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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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아홉 번째 뉴스레터] 접촉과 이탈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아홉 번째 레터는 접촉과 이탈에 대한 이야기이다. 심하린은 1990년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중국미술계에 등장한 '당대미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중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움직임과 전략적으로 맞닿아 있었는지 살펴본다. 최은총은 1990년대 중국의 격변기 속에서 작품 활동을 행하던 송동(宋冬, 1966-)의 작업을 살펴보며, 작가의 '중국적인 것'에 대한 태도를 바라본다.
[① '현대'미술에서 '당대'미술로: 시대적 요구와 응답]
[② 만들고, 부수고, 다시 짓는 일: 송동의 먹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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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서 '당대'미술로: 시대적 요구와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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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세계화와 다문화의 급류가 형성되는 가운데 이른바 후발 주자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적 정체성을 규정하길 시도했으며 각 국가의 미술계에서도 이와 같은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중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1990년대 초에 이르러 경제 안정과 정치력에 힘입어 개혁·개방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그 효과가 가시화됨에 따라 세계화의 영향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에 생산된 미술을 정의하기 위해 등장한 ‘당대미술’이란 용어는 단순히 이 시기의 미술을 지칭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중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를 함축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국미술계 내부에서 1980년대에 생산된 미술은 ‘현대미술(modern art)’, 1990년대의 미술은 ‘당대미술(contemporary art)’로 일컬어지곤 한다. 이렇듯 인위적이고 다소 강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구분법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미술 사이에 큰 변화가 존재했다고 바라보는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중국미술 평론가 뤼펑(吕澎, 1956-)은 문화대혁명(1966-1976) 이후 등장한 새로운 중국미술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하며 1980년대의 작품은 ‘현대(现代)미술’, 그리고 1990년대의 것은 ‘당대(当代)미술’로 각각 규정하고 그 차이점을 강조하였다(도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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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呂澎, 易丹. 『中國現代藝術史 1979-1989 (A History of China Modern Art 1979-1989)』 표지. |
(도 2)
呂澎. 『中國當代藝術史 1990-1999 (A History of Contemporary Chinese Art 1990-1999)』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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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대를 나누는 근거를 살펴보면, 우선 1980년대의 중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미술 비평가들은 인본주의와 사회 진보 사상을 국가의 정치적 의식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연된 현대화 운동의 참여자로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고 서술된다. 이와 달리 1990년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공동의 노력을 포기하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며 개별적 실험을 추구하게 된다고 설명된다. 그 밖에도 리셴팅은 1980년대 예술가들은 “중국 문화를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현대 서구의 미학과 철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반면, 1990년 초부터 이들 중 다수는 “85운동을 특징짓는 영웅주의, 이상주의, 형이상학적 초월에 대한 열망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하였다. 다른 비평가와 큐레이터들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며 두 시기 사이 나타나는 여러 차이점을 부각함으로써 ‘현대’와 ‘당대’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구별화의 기저에는 중국 현대미술을 정의하고 특징짓는 데 있어 1990년대 초부터 맞닥뜨린 일련의 전환적 흐름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중국미술계가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에 진입한 것이 주효하였다. 1980년대의 ‘현대미술’은 주로 당시 중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국내 운동이었지만, 1990년 이후의 ‘당대미술’은 여러 지리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영역이 교차되는 과정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0년대 중국 내 현대미술의 생산과 해석은 중국미술계의 여러 분야가 ‘세계’, 더 정확하게는 서양이 지배하는 국제미술계로부터 오는 새로운 기회와 압력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와 관련지을 수 있었다.
실제로 세계무대를 의식하는 것은 중국에서 행한 수많은 경제 및 문화 정책의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등 국제전 참가를 통해 서구 미술계와 빈번하고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해진 것은 많은 중국미술 전문가들의 생각과 행동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요컨대 1990년대 세계화의 흐름은 중국미술계가 자체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 전반과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측면에서 자각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미술계는 ‘당대미술’로 하여금 외부 환경, 곧 서구 미술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와 공존할 필요성을 수긍하면서도, 중국의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보다 강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전략으로 내용적 측면에서는 ‘중국적인 것’과 ‘본토성’을 부각하고자 하는 노력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한 새로운 미술 경향 중 하나였던 ‘정치 팝아트’는 보편적으로 서양 팝아트 양식 위에 중국 사회주의 미술 특유의 정치적 요소를 혼합한 미술의 형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도 3, 4). 리셴팅의 표현을 빌자면 ‘정치 팝아트’는 “그간 쌓인 정치적 응어리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내려는 노력으로부터 등장한 중국 현대미술의 방식”이었다. 즉,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 유행하는 상업문화를 통해 미국을 포착하였다면, 정치 팝 아트의 작가들은 정치적 형상을 통해 중국 당대 문화의 핵심을 포착하려 했다는 것이다.2) 이렇듯 서양 팝아트가 갖는 자본주의적 상징성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미술을 대표하는 ‘정치성’이 결합되면서 생성된 독특한 예술형식이라는 특성은 곧 중국의 정치 팝아트를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되었고, 결과적으로 1990년 이후 급변하는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성공적으로 국내외 미술계에 확산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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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왕광이, <139대비판-코카콜라39>, 1993. |
(도 4)
웨이구앙칭, <홍색의 벽>,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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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 팝아트를 ‘당대 미술’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서양 현대미술’과의 비교가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당대미술’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또 이것에 당대성을 부여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서양과 다른 ‘중국 고유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중국미술의 특수성을 밝혀내고 중국미술사의 계보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당대미술’의 개념과 그 조건들은 결국 세계화가 중국 현대미술의 발전 내러티브에 미친 영향을 그대로 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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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2년에 출간된 『中國現代藝術史 1979-1989(A History of China Modern Art 1979-1989)』와 2000년의 『中國當代藝術史 1990-1999(A History of Contemporary Chinese Art 1990-1999)』를 비교해보면, 이 두 시기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목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2) 정창미, 「중국 ‘정치 팝 아트’의 형성과 전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3 (2017),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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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부수고, 다시 짓는 일: 송동의 먹는 도시
최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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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태어난 송동(宋冬, 1966-)은 문화대혁명 시기 태어나 청년기에 천안문 사태와 개혁개방을 겪은 독특한 배경을 가진 작가이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 전반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내부 상황에 대한 서구 일반인들의 관심에 편승하여 정치 팝(Political Pop)과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가 국제적으로 주목받으며 해외 컬렉터들과 큐레이터에 의해 국제 전시회와 비엔날레에 소개되고 있었다. 당시 송동은 주류를 이루었던 미술계에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1990년대 저항적인 예술의 대표적 그룹인 ‘아파트먼트 아트(Apartment Art)'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회에 팽만한 물질주의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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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Song Dong, Bread (After Song Dong's "Bread" 1994), 2012, Bread, dimensions vari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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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아트’는 1989년 '중국현대예술전'을 기획하기도 한 가오밍루(高名潞, 1949-)가 천안문 사태 이후 북경과 상해, 광주 등지에 모인 젊은 예술가들이 아파트에서 작업과 전시를 선보였다는 독특한 시공간적 특성을 고려해 명명된 예술그룹을 뜻한다. 이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은 공개적으로 전시할 수 없는 주제와 판매가 어려운 소규모 설치 형식을 지닌 작품을 사적 공간인 아파트에서 선보였다. 일례로 송동은 빵 한 덩어리를 유리 상자에 두어 썩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빵 Bread>(1995)과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도 1).
이때 예술가들이 선택한 사적 공간인 아파트는 정부의 체제와 제도권 미술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대안적 공간으로, 이들의 저항의식을 표상한다. 이에 1990년대 아파트먼트 아트는 단순히 예술이 행해진 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비판적 의식이 작품의 형식과 공간으로 발현된 예술로 봐야 할 것이다. 즉, 당시 그룹의 활동은 의식적으로 사적 공간과 수도인 베이징이라는 장소를 선택해 그 공간과 장소의 맥락과 결부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경제 논리와 사회정치적 비판을 행하였다.1) 그렇기에 이후 송동의 작업은 정치 팝과 냉소적 리얼리즘에 비해 덜 직접적으로 중국의 상황을 표상하지만, 작품의 형식과 개념에서 중국에 대한 소회가 배어 나오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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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Song Dong, Eating the City - Vienna 02, 2007, color photograph, 90x 60cm © Song D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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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시기 이후 송동은 국제 무대로 진출하는데, 앞서 전시되는 공간과 장소의 맥락을 이해하고 작품에 활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작가가 2003년부터 시작한 <먹는 도시 Eating The City> 연작을 들 수 있다. <먹는 도시>는 송동이 전 세계 도시를 돌며 각 나라의 과자와 사탕으로 도시의 모습을 구현한 대규모 설치 작품이자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베이징과 충칭, 상하이를 비롯해 서부의 런던, 비엔나, 바르셀로나 등의 대도시를 순회하며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런던과 한국에서는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백화점 내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공개하고 다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다. 대도시 내 자본이 요동치는 백화점 안이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도시의 발생과 해체가 달콤하다는 점은, 작품이 선보여지는 장소와 공간의 맥락 덕에 도시화와 자본주의의 유혹과 위험성을 표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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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Song Dong, Eat The City — Selfridges, London 설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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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업의 목적은 내가 건설하는 도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나의 "달콤한" 도시는 유혹적이고 맛있는 비스킷과 사탕으로 건설될 것입니다. 나는 이 사탕을 "화려한 독"이라고 부릅니다. 기분 좋게 맛있지만 과식은 해롭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도시의 일부 특성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욕망으로 건설하고 맛본 도시를 먹고 동시에 폐허가 될 때까지 파괴했습니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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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송동이 국제 무대에 선보인 <먹는 도시>는 급변하던 베이징의 상황을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먹히게 될 운명인 도시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면, 고대 중국의 제국 도시의 건축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송동의 작업에서 엿보이는 ‘중국적인 것’은 국제 무대에서 송동이 크게 주목받는 이유가 되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전반 중국 미술이 주목받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만들고, 부수고, 다시 짓는 일은 어쩌면 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중국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않을까? 중국 정치와 미술계에 대한 비판을 가하지만, 작품에서 중국의 문화와 상황을 내보이며 자신을 정치화하니 말이다. 작가는 우리를 자신이 만든 도시라는 식탁에 초대하며 함께 이 도시를 나눌 것을 권한다. 너무 달콤한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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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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