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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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다섯 번째 뉴스레터] 침묵하는 기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다섯 번째 레터는 침묵하는 기술을 다룬다. 우리 삶과 밀접하면서도 막연하게 다가왔던 '기술의 발전'은 어느 순간 일상을 바꿨다. 심하린은 녹음된 '침묵' 속에서 기술 장치의 발전과 오늘날 권력 시스템이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하는 로렌스 아부 함단의 작품을 분석한다. 최은총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디지털 기반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신체성의 이유를 쫓아본다.
[① 경계 밖의 존재들에게 불을: 로렌스 아부 함단의 더러운 증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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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밖의 존재들에게 불을: 로렌스 아부 함단의 더러운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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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이 불로 어둠을 밝힐 것인가, 이 불에 타 죽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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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후, 우리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인간에게 불은 지구 생명체의 위계질서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무기나 다름 없었는데, 불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압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맹수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었고, 식습관도 변화하게 되었다. 고기를 익혀 먹게 되면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섭취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로 인해 인간은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사건들은 흔히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비견되곤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여러 개의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존재하지만, 그중 하나로 '녹음' 기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녹음 행위가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갖가지 논란을 야기하는 현시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보인다. 실제로 통화 녹음이나 녹취록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고, 주장이 상반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핵심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는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음악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저장하여 재생해주는 축음기의 발명은 인류의 오래된 꿈의 실현이라 평가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축음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오던 인류의 기록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주인공이며, 동시에 무의식이라는 실재의 세계를 인류에게 드러내며 마침내 ‘현대’를 견인한 근대의 동력이었다. 축음기 기술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공간에서 인간 지각의 방식이 분화되어 변화하는 데 중요한 물적 토대로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서는 청각적 데이터를 기록할 때 인간에게 의미 있는 소리만 선별하여 문자로 저장했다고 한다면, 이제 모든 소리를 차별 없이 저장하는 축음기는 '무의미한 소음'들을 최초로 인식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새로운 음향 녹음과 재생의 기법은 음악예술 장르에서 커다란 전환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현대라는 거대한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데 기여했다. 결국 기록과 재생이 동일한 바늘 하나로 이루어지는 최초의 기계였던 축음기는 그 당시까지 서구의 유일한 시간 저장 수단이었던 문자와 악보를 대체하고, 저장과 조작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면서 현대의 매체기술시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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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로렌스 아부 함단, <사이드나야(누락된 19dB) Saydnaya (the Missing 19dB)>,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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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할 점은 ‘소음’들이 더이상 의미없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과 더 나아가 ‘침묵’에 가까운 소리에도 유의미한 것들이 실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일테다. 소리를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요르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는 로렌스 아부 함단(Lawrence Abu Hamdan, 1985-)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비디오, 설치 및 라이브 공연을 사용하여 소리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포렌식 청취"를 수행하며 소리, 건축 및 정치의 교차점을 조사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며, '시각적 경험'에 비해 지금까지 훨씬 덜 주목받았던 '청각적 경험'을 통해 권력의 실체를 폭로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프라이빗 이어(private ear)'라 일컫는데 이는 영국에서 사립탐정을 'private eye'라고 부르는 데서 온 것이다. 사립탐정이 시각적인 증거를 채취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청각 증거를 수집해서 그걸 분석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지향한다.2)
다만 아부 함단의 관심사는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시스템 밖에 존재함에 따라 정치와 법의 영역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더러운 증거(dirty evidence)’들이다.3) 이를테면 <사이드나야(누락된 19dB) Saydnaya(the missing 19dB)>(2017)는 시리아 정권의 악명 높은 사이드나야(Saydnaya)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청각 기억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오브제와 영상 및 사운드 설치작업으로 구현한 작품이다(도 1).
사이드나야 감옥의 수감자들은 눈을 가린 채로 수감되기 때문에 그 건물의 외관이나 구조를 전혀 알 수 없었으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비인간적인 환경에 갇혀 고문과 구타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 있는 수감자들의 청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져서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그 감옥에 방이 몇 개인지, 어떤 방의 문이 열리는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는 청각 증인들과의 2년에 걸친 작업을 통해 작가는 그들의 증언, 특히 귓속말로 들은 내용을 녹음하는 데 집중하였다.4)
이때 아부 함단이 중요하게 관찰한 것은 인터뷰 대상자들의 속삭임에 기록된 데시벨의 차이였다. 그는 2011년 석방된 수감자들과 아랍의 봄(Arab Spring) 시위로 2011년 이후 구금된 수감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19 데시벨의 간격을 강조하며, 이 차이는 곧 정치범이 수감된 2011년 이후 간수들이 수감자 간의 어떤 형태의 대화라도 듣게 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위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소리와 침묵이 특히 지배, 권력 및 저항의 기술과 연결되는 복잡한 방식을 환기해준다.
물론 우리는 분명 존재하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흩날려가지 않은 채 생생하게 담겨 있는 녹음 기록물이 일견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소리 녹음은 그저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파장, 혹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 서사의 잔여물일 수 있으며, '소리 조각'들은 임의로 재배치될 수도 있다. 아부 함단 또한 이와 관련하여 “언제나 소리는 이미 더러워져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러운 증거’들을 통해 사건이 어떻게 저장되고 전달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것을 강조하며, 소리가 소리 그 이상으로 들릴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은 경계 밖의 존재들에게 불을 건네주어 보다 구석구석 밝아진 모습의 세계를 꿈꾸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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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현주, 「축음기와 실재의 소리 - 프리드리히 A. 키틀러의 이론을 중심으로」, 『미학예술학연구』 44 (2015): 111-32.
3) Caleb Kelly, “Forensic listening in the artwork of Lawrence Abu Hamdan,” Sound Studies 9:2 (2023), 2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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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미술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 디지털, 온라인에 기반한 예술에 진심인 듯 보인다. 이 글을 적는 2023년 9월, 근 한 달간 《일시적인 것의 방 – 컬렉팅 미디어 아트》(아트센터 나비), 《싸이퍼: 서사와 공진화》(아케이드 서울), 《유 세미나에서 지구까지》(문래예술공장), 《조각모음》(문래예술공장), 《어둠 속의 예언자》(토탈미술관), 《너는 이미 죽어 있다》(더 레퍼런스), 《스핀-오프》(엘리펀트 스페이스), 《해커스페이스》(TINC), 《Meta Chorus》(TINC), 《팔/발/말: 랜덤 노이즈》(더 윌로) 등의 전시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 글은 앞서 언급한 전시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인 ‘신체성’을 쫓아보는 여정이 될 테지만, 여러 안드로이드 이론이 증명했듯, ‘명확한 이유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를 전제로 삼는다.
작가들은 발 빠르게 작품에 새롭게 등장한 AI 기반의 디지털 기술을 반영하고 있었다. 사람처럼 말하고 사고하는 챗지피티(Chat GPT). 완벽한 신체 기하학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피부의 질감과 색감마저 사람 같은 메타휴먼(도 1, 2). 나는 스스로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규정해 왔다. 청소년기부터 스마트폰과 함께 24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여가시간에는 유튜브, 넷플릭스, 인스타그램을 손에 달고 살기 때문이다. 난 디지털 기술이 익숙함에도 최근 전시에서 보이는 작품이 새삼스레 생경했던 이유로 ‘신체성'을 들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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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김준서, 《Meta Chorus》, 전시 포스터, 2023, TINC. |
(도 2) 김준서, 《Meta Chorus》, 전시 포스터, 2023, TIN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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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김준서 작가의 <Meta Chorus>(2023)는 같은 크기의 프레임 안에 각기 다른 메타휴먼이 합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과의 외향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신을 향한 믿음을 상징하는 데서 시작한 ‘합창’을 한다는 점에서 생경함이 도드라졌다. 또한 세밀하게 조정된 명암법으로 실제 공간의 한날 한시에 같은 조명 아래 모여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속 메타휴먼은 개개인의 고유성과 집단성 심지어 믿음까지 재현하며 관람자를 ‘언캐니(Uncanny)'로 이끌었다.
언캐니란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친숙하다고 여겼던 것에서 우연히 감지된 낯섦이 환기한 두려운 느낌을 뜻한다. 김준서 작가의 작품에 언캐니가 환기되었던 이유는 단지 외형적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우리가 감지하거나 고려해 오지 않았던 인간의 미시적인 요소까지 낱낱이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스크린에 갇힌 사람임에도 생생한 ‘신체성'이 감지되며, 우리를 순간 언캐니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준서 작가가 표현한 메타휴먼의 ‘신체성'은 외형뿐만 아니라 인간 이미지의 자연스러운 동작, 인간의 습성과 욕구의 반영까지 반영한 것이다. 보다 이면의 메타휴먼의 제작 과정까지 생각하면 작품의 신체성은 인간을 반영하기 위해 사용된 소프트웨어의 인공지능의 자기생산과 피드백 회로를 따라 재조정되는 자기 구성적 작용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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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활용해 인간을 재현하려는 노력, 그로 인한 언캐니와의 조우는 1960년대에 로봇 공학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 1927-)는 인간과 닮은 로봇인 안드로이드에서 발생하는 언캐니를 수치화한 학자이다. 안드로이드의 목적은 인간의 기계적 재현이기에 필연적으로 로봇의 외향과 행동 양식은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다. 마사히로는 언캐니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로봇이 인간을 얼마나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는가에 따라 변화하는 언캐니의 정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그는 로봇과 인간 사이 발생하는 언캐니가 “인간과의 유사도"라는 변인에 따라 발생함을 발견하게 되었다.1) 당시 마사히로가 측정한 유사도의 변인은 ‘친숙함'과 ‘움직임의 정도'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기계에서 느껴지는 섬뜩함과 불쾌함은 혐오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의 연구는 언캐니의 이유를 밝히면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주었다.
이에 화답한 연구자는 데이비드 핸슨(David Hanson, 1969-)으로, 그는 언캐니의 해소를 위해 마사히로가 측정한 변인에 미학을 적절히 끌어들였다.2) 그는 마사히로가 측정한 변인이 불변의 축이 아니라 어떤 계기나 전략으로 인해 감상자의 감성의 변화를 이끌면 언캐니는 사라지거나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방법은 언캐니를 불러일으켰던 안드로이드라도 자주 만나 친숙해지는 것과 안드로이드의 외향에 보다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미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사실 핸슨이 제시한 미학적 전략은 이미 우리 삶에 익숙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보이는 버츄얼 아이돌, SF 영화에서 보이는 안드로이드 친구, 그 영화를 손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OTT 서비스의 출현 등의 미디어 환경의 발 빠른 변화는 기계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혼합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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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김준서의 작품과 같이 우리에게 미적인 측면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진한 신체성을 내비치며 언캐니에 휩싸이게 하는 작품들은 만날 때면, 인간에게 기계와 기술이 얼마나 착근되어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러니 <Meta Chorus>의 수많은 스크린에 떠다니는 얼굴들을 바라보며, 영상통화로 만났던 사람들이 떠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계와 기술은 점점 더 강한 신체성을 내비치며, 우리를 익숙하게도 낯설게도 이끌고 있다. 동시대 작가들이 작품에 기술을 사용하며 알게 모르게 기술에 스며든 신체성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이를 미적으로 전유하고 있기에 기술과 디지털, 온라인에 기반한 전시에 신체적인 특징이 많이 보인 건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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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준, 「안드로이드 과학과 포스트휴먼 언캐니」, 『미학예술학연구』, 68 (2023): 37. 2) 앞의 글,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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