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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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일곱 번째 뉴스레터] 흔들리는 균형추 팽창하는 빵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일곱 번째 레터는 팽창하는 세계에서 균형을 잡는 주초돌을 쌓아올려보고자 한다.
김민주는 함양아의 작품을 통해 팽창하는 사회 속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찰하고, '균형'이라는 과정을 모색한다. 박예린은 안데스 작가의 <지질학적 베이커리>의 비유적 도구이자 결과물로서 '빵'이 예술 작품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사유해 본다.
[① 팽창하는 사회에서 균형잡기 ]
[② 당신이 먹는 그 돌은 담백하고, 포슬포슬하고, 약간의 갈색을 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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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인가?’ 혹은 ‘나 정말 잘 살고 있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현재 살아가는 의미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혹은 허무주의에 빠져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했다면 굳어져 버린 낡은 일상은 잠시 뒤로하고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의식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의 모습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바쁘다’이다. 또 다른 표현이 있다면 ‘빠르다’도 될 수 있겠다. 이같은 모습은 보통 흔히 우리 주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 꽉 막힌 차들을 앞으로 명동 성당 사거리의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면 수많은 사람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각자의 방향을 찾아 바삐 걸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시민들이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가 땅-하자마자 달려 나가는 것처럼 그들도 초록불이라는 출발 신호를 보고 재빠르게 각자의 길로 뻗어나간다. 서로 다른 옷차림과 생김새,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한자리에서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여 다른 나라들과 기술 경쟁력을 앞다투고, 여러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데는 이들-각자의 목표와 상황에 주어진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바쁘다. 그리고 빠르다. 이처럼 바쁘고 빠르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단면들은 함양아의 작품에서 축약되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함양아의 작품은 1분 1초가 빠르게 팽창하는 우리나라 현대 사회를 쪼개 부분 부분을 깊이 들여다보고 현 상황을 고찰하게끔 만든다. 함양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 속 누구나의 ‘나’를 보여준다. 작가는 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인들의 모습과 삶을 관찰하여 사회적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개인과 집단의 형태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의 서론에서 다루었던 허무주의와 삶의 기로에서 ‘왜’라는 의문은 함양아 작가 작품 속에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로 닿아 정치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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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함양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 2019, 단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7분, 사진출처: 대안공간루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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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아의 작품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연작은 사회, 정치, 기술, 교육,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개별적인 사례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류하며 사회 구조 시스템의 서사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2.0>(2019)에서는 고정된 카메라 앵글 속 성의 경계선을 안팎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각자의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도 1). 우리는 자연스레 인물들의 움직임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경계의 내 외부, 그리고 카메라 구도의 상부에 위치한 조직도에서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계선의 내부에는 나름 체계가 잡힌 듯한 인물들의 동작과 옷차림이(마치 직장 내 간부들의 모습, 지식인, 전문적인 직업적인 요소가 보인다), 외부에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화면 상단부에는 지도자 혹은 정치인으로 보이는 인물들로 구성된다. 수많은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서사는 결국 정치적인 집단 모습과 계급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관찰자이자 마치 창조주로써 작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시점에 놓인다. 하지만 재밌는 것도 잠시,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정치적이고 보이지 않는 계급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될 수도 있다. 얕게는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행위를 통해 삶을 관찰하고 보이지 않는 계급과 정치의 모습을 살펴볼 순 있겠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사회라는 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에 조직도가 불타는 장면을 통해 작가는 교육과 문화의 영역을 강조한다. 작가에게 교육은 미래의 가장 중요한 대책이다.1) 교육을 통해 사회 시스템의 구성원들의 자질이 개선될 수 있으며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교육 사회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작품에서 작가의 주장이 구체화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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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함양아,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3.0>, 2020, 3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사진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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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함양아, <넌센스팩토리>, 2013, 혼합매체, 가변크기, 사진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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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북서울 미술관에서 선보인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3.0>(2020)과 <넌센스 팩토리>(2013)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진 현대인들에게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지에 대한 모색을 시도한다.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3.0>은 정부 조직도와 같은 추상적인 기호들을 펼쳐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모습을 구사한다(도 2). 그리고 바로 앞에 놓여진 <넌센스 팩토리>는 사회에서 균형을 잡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균형과 사회의 관계를 주지시키는 공간으로 작동된다(도 3). 마치 로버트 모리스의 1971년 테이트 전시 구조물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은 좌우로 흔들리며 사람들이 올라가 중심을 잡도록 설계되어있다. 한 사람이 올라가 다른 사람이 또 올라가면 구조물이 치우치지 않도록 다른 쪽에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아야만 작품 위에서 서로가 안정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구조이다. 서로의 균형, 조화, 그리고 호흡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물은 앞에 놓인 영상에 대한 하나의 대책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팽창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내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서로가 균형을 잡아 나가는 것이다. 삶은 혼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타인과 부딪혀 살아가게 되어있다. 현대인들은 그러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나의 정체성과 자아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행위와 과정들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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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함양아, <잠>, 2015, 2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8분, 사진 출처 : 경기도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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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인과 교류하고 균형을 잡으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하는 우리에게는 피로감은 자연스레 형성되기 마련이다. 함양아 작가의 2015년 작품 <잠>은 팽창하는 사회를 버텨내는 우리의 피로감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도 4). 비상상황 발생 시 대피소로 활용되는 체육관에서 재난 상황 속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공간과 그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통해 개인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담아낸다.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가 겪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위기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파생되는지를 보여준다.
서론에서 이른 점심 시각 명동 성당 사거리의 모습을 예시로 들어 현대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의 길로 빠르게 걸어 나가다 보면 종종 방향을 잃을 때가 있다. 도시를 이미지화 하고자 한 린치는 현대인의 방향 감각의 상실을 오늘날 도시인들의 특징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총체성”을 그려내는 것이 탈소외의 방법 중 하나라 주장한다.2) 함양아는 바쁘고 빠르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위치를 발견하여 삶의 균형을 잡아나가기 위해 종종 간과하는 문제의식을 주지시키고, 대안으로서의 교육 사회를 제시한다. 나아가 함양아의 작품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인식적 지도그리기'를 영상과 설치 작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윤곽과 지형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3) 함양아의 인식적 지도그리기는 팽창하는 사회 속 혼란과 불안을 야기 하는 이슈들을 조망한다. 그리고 '교육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하며 계속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교육 실천 방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참고로 이 글은 자신의 위치를 계급도 내에서 찾으라는 말은 아니다. 함양아의 작품에서 보이는 현대인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개개인이 어떠한 정체성과 내면을 지니고 있는지, 자신의 상황과 상태를 되돌아보고 균형을 잡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서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했는가? 그런 사람에게 필자는 본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러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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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안공간루프와의 인터뷰, 대안공간루프, 2019년 11월 19일, 202https://www.youtube.com/watch?v=XjrvyNHagUE, (2023.10.09 접속).
2) 케빈 린치(Kevin Lynch, 1918-1984)의 도시 개념은 『도시의 이미지』(1989)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프레드릭 제임슨은 자신의 책 『후기 모더니즘이론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1985) 에서 주장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란 한 시대의 전체적인 상을 주체와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객관성으로 구성해내는 작업을 말한다. 제임슨은 도시에 국한된 린치의 주장이 “전 국가적이며 글로벌한 공간들”로 확대 및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림으로 “지도 그리기”를 현재 상황에서 요구되는 최우선의 과제로 설정했다.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제임슨은 현상에 대해 보다 면밀히 들어가 자본주의사회와 연관지어 분석과 비판를 내세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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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는 그 돌은 담백하고, 포슬포슬하고, 약간의 갈색을 띤다
박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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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데스(Andeath)의 <지질학적 베이커리 Geological Bakery>(2019-)는 지구의 지질학적 형성과 우주의 생성 원리를 베이킹의 과정을 통해 살펴보는 리서치 기반의 프로젝트다.1) 작업은 2019년 팩토리2에서 열린 동명의 개인전에서 시작됐다.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은 임시적으로 베이커리가 되어, 달걀 우주론, 분자 샌드위치, 달걀 동소체 등 과학적인 이름이 붙은 빵들을 굽고 판매하였다(도 1). 일종의 퍼포먼스로 시작한 작업은 이듬해 북한산, 도봉산 등 서울의 산에 올라 그곳의 지질학적 상태를 탐사하는 ‘빵산별 원정대' 워크숍으로 이어졌다. 워크숍 참가자들과 지질학자의 아이디어로 새로운 ‘지질학적 레시피'가 탄생하였다. 이 레시피를 실험하는 또다른 베이커리가 열리고, 또 그 다음 ….
이러한 순환의 과정 자체가 <지질학적 베이커리>라는 작품이 지닌 핵심적인 측면이다. 작품이 달고 있는 이름이 ‘지질학적 빵’이 아니라 ‘지질학적 베이커리’라는 점 또한 베이킹의 결과물인 빵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인 베이킹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안데스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빵은 지질학적 탐구를 위한 비유이자 도구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이킹) 과정으로서의 지질학이라는 점이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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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학적 탐구와 ‘빵'의 생경한 접점에 나는 고집스럽게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작가는 왜 남미 여행 중에 안데스 산의 봉긋한 능선들로부터 부푼 빵을 떠올리게 된 것일까? 단순히 둘의 외형이 닮아서 혹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 설명하기에는 입안에 텁텁한 맛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베이킹은 왜 미술 제도 (주로 미술관) 내부에서 수행되어야 했는가? 앞서 언급했다시피 베이킹과 빵이라는 단어를 엄밀히 구별하고 전자에 중점을 두는 해당 작업이, (빵만 전시될 경우) 전시 과정에서 ‘설치’나 ‘조각’이라는 단어로 가장 쉽게 환원되어 버릴 수 있는 곳이 전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는 빵이 전달의 대상으로 삼는 내용인 지질학과 먹고, 맡고, 만질 수 있는 빵이라는 매체가 공명하는 지점을 떠올렸고, 이것이 미술관 안에 단단하게 자리한 조각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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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미술 제도 안에서 작가가 자신의 워크숍 결과물을 작품, 조각, 오브제 등이 아니라 빵으로 부르는 것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며 실제 빵을 만들고자 제빵을 독학하고, 베이커리 운영 중에는 방문객들과 실제로 빵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다함께 시식해 보기도 했다(도 2). 최근 진행된 ‘못먹는 빵 만들기 워크숍’은 역설적으로 그의 빵이 본래는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그런데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왜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시각적 감각을 지배적으로 활용하는 일반적인 조각과 비교하였을 때, 먹을 수 있는 빵이란 만져서 쪼개고, 보고, 맡고, 먹어봄으로써 다양한 감각을 체감하게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소장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빵을 소장하는 것은 설령 관람객이 빵을 구매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먹지 않은 채 놔두면 이내 반드시 상하고 썩어버릴 것이므로, 빵은 가능한 빨리 섭취되어 사라져야 함 (혹은 사라져야만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이 미술관에 일시적으로 전시된다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각이 아니라 여전히 음식이다(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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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몸 속에서 잘게 분해되면서 크기와 성질이 달라지는 것 뿐이다. 소화 효소에 녹아 분자 단위까지 쪼개진 빵의 영양소들은 대소변으로 배출되고 그것은 곧 흙의 미생물과 결합하여 퇴비가 된다. 본래 빵이었던 것은 땅의 일부가 되어 그 위에 또다른 곡물을 키운다. 곡물은 다시 빵이 되고 누군가의 입에 들어간다. 땅을 경유하는 이 생명의 순환 고리가 수없이 반복하며 퇴적되고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지층이다. 따라서 생태계의 순환 구조에 대한 은유로서 빵은 곧 지구의 지질학적 형성에 대한 단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질학적 베이커리>에서 구워진 빵은 미술관 안에서 굳이 설치나 조각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섭취됨으로써 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조각의 시각권위주의에 대한 미각적 반격, 영양 섭취라는 특정 목적이 달성될 때에만 가치를 가지는 실용적 속성, 유물화되지 않고 순환하는 성질, 바로 이러한 속성들이 그것이 ‘빵’이기에 미술관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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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데스, <지질학적 베이커리> 홈페이지, 링크: https://geologicbakery.com/ (2023년 10월 19일 검색). 2) 그의 또다른 작업이자 리서치 프로젝트로서 지진파를 가청 영역으로 변환하여 테크노 음악으로 작곡해 보는 <지질학적 테크노>(2023)는 지질학에 대한 작가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지질학적 테크노> 홈페이지, 링크: https://geotechno.xyz/ (2023년 10월 15일 검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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