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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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무 번째 뉴스레터] 더블캐스트: 렌즈에 비친 연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스무 번째 레터는 카메라 렌즈 너머의 연기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김동민은 로지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 담론을 토대로 여성 작가로서 사회적 코드에 종속되지 않는 니키 리의 작업 세계를 탐구한다. 한문희는 타인의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것에 요구되는 섬세함과, 그 섬세함의 일종으로써 정연두가 채택한 '노래'에 주목한다.
[① 떨군 이야기를 줍는 게 우리의 일이라면]
[② 실천적 여성-되기: 니키 리의 유목적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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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은 중독적이라, 그 범위는 넓어지기만 하고 줄어들지를 않는다. 어느 정도까지 내보여야 하는지, 혹은 내보일 수 있을지 길을 잃기 십상이어서 때로 너무 많은 것을 보기도 한다. 오늘의 우리는 보여줄 것-일상, 생각, 행복, 우울, 성취-이 너무 많은 탓이다. 일기장에 덮였던 이야기들은 이제 연극 무대 위 방백처럼 울려 퍼진다. 기록과 노출의 어느 경계선상에서 이야기는 화자를 잃고 뒤섞인다. 누구의 감정을 따라가야 하나, 이런 감정을 가져도 괜찮은가 고민을 거듭하며. 관음이 아니도록, 먼 거리의 관조 역시 아니도록 이야기하려면 감정의 경계선을 섬세히 더듬어야 할 것이다.
‘노출’의 주체가 내가 아닐 때, 타인이 떨어뜨린 이야기를 주워가며 내보이고자 할 때 발화 방식은 더욱 첨예해진다. 하나씩 주운 이야기들이 단일한 서사로 구축되는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는 교집합을 생성하며 얽힌다. 서사의 주체와 서사를 담는 주체-감독, 작가 등-, 나아가 그를 바라보는 관객에게까지 교집합은 산발적으로 범위를 넓힌다. 그 공감 안에서 과잉된 밀착과 시혜적인 연민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타인의 이야기를 지우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에서 우리는 단차를 어떻게 지워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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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비디오 설치, 4채널 HD 디지털 비디오, 컬러, 사운드, 혼합매체, 48분, 가면크기, 작가 소장. 출처: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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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MMCA 현대차 시리즈》에서 신작을 발표한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2023)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의 서글픈 서사를 담고 있다(도 1).1) 스크린에 펼쳐지는 내러티브는 한인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가르시아(1907-1995)를 주축으로 하되, 그의 목소리는 세 개의 각기 다른 화자를 통해 발화된다. 일제 강점기 시기 허위 광고에 속아 멕시코 선인장 농장에서 착취당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한국의 판소리, 일본의 기다유 분라쿠, 멕시코의 마리아치의 노래를 빌어 나타난다.2) 세 나라의 전통 음악은 고된 노동과 차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통받는 마리아의 삶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리아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선인장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몇 번이나 남편을 잃거나 바람 맞는다. 삶의 고통을 온전히 비극으로만 취급할 때 연민은 발생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연민은 불행한 사람의 현존을 향한 관심에 지나지 않아 당사자가 아닌 이는 그 불행에 멀찍이 떨어진 채 관조하게 만든다.3) 판소리와 기다유 분라쿠, 마리아치의 노래는 스크린 속 인물의 불행을 구경하게 만드는 대신 내러티브의 분위기를 일정한 톤으로 유지하고 그 음률을 전염시켜 하나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닌 흐르는 삶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도 2, 3). 이들은 마리아의 외부에 위치한 입으로써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체이자, 결코 마리아 본인이 될 수 없는 관객이다. 나이자 타자인, 측정할 수 없는 거리를 교차하는 이들의 노래를 따라 관객도 극의 안팎을 다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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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마리아치 등장 부분. |
(도 3)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판소리 등장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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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을 보며 비교적으로 행복해하거나, 내 불행을 내보이며 연민을 구하는 것은 낯선 상황이 아니다. 양자 모두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점점 가치 판단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제안하고픈 것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읽을 때 시혜적인 연민을 떠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이야기를 보는 사람의 몫일 뿐 아니라 이야기를 줍고 만드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정연두의 작업은 타인의 이야기를 충실히 들을 수 있는 방식을 강구한다. 감정의 우위를 떠나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이리저리 실험하며 연대할 수 있는 방식을 찾기 위해 말이다. 그것은 타인이 떨어뜨린 이야기를 주워 그 안에서 서사를 이끌어내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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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연두,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여행기』 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23. YDJ_Brochure.pdf (2023년 12월 2일검색).
2) 정연두,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여행기』 도록.
3) 한나 아렌트, 『혁명론』,홍원표 역, (서울:한길사, 2004), 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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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가 작품에서 자신의 신체를 내보일때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가. 남성-여성의 이항대립 관계에서 그를 바라보지는 않는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동일성에 근거한 보편적 정체성, 즉 대문자 인간(Man) 개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지배적 권력을 문제시하며 ‘분자적 여성’ 개념을 제시하였다.1) 그러나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1954-)는 들뢰즈의 개념이 여성을 다시 획일화된 주체, 즉 '대문자 여성(Woman)'이라는 기표 아래 제시하였음을 지적한다.2) 브라이도티의 지적은 실로 타당하다. 여성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대문자 여성'의 기표에 부분적으로 종속된다. 그리고 이러한 코드가 작업에 내비칠 때, 즉 작가의 성별이 작품에 드러나는 순간, 작가는 여성, 소수자 또는 타자라는 이름에 갇혀버릴 위기에 처한다.
니키 리는 <부분들>(2002-2005)에서 신원 불명의 파트너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제시한다(도 1). 그는 때로는 연인과 함께 헝클어진 머리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편안한 모습을 하기도 하고, 연인과 쇼핑을 즐기기도, 좁은 방 안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며 적막하게 앉아있기도 한다. 또한 그의 헤어와 화장법, 분위기는 남성 파트너에 따라 바뀌고 있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는 니키 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점차 집단의 구성원과 니키 리 사이의 동질화될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들뢰즈가 말하듯, 반복이 차이를 배로 벌려놓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차이는 단지 생물학적 성별의 차이나 인종의 차이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차이의 문제틀은 관련된 쟁점들의 또 다른 층위, 즉 상이한 경험 층위들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이해되며, 고착화된 정체성 개념을 무한히 지연시킨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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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Niki Lee, Parts 14, 2003, Digital Print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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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리의 신체는 실제 여성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질적인 정체성의 변화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여성 신체는 성차(sexual difference)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성의 복수적인 코드들이 교차하는 장이다.4)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하나가-아닌 것(not-one)'으로 인식하는 데서, 복수적인 축들 위에서 다시금 쪼개진 시간이 되는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만 한다.5) 니키 리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생활했고, 부모님도 날 사랑해주셨다. 근데 그런 환경임에도 왠지 고독했고, 뭔가 갈망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는 니키 리가 ‘되기’를 향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 스스로를 '하나가-아닌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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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Niki Lee, Parts 33, 2003, Digital Print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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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들>에서 니키 리는 남성의 모습을 손이나 팔 등 신체의 일부만을 제시하고 있다(도 2). 부분적으로 잘려 나간 인물로 인해 작품은 평범한 일상스냅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니키 리는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의 신체를 감춰버리며 차이를 생성하는 자신의 신체를 강조하지만, 남성의 신체를 완전히 삭제하지 않고 일부 남겨두어 로지 브라이도티가 제시하는 세 층위의 성차를 생략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부분적인 신체 이미지는 여성이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진 이분법적 구분 하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며, 여성이 '대문자 여성'이 아닌 여성 주체로 존재하기를 가능케 한다.
사진 속 남성으로 표상되는 인물의 부재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관계는 비단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자아가 타자와 상호관계를 맺으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괄한다. 정체성의 형성 과정 속에서 니키 리의 신체는 <부분들>에서 보여주듯 하나의 관계, 하나의 경험이 아닌 다층적인 경험이 축적된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과 맺는 친밀한 관계의 형태로 보여지지만, 동시에 다른 타자와의 관계 맺기 과정에서 고정적인 정체성을 이루지 않고 무한히 지연되며 자아-타자, 남성-여성의 대칭관계를 무너뜨린다.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그의 모습으로 인해 일치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되며, 고정되지 않는 주체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니키 리는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능동적인 주체로서 존재론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니키 리의 작업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되기의 과정이며, 여성 작가로서 사회적 코드에 종속되지 않을 실천적 행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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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01), 182-183
2)로지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박미선 역, (서울: 여이연, 2004), 358.
3) 로지 브라이도티, 앞의 글, 176.
4) 브라이도티는 성차를 본질주의에 입각한 '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경제적 조건과 같은 우연적인 요소'가 아닌 '존재론적 양태' 그 자체로 본다는 점에서 성차를 부정하고자 했던 들뢰즈와 구분된다. 로지 브라이도티, 앞의 글, 233.
5) 브라이도티가 제안하는 유목적 주체는 정체성의 층위, 주체성의 층위, 그리고 여성들 사이의 차이들의 층위 모두에서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형상화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서 여성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하나가-아닌 것(not-one)으로 인식하는 데서, 그리고 차별화의 복수적인 축들 위에서 다시금 쪼개진 시간이 되는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로지 브라이도티, 앞의 글,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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