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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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여섯 번째 뉴스레터] ←↖︎↑→↘︎: 이것, 저것, 그것의 방향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여섯 번째 레터는 하나의 대상이 '작품'으로 인식되는 방식에 대해 다룬다.
김동민은 정서영의 작품에서 사물의 틀이 깨어져 기어코 조각으로 놓여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한문희는 감상자의 감상 방식에 대한 질문을 김범의 작품을 경유해 바라본다.
[① ‘오늘 본 것’을 조각으로 인식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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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메모를 적을 때, 그것이 쓰일 어느 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흘러갈 잠깐의 생각들을 흔적처럼 남긴다. 생각을 거듭 적어내어 쌓인 더미들은 어느덧 잊혀지는 듯하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느닷없이 발견되어 서로 얽히고 관계하며 어느 날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 결과물이 하나의 프로젝트든 창작물이든, 그 하나의 덩어리를 지긋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내포하는 더미들의 서로 얽히고 관계하는 일련의 과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은 무엇인가? 무엇을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각가는 무엇을 조각하는가? 정서영은 이러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에 의하면, 조각이 아니었던 단순한 사물들이 조각이 되어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조각은 통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완성된 결과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서영에게 조각은 사물과 사물이, 작품과 관객이 유동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장이며, 그가 주목한 것은 조각 그 자체이기 보다는 임의로 조합되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와 조각을 인식하는 사람과 사물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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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정서영, <유령은 좋아질 거야>, 2005, 비닐장판, 페인트, 나무, 제스모나이트, 50 x 400 x 180 cm, 2005년 1차 복원, 2016년 2차 복원, 2022년 작품 일부인 유토 원본을 제스모나이트로 캐스팅. |
(도 2) 정서영,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 2007, 철, 유리, 조명 기구, 89.5 x 110 x 67 cm / 87 x 112 x 7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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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을 형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간의 문제이다. 전시장에서 대부분 작품의 크기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이즈로 획일화되었으며, 작품간의 뚜렷한 구분 없이 전시 공간의 가운데에 던져졌다. 이러한 배치는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 작품과 작품간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그리고 정서영은 건축과 일상의 재료들을 게슈탈트로 제시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사물과 조각 사이를 유동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든다.1) 예를 들어 <유령은 좋아질거야>(2005)에서 작품의 구성은 비닐 장판과 페인트, 나무, 제스모나이트가 각각의 기능을 상실한 채 함께 겹쳐져 있으며, 해당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도 1). 우리는 1차적으로 그것이 설치인지 조각인지, 사물의 조합인지 판단한다. 그러나 ‘GHOST WILL BE BETTER(유령은 좋아질거야)’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유령이 무엇인지, 무엇이 ‘BETTER’한 것인지 추측하며 각 사물들을 재인식하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작가가 재료나 사물들의 조합을 조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기호를 사용한 것은 주목할만 하다. 언어는 작품에서 조각이라는 인식을 촉발하는 지표(index)로 기능한다.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들은 하나의 기호로 결합할 수 있는 기의를 찾아 머물며, 조각이라는 흐릿하고 유동적인 관계적 장소가 드러나는 순간을 지시한다. 작품에 선택된 건축과 일상의 사물들은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관계없는 엉성하게 조합된 모습으로 제시되면서 관람자는 쉽게 언어와 형태의 관계를 연결시킬 수 없게 된다. 정서영은 그 의미가 산발적으로 맺어지도록 의도하면서도, 카펫, 전망대, 파도, 조각적 신부, 아이스크림 냉장고 등의 단어를 제목으로 삼으며 조각을 가리킨다. 가령, 전시장 한켠의 형광등은 다면체에 갇혀 주변을 밝히고 있다(도 2). 이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관람자는 한참을 생각해야 하지만, 일단 작품의 제목인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를 읽고 나면 냉장고와 어쩌면 유사한 형태를 인식하게 된다. 이때 작품을 구성하는 철, 유리, 형광등은 비어있는 기호로, 그 사물을 둘러싼 공간와 언어로 채워짐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조각으로 존재하게 된다.
제목이 “언어가 되었을 때 작품과 같은 성질이면서 작품을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이길 바랐다는 정서영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 관계에 개입하여 우리를 교란시키고, 흩어져버리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조각이 발생하는 장소로 위치시킨다.2) 이렇듯 정서영은 조각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조각의 정의나 가능성만이 아니다. 그는 조각에 대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매우 활동적인, 운동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플랫폼으로서 조각은 흥미롭고 문제적인 매체이자 장소”라고 말한다.3) 그에게 조각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닌 동적인 과정이며, 그의 작업은 사물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다가 조각으로 인식되는 순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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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정서영, <세계>, 2019, 2채널 비디오, 가변크기, 10분 25초, 촬영: 함정식, 사운드: 류한길, 사진: 전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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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조각을 인식하는 과정은 시간을 끌어들인다. 캐스팅된 호두를 촬영한 <세계>(2019)는 조각적 순간에서 시간적 요소를 길게 늘어뜨린 작품이다(도 3). 호두는 다른 사물과 관계하기보다는 영상의 시선에 따라 그 환경과 관계한다. 관람자는 영상 속의 시선을 따라 긴 시간동안 호두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미세한 빛의 움직임이 호두에 미치는 작은 영향들을 관찰한다. 캐스팅된 호두를 둘러싼 길고 어스름한 시간과 빛의 공간 속에서 관람자는 심리적 게슈탈트를 거쳐, 점차 호두를 조각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작품과 관계하는 시간은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조각의 표시나 흔적이며, 그 지시대상은 단연 조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당대의 미술에서 조각이 공간, 설치, 심지어 미디어의 영역으로 확장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각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조각은 더 이상 얄팍한 장르적 경계에 의지하여 스스로 조각임을 호명하지 못하게 된다. 사물과 조각 사이에 위치하는 정서영의 조각 또한 그러한 위험에 직면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정서영의 조각이 결국 조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작품에서 사물이 사물로 존재할 수 있는 틀을 깨부순다. 틀 밖의 사물은 그 자체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사물은 비어있는 기호가 되어 주변 환경을 흡수하고 부딪힌다. 조각적 순간은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갈등하는 과정 속에서 “사물들 스스로가 이뤄내는 것”이며, 동시에 관객이 사물을 조각으로 인식하는 순간이다.4) 관람자 또한 작가가 무심한 듯 정교하게 설치해둔 지표에 따라 사물의 환경과 시간을 흡수하며 조각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조각적 순간은 열린 개념으로서의 조각을 가능케 한다. 이는 조각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조각의 내포를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며, 곧 사물이 조각으로 놓여지도록 이끌어내는 정서영의 힘이다.
정서영은 ‘오늘 본 것’들의 독특한 상태나 물성을 적어 두는 자신의 오랜 습관을 제목으로 삼았다. ‘오늘 본 것’들은 관계하고 부딪히다가 그에 의해 발견되었을 것이었다.《정서영: 오늘 본 것》에서 ‘오늘 본 것’ 중 그 하나의 덩어리를 지긋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담고 있는 사물들의 조각적 순간을 증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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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슈탈트(Gestalt)는 눈과 뇌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인지하는 과정을 다루는 가운데 정립된 단어이다. 모리스(Robert Morris)는 자신이 사용하는 게슈탈트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 없이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것을 심리적 인식을 가져오는 형태의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진휘연, 「미니멀리즘 조각의 비환영성: 로버트 모리스의 게슈탈트(Gestalt)개념을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8(2007): 604.
4) Baraket Contemporary와의 인터뷰, 위의 글,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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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건 때로 의구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 그것이 놓인 위치, 작가의 말을 풀어놓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은 나의 감상이 아닌 타인이 짜놓은 길 안에 위치해 자각 없이 그 방향만을 향할 수 있다. 애석한 점은 그 유도선이 꽤 정제되고 믿을만해 아예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부의 개입 없이 감상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현대 미술은 그래서 자주 어렵다는 지탄을 받는다. 감상 불능의 시대에 놓인 이미지는 감상의 대상보다 투자의 대상이 될 때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 역시 시대가 요하는 적절한 감상법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다만 오 만원짜리 원화와 오십억짜리 판화의 차이가 단지 투자 가치로만 설명된다면 그 역시 공허한 감상일 터다. 말하자면, 감상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감상문에 흔히 등장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에 빠져 있는 ‘많은 생각’에 대한 서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작품을 보며 생각을… 하기는 하는가?
리움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범 작가의 《바위가 되는 법》(2023. 07.27 ~ 12.03)은 우리가 아는 것, 보는 것, 믿는 것에 대한 의심을 촉구하고 모든 관습적 사고를 몰아내며 새롭고 다르게 ‘보는 법’을 일깨운다.1) 일례로 <임신한 망치>(1995)는 물활론적 사유를 단적으로 나타낸다(도 1). 이는 무생물-도구로 사용되는 망치에 임신이라는 상태 변화를 덧입힌 것이다. 마치 망치가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망치의 ‘임신’은 그것을 다르게 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라는 점에서 허무해진다. 망치는 공구로서 목적도, 임신의 목적도 잃고 오브제로 곱게 다루어진다. 망치가 오브제 작품으로 변모한 순간, 그리고 미술관에 곱게 뉘어진 순간부터 허무는 예견된 수순이었을 테다. 그것은 공구 도구라는 쓰임을 잃고 그를 보는 이들에게 다른 생각을 촉발케 하는 터닝 포인트, 즉 다른 목적을 가진 (여전히) 도구로 역할이 바뀐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2002) 역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의 상태를 변화시켜 관습적 사고를 의심하게 만드는 한편, 그 어떤 쓰임도 실제로 제공하지 못한다. 이들은 특정한 상태 변화를 부여받아 전시되었지만, 그 역시 작품이라는‘목적’을 위해 상태가 임의로 변화되어 실상 쓸모를 잃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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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김범, 〈임신한 망치〉, 1995, 나무, 철, 5 × 27 × 7cm. 개인 소장. 본인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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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2010)은 궤를 같이한다(도 2). 돌은 나무 위에 얹혀 ‘새’로서 필수적으로 습득해야 할 개념을 배우며 자신이 돌이 아닌 새라고 교육받고, 나는 법을 훈련받는다.2) 다른 개체에서 영향을 받은 다른 목적을 가진 무엇이 되는 방법이 87분 동안 설파되는 동안 돌은 돌도 새도 아니게 된다. 돌이 그것을 이해할는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것을 보는 감상자에게는 그래서 이것을 돌이라 불러야 할지, 새라 불러야 할지, 새가 된 돌이라 불러야 할지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혼란은 『변신술』(1996)에서도 유효하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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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바위가 되는 법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앉거나 눕는 등 몸을 낮추어 하나의 형태를 정하되,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일 폭우등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그에 의해 자리가 움직여지거나 아래로 구르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고 본래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땅에 닿는 부분에 이끼가 끼거나, 벌레들이 집을 짓게 되면 다치지 말고 보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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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김범,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2010, 돌, 나무, 목재 탁자, 12인치 평면 모니터에 단채널 비디오(87분 30초), 가변 크기.
클리브랜드 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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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술’은 일관적으로 인간(혹은 생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무생물에게 생물의 특성을 쥐여주며 두 개의 목적을 모두 제거했다면, 생물에게는 무생물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며 그 무엇도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바위'와 '바위가 되는 방법을 배운 인간'이 같이 있다고 한들 이 둘은 동일할 수 없다. 같은 행위-행위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하면서 다른 목적을 지니는 것, 그로부터 어떠한 목적도 달성할 수 없는 것. 이는 김범의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묘한 허무를 설명해준다.
이를 김범의 작품이 지시문의 형태를 띠는 것과 연결 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시문은 특성상 스스로의 욕구가 아닌 외부의 요구를 따른다. 이는 안정감을 주는 한편 ‘나’가 소거되어 있다는 감상을 면피할 수 없다. <풍경 #1>(1995)은 지시문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파란 하늘과 나무들과 흐르는 강을 상상하라는 텍스트는 즉각적으로 그를 상상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시를 따라 잘 감상했다는 안정감과 그로부터 내가 실제 감상하고 있는 건 무엇인지에 대한 의뭉스러운 공허가 공존한다. ‘새롭고 다르게 보는 법’을 타인의 설명이 아닌 온전한 감상으로 받아들이려면 지시문 이후, 상상 이후를 스스로 설정해야한다.
거대한 미로 그 자체인 <친숙한 고통 #8>(2008)은 일말의 쾌감을 얹어준다. 거대한 캔버스는 자체로 하나의 지시문이다. 미술관에서 갑자기 시작된 미로찾기는 자연스레 시작과 끝을 찾게 만들며 문제를 해결했다는 즐거운 감각을 선사한다. 이 미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느낌-물론 풀지 않아도 상관없다-은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서 있게 만든다. 내러티브 가득한 이미지 앞이나, 흑백의 복잡한 미로 앞이나 우리는 동일하게, 미술관에-걸린-캔버스 앞에 서 있다. 두 캔버스 앞을 '감상'하는 우리의 같은 행위에 다른 목적이 덧씌워진다. 우리는 지시문이/이미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상상도 하고, 거대한 미로도 해결한다. 그럼에도 어딘가 공허한 뒷맛이 계속되는 건 길잡이를 따라가면서도 목적지를 스스로 상실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작품 앞에 서 있는 건 나지만, 감상에 나의 주관은 없다.
비단 김범의 이번 전시뿐 아니라, 많은 작품은 일정 정도의 가이드 라인과 외부의 설명이 필요하다. 작가의 시니컬한 유머를 따라가며 미술관의 정제된 설명을 듣는 것 역시 감상을 도와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전시에서, 이 시점에서 다시 개인의 감상으로 질문을 돌리는 이유는 우리가 종종 그 가이드라인을 너무 의심 없이 따라가 오히려 내 감상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김범의 오브제가 제시하고 있는 상태와 다를 바 없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전시를 보는가, 그 안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목적을 증명하기 위해 본래의 목적을 잃은 것들, 그 '잃음'에 대해 간과하는 순간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길 안에서 목적지를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게 비로소 '나'의 감상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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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나무가 되는 법 2. 문이 되는 법 3. 풀이 되는 법 4. 바위가 되는 법 5. 냇물이 되는 법 6. 사다리가 되는 법 7. 표범이 되는 법 8. 에어콘이 되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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