모호한 시간적-공간적 서사가 한층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을 명명하는 데 있어서 오늘날 신자본주의, 세계주의와 같은 각종 -이즘에 의해 창조된 ‘유토피아’가 허상으로 느껴진다고 언급하며, 만약 이러한 유토피아가 전부 실현된 이후에 무엇이 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작업 속 편집과 중첩을 통해 새롭게 제시된 제3의 현실은 이러한 작가의 고민과 밀접하게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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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Blue and Red(still), 2014, Single channel HDV, 24m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n Nefkens Found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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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Blue and Red〉(2014)는 광저우와 방콕의 시민 광장을 배경으로 한 작업이다(도 3). 파란색 광선을 편집 과정에서 이용함으로써 마치 광장 속 사람들이 색의 스펙트럼 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효과를 구현해냈다. 그는 이 작품의 시작점이 ‘광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4) 언뜻 생각해봤을 때 광장은 민주주의가 발현되는 핵심적인 공공 공간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천안문광장 사건 이후로 광장은 어떠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함의하는 곳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업 속 태국의 광장 또한 반정부 시위가 이루어지며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업은 대조되는 두 공간을 병치시킴으로써 민주주의가 성취되기 힘든 중국의 상황을 연상시키게 만들어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손쉽게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우 타오의 영상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시각적인 탐구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업은 특히 색채의 대비로 하여금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작가는 방콕과 광저우의 도시 광장을 중첩하는 과정에서 제3의 공간으로 광둥성에 위치한 중금속 광산을 제시한다. 늦은 밤 도시 광장에서 LED 등에 비친 사람들의 피부는 파란색으로 빛나는 반면 오염된 광산의 녹슨 빛깔의 모래와 물은 불길한 느낌의 붉은 색조로 얼룩져 있다. 이와 더불어 촬영, 구도 및 프레임은 엄격한 형식적 고려로 선택되었고 이미지의 서술은 서사에 종속되기보다 의식의 움직임을 따르는 듯 보인다.
4.
정리하자면 저우 타오의 비디오 작품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 주력하기 보다는 이미지의 형식적 실험을 통해 실제와 허구의 이항대립 그 사이를 부유하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저우 타오의 작업은 ‘포스트 다큐멘터리’의 한 경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포스트 다큐멘터리’ 작품들 사이에서는 고전적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던 절대적 진리가 사라지면서, 다큐멘터리 역시 세계를 보는 여러 접근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각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5) 형식적으로는 뮤직비디오, 영화적 재연, 퍼포먼스, 그리고 애니메이션 등의 장르가 섞인 혼성적 양식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경계 넘나들기를 시도한 작가들의 다큐멘터리는 미술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다큐멘터리의 실험성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저우 타오의 영상 또한 두 곳 이상의 서로 다른 공간들을 중첩시키는 편집 과정을 통해 ‘제3의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리얼리티를 재구성하는 ‘다큐멘터리’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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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안규철 역(워크룸프레스, 2019) 참조.2) 최종철, 「’포스트 다큐멘터리’: 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미학예술학연구』 51(2017), 66.3) 위의 글, 67.4) 「디어 시네마 1 - 저우 타오 아티스트 토크」, https://www.youtube.com/watch?v=43X5bh8K7Io (2022년 12월 10일 검색) 참조.5) 임윤수, 「미술은 다큐멘터리와 어떻게 만나는가 - 한국 현대 미술가들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학회논문집』 15(2017)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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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방법-아라야 라스잠리안숙에 대하여
한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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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 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 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온다. 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 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1)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애도일기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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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기억하는 죽음은 모두 사건이다. 돌멩이 하나가 되어 때로는 삶을 흔들고 적어도 미약한 동요를 일으키는 사건.2) 사건이 되지 못하는 죽음에는 무게가 없다. 사람들은 죽음이 공평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누군가의 죽음은 꽃으로 덮인 관 안에 말끔히 안치되고, 누군가의 죽음은 향 하나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 채 급히 치워진다. ‘죽은 사람’과 어떠한 형태의 발화도 불가능한 ‘물-체(物體)’의 구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머리로 알면서도 실제로 모든 생명에 같은 무게를 부여하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 역시 그렇다.
사건으로의 죽음은 종종 예술의 주제가 된다. ‘희생자’의 삶은 재현(representation)되고 가상의 내러티브가 덧씌워지며 쉬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사건이 아닌 죽음은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가, 혹은 다루어지기는 하는가. 그렇기에 때로는 아무런 무게도 갖지 못하는 죽음을 눈앞에 내보여 그 죽음에 무게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로부터 우리는 외면당한 존재를 숙고할 수 있게 된다. 서발턴(subaltern)의 발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왜곡될지언정 존재를 알리는 행위가 필요하다.3)
아라야 라스잠리안숙(Araya Rasdjarmrearnsook, 1957- )은 개인적인 사건으로의 죽음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해, 외면된 존재의 죽음으로 작업을 확장시켜 나아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죽음’의 시발점은 이른 나이에 겪은 부모의 부재일 것이다. 초기 작업인 <이별 The Parting>(1990)이나 <엄마의 꿈 The Dream of Mother>(1990)이 보여주는 흑백톤의 아득한 이미지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표상한다(도 1). 또한 <암과 함께한 저녁 The Dinner with Cancer>(1993)은 긴 암투병 끝에 사망한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병원 침대 프레임과 링거는 아버지를 간병하는 동안 실제로 사용된 것들이다. 이처럼 그녀의 초기 작업은 특정 인물의 죽음과 그 원인을 암시하는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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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The Parting II (from the series “Female Figure”), 1990, Etching on paper, 59.8 x 90.8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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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러한 작업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의 죽음이다. 친구의 죽음, 친척의 죽음뿐 아니라 신문에 특필되는 안타까운 사건·사고의 희생자들을 보며 우리는 슬퍼하며 죽은 이를 회고하고, 고인이 얼마나 선한 사람이었는지 혹은 그 죽음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강조함으로써 죽음에 무게를 더하려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이야기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어떨까. 추억해주는 이 한 명 없는 망자, 죽었다는 사실마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는 그렇게 존재조차 알리지 못한 채 사라진다. 라스잠리안숙의 작업이 지니는 의의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몰라도 괜찮았던 것을 끄집어내어 제시하고, 굳이 논란을 만들어 사람들이 알도록 만드는 것. 여기 아무도 모르는 죽음이 있었음을 내보이는 것.
작가는 1997년 <세 구의 여성을 위한 낭독 Reading for Three Female Corpses>에서 세 구의 무연고자 여성 시신을 앞에 둔 채 잔잔하지만 명확한 어투로 글을 읽는다. 엄숙하고 정적인 분위기 속, 침대도 아닌 트레이에 눕혀져 흰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가린 시신에게 이나우(Inao)를 읽어주는 작가의 모습은 장례식을 연상시킨다.4) 반면, <여성과 남성 시신을 위한 낭독 Reading for Male and Female Corpses> (1998)에서 작가는 노래에 가깝게 이나우를 낭독한다. 병원 영안실을 돌아다니며 허밍에 가까운 낭독을 하고, 이를 찍는 카메라 역시 천 아래로 살짝 보이는 시신의 일부를 클로즈-업 하는 등 다양한 각도를 취한다.
영안실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낭독은 보는 이에게 불쾌감을 전달하는데, 이는 검고 노랗게 변한 시신의 상태가 직접적으로 죽음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본능적인 불편함과 더불어 작가가 허락 없이 망자를 대상화해 카메라로 담았다는 점이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좀 더 솔직해지자면, 우리는 그저 이야기가 없는 죽음이 눈 앞에 나타나는 게 꺼림직한 것은 아닌가? 죽음을 감각케 하는 ‘시신’이 미술 작품으로 등장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죽은 자의 머리를 석고로 뜨는 데스마스크(death mask)가 유행하였고, 우리는 이미 포름알데히드에 절여진 데미안 허스트의 절단된 동물 사체나 안드레 세라노의 사진 속 죽은(혹은 죽어가는) 야윈 시신을 목격한 바 있다. 라스잠리안숙의 작업에서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했다는 비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판은 죽음이 보여진 다음에나 나올 수 있다. 이들은 허락을 구할 수 없는 존재이자, 그를 대리할 존재도 갖지 못한 이들이다. 연고 없이 죽은 자의 동의에 대한 논의 이전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살펴주는 이 없이 스러져 갔는지에 대한 질문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라스잠리안숙이 이들의 죽음에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그저 애도에 가깝다. 얼굴 없는 이들의 삶을 추억할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생의 마지막에서 듣지 못했을 애도를 전함으로써 작가는 의례가 아닌 예술 안에서 죽음을 마주할 다른 가능성을 제안한다.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라고 말한 바르트는 그저 지나칠 수 있는 타인의 죽음에 구태여 무게를 부여해 마음에 묶어놓으려는 행위를 ‘도덕’으로 설명한다.5) 도덕이 기만이 되지 않으려면, 발화하는 자로서 발화하지 못하는 자를 알고 그에 이입해야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ovorty Spivak, 1942- )은 서발턴의 발화는 말이 아닌 형태로 나올 수 있음을 피력하였고, 그들의 일생을 사후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이들의 발화를 해석해 서술한 바 있다. 라스잠리안숙의 작업 방식은 발화할 수 없는-혹은 발화하여도 아무도 듣지 않는-서발턴의 발화에 귀를 기울이려는 스피박의 방식과도 교차한다.
우리는 애도를 하며 망자가 천국에 가기를 기도한다. 작가는 이 문장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하는데, 죽은 자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자신의 소망을 죽은 자에게 투영한다는 점에서 그렇다.6)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자리에서도 산 자는 죽은 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에 대변할 수 없으며 이들의 재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 공고해진다. 모두가 의심 없이 말하는 기도문과 형식적인 인사말은 건조하게 세상을 맴돌고, 의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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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The Class, 2005, Video, 16 min 25 se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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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해 라스잠리안숙이 선택한 방법은 죽음에 대해 탐구하고 죽은 자의 옆에 누워 자신의 존재로서 죽은 자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단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앞세우지 않게 하고, 섣불리 죽음을 무겁게 정의하지 않게 만든다. <수업 The Class>(2005)과 <이것이 우리의 창조이다 This is our Creation>(2005)는 관객이 망자에게 이입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제공한다(도 2). <수업>에서 작가는 여섯 구의 시신 앞에서 죽음에 대해 강의한다. 화면 밖의 관람객이 느낄 수 없는 시신의 현존, 그 부피감과 냄새, 그리고 이질감을 직접 체험하는 작가는 강의를 하며 자신과 시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내고 이는 나아가 작가와 관객의 거리감, 관객과 시신의 거리감을 좁힌다.
나아가 <이것이 우리의 창조이다>에서 작가는 배치된 시신들의 사이에 누움으로써 ‘이입’에 일종의 종지부를 찍는다. 작가가 아무리 시신에 자신을 이입하려 할지라도, 모두가 꺼리는 시신 사이를 비집고 누워 오롯이 죽은 자를 위한 애도를 할지라도 그는 살아 있기에 죽은 자를 향한 온전한 대변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예술도 죽은 자를 위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녀의 예술이 갖는 의의는 그저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고 제시하는 것, 그 뿐이다. 죽음을 구태여 재해석하려 하지 않는 작업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살아있기에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실감할 뿐이다.
말할 수 없는 상태는 복합적인 요인의 결과물이다. 정치적인, 사회적인, 인종적인 문제 때문에 서발턴의 발화는 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가 무엇인지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07년 이후부터 라스잠리안숙이 정신병원에 수감된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 역시 이전 작업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들에게 쫓겨난 여성, 가난과 과도한 노동으로 불안정해진 여성들은 병원에 갇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낸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가는 수용 시설과 국가 기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데, 사회에서 격리된 여성에 주목하기 위해 여성이 아닌 기관에 허가를 구하는 모습은 이 사회를 그대로 투영한다.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들은 영원히 발화할 수 없고 대중은 이들의 상황을 알 수 없다. 라스잠리안숙은 <광기 The Insane>(2007)를 작업하며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이 아니라면 이들의 발화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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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The Insane, 2007, three Channel vide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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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관적으로 작가는 규범적인 사회 구조에서 소외되는 존재에 관심을 둔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은 사람, 수용소에 갇혀 존재조차 희미해진 여성 등을 카메라에 담으며, 작가는 섣불리 이들의 존재를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타자가 존재하는 방식을 그저 체득하며 조심스레 접근할 뿐이다. 라스잠리안숙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소통하려 하지 않고, 교감을 통해 다른 방식의 발화를 시도한다. 이나우의 낭송이 점차 노래와 같은 형태로 변한 것, 영안실을 돌아다니던 것에서 시신 사이에 눕게 되는 것의 시차는 작가의 깨달음과 이입 방식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변화는 타자에게 온전히 닿을 수 없더라도 조금씩 거리를 좁히도록 매개한다.
아시안-여성이라는 위치만으로 우리는 서발턴 그 자체이며 매 순간 발언의 한계를 실감하며 살아간다. 그 위치는 말해지지 않는 죽음, 이해되지 않는 광기와도 교차점을 이룬다. 라스잠리안숙은 그녀의 아시안-여성 정체성과 더불어, 작가로서 다루는 주제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미약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에게 주목한다. “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이미 결정되어” 보이는 위치를 주지시키는 것에서 그녀의 발화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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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김진영 역(이순, 2012), 60.
2) 절망: 이 단어는 너무 연극적이다. 언어의 영역 안에 있다. 돌멩이 하나.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124.
3) 그람시의 <옥중수고>에서 처음 나온 ‘서발턴’ 개념은 하층민, 소외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특히 가야트리 스피박은 이를 서구의 비평언어와 정치 담론으로 정의되지 않는 피식민지인, 프롤레타리아 남녀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 글에서 서발턴은 아라야 라스잠리안숙이 작업에 제시했던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시신/정신병원 수감자’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의 발화를 들을 수 없고,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화를 한다 하여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4) 태국의 구전 설화를 지칭하는 말로, 주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 많다.
주의: 직접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 시신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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