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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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두 번째 뉴스레터] 발(發)하는 삶과 결정(結晶)된 죽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두 번째 레터는 살아있기 위한 투쟁의 작업 양상을 다룬 글이다.
에이즈 발병 초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액트 업(ACT UP) 운동은 사회적으로 무시되었던 에이즈를 예술의 영역에서 가시화하였다. 김영재는 신체를 통해 전해지는 자극들을 감각하며 그것이 촉발하는 긴장감을 형상화한다.
결정지어진 끝을 두고 살기 위해 벌이는 투쟁들은 더 큰 세계를 끌어당길 것이다.
[① 죽음의 애도를 대신하여: 생존을 시도하는 사람들]
[② 자극과 감각 사이,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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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애도를 대신하여: 생존을 시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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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수많은 함의를 갖는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음을 말할 수도, 동문서답을 칭하는 경우도 있으며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대화가 어긋나는 때를 칭하기도 한다. 평소에 가장 자주 맞는 상황은 아마 세 번째일 것이다. 개개인의 배경은 너무나 상이해 친구, 가족 등 친밀한 관계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개인-개인의 갈등뿐 아니라 개인-집단, 집단-집단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기에 발생하기도 한다. 사회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어 높은 위치의 사람은 타인과의 의견 차이를 자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낮은 위치의 사람은 숨 쉬듯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어떤 존재나 이념은 너무나 미약한 허우적거림이라 이를 언어화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떻게 들리지도 않는 작은 목소리가 응집될 수 있는가, 소수의 응집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왜’는 언제나 ‘어떻게’에 선행한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묻기 전에, 왜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명확한 답은 살기 위함이다. 미비한 존재일수록 은유적인 의미의 죽음이 실제 죽음에 더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일례로 1980년대 미국의 상황에 주목해 보자. 당시 미국의 LGBT 공동체는 게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적 지향성을 강조하는 한편 결혼 등 이성애 규범적인 질서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당대 지배 체계에 포섭되고자 했다.1) 사회에 흡수되고자 했던 이들의 전략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의 도래와 함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다. 미국의 첫 에이즈 환자는 1981년에 보고되었는데, 이후 약 2년간 미국에만 600여 명의 에이즈 환자가 사망하였음에도 국가와 언론은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2) 에이즈 환자들은 극히 한정된 방식으로 재현되었고 말이 없었으며-죽었거나 설명할 언어가 없었거나-그렇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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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업(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은 1987년 비평가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등을 주축으로 결성된 에이즈 운동(movement) 그룹으로, 많은 순수 예술가와 상업 예술가가 소속된 거대한 그룹이었다. 말 없는 이들을 위한 운동이 예술가가 대거 참여한 정치적 활동이었음은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몇몇 예술가는 액트업에서 따로 나와 그랑 퓨리(Gran Fury, 1988-1995)라는 미술 그룹을 결성해 거리, 미술관, 잡지 등에 이미지로써 에이즈를 가시화한다. 건물 외벽, 버스 광고판,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이들의 작업은 예술이자 정치적 행동으로서 기능하고, 에이즈 운동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침입한다. “30분마다 한 명의 에이즈 환자가 죽는다(ONE AIDS DEATH EVERY HALF HOUR)”, “키스가 죽이지 않는다: 욕심과 무관심이 죽인다(KISSING DOESN'T KILL: GREED AND INDIFFERENCE DO)” 등의 문구는 에이즈 이슈는 무관심으로 대응하며 적절한 치료 체계를 만들지 않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담지하고 있다(도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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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Gran Fury, KISSING DOESN'T KILL, 1990, Ink on vinyl, 버스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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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 애도 이후. 그럼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나. 체제에 흡수되는 방식은 꽤 안전해 보인다. 순응의 무해함을 입고 적진에 몸을 숨기면 공격당하지 않으리란 순진한 믿음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응은 자발적인 굴러 떨어짐이다. 체제에 위기가 닥칠 때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건 굴러떨어진 소수의 이들이다. 체제는 소수 집단의 발화를 차단하며, 가로막혀 전달되지못하는 말은 한낱 소리로 공중에 흩어질 뿐이다. 예술은 목소리가 말이 될 때 종종 관여하고, 그 개입을 통해 세계를 문제 삼아 불화함으로써 소수의 목소리를 말로 변환시킨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밑바닥의 누군가를 꺼내고자 손을 뻗는다(혹은 높은 확률로 밑바닥에는 예술가가 있다). 모든 손 뻗기는 정치적일 테지만 그것이 꼭 가두 행진이나 참여 서명 운동의 형태를 띨 필요는 없다. 스쳐 지나가는 버스의 광고판에서도 누군가는 뻗은 손을 기민하게 눈치챌 것이며, 이들의 맞닿은 세계는 서로를 움켜쥐어 끌어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응집과 확장은 곧 정치가 되어 세계를 문제 삼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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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강일, 「역병에서 살아남는 법과 퀴어 정치학」, 『인문학논총』 37 (2022): 135. 2) 고강일, 위의 글, 136. 3) 김진아, 「에이즈, 그 재현의 전쟁: 미국의 대중매체와 예술사진 그리고 행동주의 미술」, 『서양미술사학회』 28 (2008): 127. 4) 김진아, 위의 글, 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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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향수냄새에 머리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빛을 차단해야 편히 잠들 수 있고, 냉방기의 바람이 나를 향할 때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해지는 자극들이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이 자극들은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 때로는 그 자극이 너무나도 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버거워진다. 삶은 외부 자극을 끊임없이 버텨야 하는 고난의 과정일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마주했을 때, 베개에 고개를 묻고 귀를 막아버리며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자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스티커를 잘못 떼어낸 자리에 끈적하게 눌러붙은 먼지처럼, 외부 세계의 자극은 감각과 감정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이것들은 비우고 닦아내도 다시금 그 자리를 차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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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포 영화를 잘 못 봅니다. 시각적 잔상이 오래가서요. (...) 또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주 몸에 소름이 돋곤 합니다. (...) 앞서 열거한 감각들은 개별적이지만, 모두가 그러하듯이 저는 이 감각들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감각의 총체는 저의 신체와 감정에 큰 영향을 줍니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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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의 작업에서 신체는 자극을 수용하는 감각기관의 총체, 감정을 느끼는 주체로서 매우 중요하다. 신체는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한다. 주체를 자극하는 외부 세계와 신체는 완전히 일치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작은 틈새를 두고 교섭한다. 따라서 틈새는 주체와 세계가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경계면과 같다. 김영재는 그 틈새를 고요하게 들여다보며, 외부 자극이 촉발하는 불편한 긴장을 형상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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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김영재, Be skin and bones, 2023,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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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skin and bones>에서 비정형적인 검은 형태들은 가는 철근에 의지하며 위태롭게 걸려있다(도 1). 그 형태는 방바닥에 나뒹구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처럼 보이기도, 잘라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목같은 검은 형태들은 주변의 공기와 접촉하며 점차 수분이 말라간다.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외부 세계의 간섭에 저항하지만 종래는 더 이상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쩌적 갈라져 추락한다. 형태들이 추락하기 직전에 내는 불규칙한 소리가 있다. “탁”, “따닥”하는 소리들은 검은 형태가 떨어져 더 큰 소리를 낼 것을 예고하며 관람자를 감각적 체화로 유도한다. 관람자는 곧 일어날 일에 대해 경계한다. 그리고 형태들이 추락할 때 순간적으로 놀라며, 불편한 감각을 체화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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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김영재, The sound of falling, 2023, mixed media on wood panel, 162.2 x 130.3cm. |
(도 3) 김영재, Immortality series, 2022, mixed media, 17 x 2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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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nd of falling>은 이러한 긴장감을 담아낸 평면 작업이다(도 2). 선형적인 검은 형상들은 산화철을 연상시키는 거칠고 혼탁한 화면을 유영한다. 이 형상들은 역시 죽은 나무토막을, 머리카락을 닮아있다. 이들은 유약한 모습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작은 틈새를 만들어낸다. “오랜 시간 무언의 힘, 예컨대 중력이나 압도감과 같은 힘을 버텨온 듯한 부식된 화면은, 그 자체로 세계와의 접점을 드러낸다”는 작가의 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Be skin and bones>에서 추락한 형태들은 점점 더 잘게 쪼개진다. 김영재는 떨어진 잔해들을 레진 속에 붙잡아 두었다(도 3). 이 잔해들은 더 이상의 자극에 노출되지 않고 머무른다. 그렇다면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것들은 완전한 존재일까? 안전을 부여받은 이들은 세계와의 접점에서 뒤로 물러나 박제될 것이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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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재 작가와의 인터뷰(2023년 5월 22일).
2)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2014)에서 주인공 훠스카는 불사의 영약을 마신 뒤, 불멸의 인생을 얻는다. 그에게 주어진 무한한 시간은 모든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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