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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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여덟 번째 뉴스레터] 탈(脫)-형식의 형식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여덟 번째 레터는 최근 국내에서 열린 두 전시,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와 ⟪김구림 개인전⟫에 대한 비평으로 구성되었다.
이민정은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보인 미학적 경향성을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 1963-2019)의 '형의 정치(politics of form)' 개념과 연결짓는다.
박초림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예술가 김구림(b.1936)의 개인전을 맞아 그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1970년대 작업을 톺아봄으로써 그의 예술세계를 회고한다.
[① (지)형(形)의 정치: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대한 소고(小考)]
[② 김구림 예술에 대한 회고: 무의미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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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形)의 정치: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대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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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Seoul Mediacity Biennale, 이하 ‘SMB’) 《이것 역시 지도 THIS TOO, IS A MAP》(2023.09.21-11.19)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를 총괄한 예술감독 레이첼 레이크스(Rachael Rakes)에 따르면 제12회 SMB의 주제인 ‘비영토적 지도 그리기(non-territorial mapping)’는 서구의 지도학이 제시하는 합리주의적 명확성에 반기를 들며 “추상적이고, 감춰졌거나, 모호한 언어”가 필요함을 주장한다.1)
그러나 레이크스가 소개글에서 언급한 디아스포라와 이주, 그리고 대안적 관계맺기는 이미 비엔날레 관람에 어느 정도 익숙한 관람객이라면 진부할 정도로 들어왔을 것이다. 근 2년간 국내에서 개최된 비엔날레를 단적인 예로 들어보자면, 2022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 We, on the Rising Wave》(2022.09.03-11.06)의 네 가지 주제 중 하나는 ‘이주’였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Soft and weak like water》(2023.04.07-07.09)의 네 가지 소주제 중 하나 역시 이주와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일시적 주권’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이처럼 반복된 패턴을 그리는 동시대 비엔날레의 테마나 이번 SMB의 예외없음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동시대성을 함의하는 비엔날레의 특성상 담론적 개입은 피하기가 어렵고, 그 동어반복적 수사에 피로감은 쌓일지언정 이들이 발언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대신 필자가 주목한 것은 본 비엔날레에서 강조된 다소간의 형식적인 변주, 즉 미니멀한 조형언어와 비서구권 내러티브의 결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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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이끼바위쿠르르, <땅탑 Earth Monument>, 2023, 흙, 가변 크기. ⓒ서울시립미술관 |
(도 2)
토크와세 다이슨(Torkwase Dyson), <나는 그 거리에 소속된다 3, (힘의 곱셈) I Belong to the Distance 3, (Force Multiplier)>, 2023, 나무합판, 금속, 아크릴, 가변 크기.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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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SMB 《이것 역시 지도》의 주요 전시장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 입장하기 전, 관람객들은 먼저 미술관 뜰에 위치한 이끼바위쿠르르의 <땅탑 Earth Monument>(2023)을 마주한다(도 1). 진흙의 붉은빛과 직선적 형태의 면과 선, 그리고 지면으로부터 높지 않게 돌출되어 부담스럽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 작품은 마치 미술관 안뜰에 군집을 이루고 선 테트리스 조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재료로 쓰인 흙은 수도권 위성도시 외곽에서 채집한 먼지와 쓰레기가 섞인 흙으로, 공단이 밀집해 있던 위성도시들은 한때 이주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나 현재는 부동산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다.2) 이 사이를 통과해 미술관 내부로 들어온 관람객의 시야를 가장 먼저 장악하는 작품 역시 토크와세 다이슨(Torkwase Dyson, 1973-)의 거대한 설치작업이다(도 2).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맥락에서 지리적 공간이 흑인 신체에 의해 구성되고 주거화되는 방식을 탐구해온 작가의 출품작은 그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건축적 조각의 연장선상으로, 식민주의의 유산을 추상적 형태로 조형화한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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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크리스틴 하워드 산도발(Christine Howard Sandoval), <출현의 표면(두폭화) Surface of Emergence(diptych)>, 2023, 종이에 어도비 진흙과 흑연, 152.4 x 243.84 cm.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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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하워드 산도발(Christine Howard Sandoval, 1975-)의 <출현의 표면(두폭화) Surface of Emergence(diptych)>(2023) 또한 무채색의 스펙트럼 그리고 선과 면이라는 단순한 구성을 보인다(도 3). 이는 스페인 미션건축을 주제로 한 작가의 드로잉 연작으로, 산도발은 신작에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채취한 흙 샘플을 활용함으로써 선교(mission)를 생동하는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영토와 영토 사이를 매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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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제시 천(Jesse Chun), <시: concrete poem>, 2023, 흑연, 손으로 자른 한지, 나무 프레임,
158.74 x 91.44 x 6.35 cm. ⓒJesse Ch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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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근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단독 구성을 차지한 제시 천(Jesse Chun, 1984-)의 종이 작업은 언어를 음소 단위로 해체해 그 조각난 파편들을 반추상적 혹은 기호적 형태로 평면 위에 투공(透孔)한다. 그의 한지 작품 <시: concrete poem>(2023)은 한지에 흑연으로 선을 그린 후, 한글과 영어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고 번역될 수도 없는 텍스트를 칼로 도려낸 작업이다(도 4). 이 같은 ‘탈언어화’ 과정은 작가의 악보 작업에서도 드러나는데, 겹겹이 쌓인 악보의 흐릿하고 불투명하며,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형태는 신화화된 언어적 헤게모니에 균열을 가한다.
물론 제12회 SMB 《이것 역시 지도》의 모든 출품작들이 이러한 미학적 경향성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직물 블리스코와 이슬람식 타일에서 사용하는 강렬한 색상과 문양을 작품의 시각적 모티프로 활용한 사노우 우마르(Sanou Oumar, 1986-), 전통적인 목판 인쇄 방식을 계승한 아르차나 한데(Archana Hande, 1970-) 등의 작업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과 문양, 수공예성이 강조된 기법 등 에스닉(ethnic)함을 발산한다. "미디어를 매체가 아닌 매개로서 접근하고자 한" 이번 비엔날레는 이처럼 미니멀한 조형언어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형식들 사이를 종횡한다.4)
‘지도 그리기’라는 행위 이면에는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얽히고 설켜 있다. 이에 대항하여 작은 클러스터들이 점점이 찍힌 형태로 도시 서울을 매개하고자 한 제12회 SMB 《이것 역시 지도》는 이미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 1963-2019)가 2008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형의 정치(politics of form)’의 연장선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재료와 규모, 서사와 행위 간의 유희”로 설명되는 형의 정치는 그 배경에는 늘 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보다 안정된 조형언어를 창출해 내는 실험적 과정일 것이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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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이첼 레이크스, 「SMB12 소개」,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 안내 책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2023), 12.
2) 앞의 책, 21.
4) 레이첼 레이크스, 「SMB12 소개」, 13.
5) 오쿠위 엔위저, 「스펙터클의 정치학」,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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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해야 맞을까? 최근 많은 국내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한국의 실험미술을 재조명하는 것에 힘을 쓰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것의 주 동력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2023.05.26-07.16)에 연이어 ⟪김구림 개인전⟫(2023.08.25-2014.02.12)까지 개최하여 단색화와 민중미술에 편중된 한국미술의 기조 속에서 실험미술을 당당히 꺼내 보였다. 한국미술의 제1세대 아방가르드 예술가 김구림(b.1936)은 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판화,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등 한가지의 매체와 양식에 국한하지 않고 끊임없는 해체와 전복을 통해 아직까지도 예술에 대한 지치지 않는 공력(功力)을 보여주고 있다. 한창 실험미술을 주목하는 시기에 김구림의 소환은 그만큼 적절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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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김구림, <빗자루>, 1973, 오브재에 채색,
130 x 90 cm |
(도 2) 김구림, <삽>, 1974, 오브제, 80 x 26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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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김구림, <걸레>, 1974,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2분 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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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전 1970-80년대 한국미술에 관한 책에서 미술사학자 윤난지가 김구림의 예술이 ‘다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 떠오른다. 무엇이 김구림의 예술이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이번 개인전에서 주를 이루었던 오브제들로 예로 들 수 있겠다. 김구림의 <빗자루>(1973)와 <삽>(1974)은 일상 현장의 오브제로써 다다이즘이나 팝아트의 개념 안에서 맥락화하기 쉬워보인다(도 1, 2). 하지만 잘려지고 조각나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용품을 명백한 ‘흔적’으로써 설치한 것은 ‘현존(presence)’의 존재가치-혹은 효용가치-에 대한 질문을 두고 재맥락화를 유도한다.
그의 비디오 작품인 <걸레>(1974)는 이를 보다 확실히 보여준다(도 3). 영상은 걸레질이라는 반복된 행위에 의해 닳은 걸레가 조각이 나 그것을 담고 끝이 나는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걸레질이라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그 결과는 그의 작품에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 관객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 속에서 ‘현상에서 상태로, 결국 흔적으로’ 남게 된 사물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 김구림의 전략인 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물이 더이상 고정되고, 응집되고, 잠정적으로 현존할 수 없음을 밝힘으로써 말이다. 또한 이 흔적의 상태로만 남아있는 사물의 모습은-그 무엇의 지표(index)가 될 수도 있었던-작가의 행위성까지도 절대 도달할 수 없게 하기에 저자의 존재 역시 애초에 없었던, 모호한 것으로서 지워버린다. '퍼낼 수 없는 삽', '쓸 수 없는 빗자루', '닦을 수 없는 걸레', 이 모든 인위적인 결과물인 작품은 저자와 사물 모두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몰아내면서 현존의 가능성이나 그 효과 역시 해체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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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김구림, <걸레>, 1974,
식탁보에 실크스크린, 74 x 120 x 70 cm |
(도 5) 김구림, <걸레>,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목탄, 162 x 97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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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형태의 변주를 통해 사물을 ‘상태’로 가져옴으로써 작업에 대한 김구림의 개념적 탐구는 보다 심화된다. 걸레라는 소재는 비디오 작업 이후에 설치로서의 <걸레>(1974), 회화로서의 <걸레>(1977)로 다양하게 변모하여 나타난다(도 4, 5).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자면, 김구림의 작업 속 ‘진짜’ 걸레는 무엇일까? 우리는 각자 걸레를 어떻게 읽을까? 이렇게 김구림의 사물을 재현하는 다양한 기표들이 여러 작품을 가로질러 제시되는 형태를 윤난지는 데리다(J. Derrida, 1930-2004)의 차연(différance)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굉장히 명료하게 김구림의 작업과 맞아떨어진다.1) 차연을 통해 서구 전통철학에 의문을 제기한 데리다는 동일한 기표라고 하더라도 시간성이 개입하면 하나의 기의에 수렴될 수 없고, 끊임없이 유보되고, 미끄러지며 지연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김구림의 <걸레> 작품들을 다시 보자.
'젖은 걸레', '테이블 위에 얹어진 걸레', '도식화되어 그려진 걸레'는 도상기호(iconic sign) 위에서 모두 ‘걸레’이지만, 서로 다른 기표(걸레)들이 얽히고 설켜 하나의 절대적인 기의로는 읽힐 수는 없다. 결국 있는 것들의 차이만 존재할 뿐, 우리는 진짜 걸레와 가짜 걸레라는 결론은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구림이 행하는 기표의 다양한 재현은 말장난같이 보이지만 한순간에 우리를 끊임없는 사유를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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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사물의 현존(現存)과는 별도의 존재 상태로 묶고 있다. 가령 컵을 그린다고 할 때 나는 컵 자체를 리얼하게 그려넣는 것도 아닌, 컵 같으면서도 컵이 아닌 별도의 존재성을 담은 현존에로의 컵을 되돌려 보내려는 시도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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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디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화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차이’가 그의 예술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미술의 패러다임은 다변화를 꾀하였고,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김구림을 다시금 찾는 것은 비단 그가 가진 예술계의 권위와 실험미술의 거장이라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움의 소모 끝에 증식하게 되는 미술의 아이러니한 역사적 계보 안에서 미술이 우리의 느슨한 사고체계를 건드리는 것만은 유일하게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양태로 묶어두지 않음에 있어 그의 사물들은 화이트큐브 바깥과도 관계맺으며 다양한 발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여지를 남긴다. 그렇기에 김구림이 사물을 재현하는 방식은 겉으로 허무한 반복같아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무엇이든 의미하게 함에 있어서 힘을 가지는 것에 다름없다. 이것이 그의 예술이 여전히 진부한 옛-것으로 머물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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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난지,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한길사, 2018), 349. 2) 김구림, 「일상적인 사물의 탈바꿈」, 『공간』 5월호,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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