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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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한 번째 뉴스레터] 도넛(Do Nut)과 향수: 비인간의 행위력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한 번째 레터는 신유물론자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의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의 관점으로 두 작가의 작품을 해석한 글이다. 베넷은 생기적인 물질성에 인간도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와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배양하자고 주장한다. 두 예술가는 베넷의 논의를 경유하며 비인간의 행위력과 더불어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①통제와 혼돈 넘나들기 통한 ‘탄력적인 전체’ 느끼기]
[②“안성환의 ‘생존일지’”-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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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은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을 통해 인간 중심의 행위자 개념을 버리고 비인간적 물질들에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동등한 ‘행위소(actant)’로 바라볼 것을 주창하였다. 이론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베넷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개념을 빌려오며,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말한 ‘배치(assemblage)’의 특성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생명과 물질의 이분법적 분리로부터 벗어나, 물질적 구성체들의 활력(vitality), 즉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을 강조한다.1) 이때 행위소는 행위의 원천을 가리키는 라투르의 용어로,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이 아닐 수도 있으며, 대부분 그 둘의 조합이라고 설명된다. 또한 행위소는 ‘간섭자(intervenener)’이자 ‘준 원인 조작자(quasi-casual operator)’로서 어떠한 배치 내에서 창발적인 힘, 즉 ‘배치의 행위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2)
베넷에 따르면 배치는 “여러 종류의 생동하는 물질들과 다양한 요소들을 일시적으로 묶은 것”으로, 살아있고, 진동하는 연합을 뜻한다.3) 이렇듯 일종의 네트워크화된 구조를 의미하는 배치는 그 자체로는 고유한 행위성이 없으나, 서로 협력하는 행위성을 갖게 된다. 이는 수많은 행위소들이 상호 교류하면서 그들의 행위성이 드러남을 의미하기에, 배치의 행위적 능력은 배치를 구성하는 물질성의 생기를 통해 가능하다.4) 결론적으로 베넷은 생기적 유물론자에게 윤리의 시작은 공유되어 있는 생기적 물질성에 인간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며, 비록 우리가 언제나 인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에워싸고 있음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사물이 가진 능력을 포착하는 것은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넷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유되는 생기적인 물질성에 인간도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자, 이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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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 7-9. 2) 앞의 책, 51-52.
3) 앞의 책, 81-84.
4) 앞의 책, 104-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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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혼돈 넘나들기 통한 ‘탄력적인 전체’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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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바뀔 것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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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모토 아키(Sasamoto Aki, 1980-)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로 음악가, 안무가, 무용수, 수학자 및 과학자들의 협력을 통해 다수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특히 그는 주어진 환경적 조건과 이에 반응하는 물체들을 시각화·안무화하는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섬세하게 배열한 변형된 사물들 사이에서 일상생활의 단면에 있는 기이한 감정을 발화하곤 한다.2) 이 글은 사사모토 아키의 작품을 '통제(Control)'와 '혼돈(Chaos)' 사이의 유영(遊泳)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도넛 다이어그램 Do Nut Diagram〉(2018)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약동하는 전체의 불확정적인 탄력”을 시각화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와 같은 사사모토의 작업은 요소들의 결합에서 나오는 효과, 즉 '배치의 행위성'을 주장했던 신유물론 계열의 사상가 제인 베넷의 견해와 맞닿아 있는 것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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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Sasamoto Aki, Do Nut Diagram, 2018, Digital video, 20:01 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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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모토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주제는 ‘통제된 혼돈’에서 시작하여 ‘통제할 수 없는 혼돈’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도넛 다이어그램〉(2018)은 견고해 보이는 개념들을 분해시킴으로써 탄력적이고 불확정적인 전체를 느끼도록 한다(도 1). “제작은 언제나 협업이고 존재는 언제나 함께 있다”를 주제로 한 2019년 피스카르스 예술비엔날레에 소개된 이 작품은 목가적인 숲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숲은 도넛이라는 하나의 물체로 인해 혼란을 겪는데 이 혼돈을 통제하는 것은 숲과 도넛, 그리고 관람자 사이에 존재하는 세 개의 강화 유리판이다. 다만 속이 비치는 탓에 관람자는 유리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으스스한 음악과 함께 등장한 개미가 도넛 바깥에서 기어가는 모습을 통해 어느 순간 평평하고 투명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첫 번째 유리판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급작스럽게 깨지면서 통제된 상황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작가가 나타나 마커로 벤 다이어그램을 그림으로써 또 하나의 유리판이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마지막 유리판까지 산산조각이 나고 질감이 도드라지는 숲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면서 관람객과 배경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남지 않았음이 암시되고, 유리 파편과 도넛, 그리고 기어 다니는 개미를 한 번에 보여주는 것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유리판을 파괴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여러 존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사사모토는 획득과 상실을 반복하는 통제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곧 견고한 표면과 시나리오에 대한 개념을 분해하는 것으로, 이는 작품 속 행위소였던 유리판, 도넛, 개미, 그리고 이들의 배치를 통해 가능하다. 요컨대 영상 작품과 함께 발표된 시를 인용하면, 이들의 결합은 “모든 시나리오는 발효(all possible scenarios ferment)”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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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가 발효됩니다. […] 유령은 침대 옆 의자 밑과 방치된 절구와 꽃병 안에 미루기의 상징을 붙입니다. 사물은 차례로 유령의 안개가 자욱한 옷 바닥에 소변을 봅니다. 그렇게 다른 모든 유령들이 격주로 숲에서 열리는 이사회에서 여러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하세요.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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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이 작품 속 중요한 또 하나의 행위 주체는 바로 유령이다. 사물들의 ‘무행동(inaction)’은 유령 덕분에 차차 가시화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물들의 ‘소변 행위’는 견고해 보였던 시나리오를 발효시킬 수 있게 된다. 이때 ‘시나리오’란 곧 인간만을 행동의 주체로 여겼던 전통적인 패러다임으로 바라볼 수 있다.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곁을 에워싸는 존재들을 조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각은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donut’ 사이에 의도적으로 공백을 삽입함으로써 부정문으로 읽히게끔 고안하여, 다이어그램을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특히 영상에서 작가가 그렸다가 이윽고 지워내는 벤 다이어그램은 집합의 관계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도식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종합적으로 복잡한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역동적이고 탄력적인 배치로 구성된 집합과 거기서 발생하는 창발적인 힘을 추구하는 사사모토에게 있어 벤 다이어그램은 사라져야 마땅한 것임이 분명하다.
아울러 작가가 '발효(fermentation)'라는 단어를 이용한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효란 효모나 세균같은 미생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효소를 이용해 유기물을 분해시켜 유익한 물질을 생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만약 미생물에 의한 유기물의 분해 과정과 이에 따른 변질이 해로운 경우에는 ‘부패(rotting)’라 지칭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작가가 시나리오를 ‘발효’시키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활기를 지닌 행위소들의 결합에 따른 창발적 결과를 이로운 것으로 바라보고 여기서 나타나는 생동성을 시각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사모토는 행위소들의 집합을 매력적인 퍼포먼스로 변화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 생기적인 물질성을 지각할 것을 주장한 제인 베넷과 맞닿아 있다. 사실 베넷의 견해는 제대로 된 정치적, 윤리적 기획을 끌어낼 수 있는 책임 있는 행위의 개념이 없다는 점에서 종종 비판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생기적 유물론의 시각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자각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생동하는 물질로서의 경험을 추구해가는 일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뿐 아니라 인간 주변을 둘러싼 물질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행위 주체들의 역동성을 가시화시키는 사사모토의 작품은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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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의 ‘생존일지’”-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
최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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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작가로 활동하는 안성환(Ahn Sung Hwan, 1989-)은 개인으로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내에서 살아가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예술 활동을 바라본다. 자신의 포트폴리오 제목을 “안성환의 생존일지”라 지을만큼 작가에게 예술 활동 전반은 신체의 안위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안위까지 포괄하는 존재론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작가의 작업에 드러난 주요한 관심사는 스스로의 ‘생존’과 그 ‘전략’으로, 그는 생존에 필요한 도구(props)를 제작하고, 도구를 사용할 상황과 사건을 기획한다. 이에 그의 작품은 조각과 설치뿐만 아니라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즉, 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이용한 소품 제작을 포함해 퍼포먼스와 워크숍이라는 다원적인 형식으로 표현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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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안성환, Walking Billboard, 2022, PROPS(T-SHIRTS), S/ M/ L/ XL/ XXL, Dimensions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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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안성환, Nice Ahn! Nice Artist!, 2022, PVC banner/ Scaffolds/ Stone, 450 X 700 x 60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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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안성환 작업 전반에 나타난 ‘생존’의 함의를 제인 베넷의 정치생태학적 관점에서 밝히기 위한 시도이다. 본디 생존(生存, survival)이란 ‘생존자', ‘생존수칙' 등의 단어 활용 범위를 살펴보았을 때처럼 ‘생물학적인 생명 유지'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live)'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수행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을 포함하므로 필히 사회적 차원과 맞닿게 된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 안성환은 생물학적으로 생존해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생존을 욕망하며 생존의 함의를 넓힌다. 또한 예술 활동을 통해 특별한 과정을 거쳐 신체를 물질화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자신의 부산물이자 행위소로 이해하며 세상에 적극적으로 퍼트리는 전략을 펼친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제작된 그의 초기 작품은 그가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에 ‘작가’의 지위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으며, 2019년 이후 보다 실험적인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안성환은 자신이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자신의 작품을 사회 구조에 편입시킨다. 그 방법으로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 선보이는 데 있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연루시키고자 한다. 작가는 아트페어와 갤러리를 위시한 예술 작품에서의 경제 논리를 유희하고, SNS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차용하며, 소품의 제작과 판매로 소비문화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내에서 사회 구조를 이용한다.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담은 안성환의 포토폴리오인 ‘생존일지’에서 작가는 작품 목록을 “생존이라 불리는 사건들(events)”이라 표현한다.1) 그렇기에 그의 주요한 관심사인 ‘생존’은 행위를 내재한 ‘사건’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단지 생물학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안성환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고유성을 규정해줄 수 있는 얼굴, 몸체, 향, 심지어 전화번호까지 사건화하고 이를 생존과 연결지어 절박하게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그는 사건을 통해 자신의 부산물들 세상에 퍼트리기 위한 도구를 O.E.M으로 제작하는데, 자신의 얼굴 사진과 전화번호가 적힌 티셔츠를 제작하고, 같은 그래픽을 활용하여 공원 한가운데 전광판을 세우는 식이다(도1, 2). 그리고 얼굴을 석고로 캐스팅하여 실물 크기의 조각상을 만들고, 조각상에 줄을 매달아 네덜란드와 한국의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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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3) 안성환, Seoul Ejaculation, 2023, Props, Ahn Sung Hwan plaster head, Dimensions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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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안성환, Ejaculation; My Scent, 2020, perfume 100ml, essential oil from Ahn, Dimensions Variab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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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의 ‘사건’은 수 많은 비인간적 요소-티셔츠, 전화번호, 전광판, 석고의 무름 정도, 바닥의 돌, 밧줄의 장력-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기에 안성환이 만들어낸 ‘도구’와 이 도구들이 안성환과 만들어낸 ‘사건’은 인간과 비인간의 행위 능력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과 결합된 비인간의 행위 능력은 곧 작품에 무한정한 변형을 창출해낸다. 결국, 작가의 “생존이라 불리는 사건들”은 배치 안에서 창발하는 비인간의 행위 능력과 그 변형 과정을 포함하기에, 그의 생존 전략은 자신의 부산물인 예술 작품-비인간 행위소-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함께 행위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베넷의 정치생태학적 관점에서 안성환의 작품이 ‘정치’를 행하는 공중(public)의 일원이 되는 지위를 가지는 것이 된다. 흥미롭게도 베넷의 논의를 따라 확대된 비인간 ‘정치'가 가능하게 된 안성환의 작품은 경제 제도와 미술 제도를 거치며 인간 주체의 사회적 위치짓기로까지 나아가가게 된다. 그렇기에 비인간과 함께하는 그의 사건적 생존은 ‘생명’ 이상의 존재론적 안위를 보장받는 지위와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특히 본 글에서 주목할 <Ejaculation; My Scent>(2020)은 자신의 향을 추출해 향수로 제작하고 향수병에 담아 상품화한 작품으로, 이후 <Sweet!>(2023)을 통해 그 향이 담긴 거대한 풍선을 만들어 전시 공간에 퍼트림으로써 자신의 향이 세상에 퍼지는 사건을 기획한다(도 4, 5). 그는 <Ejaculation; My Scent>에서 자신의 작품을 ‘사정(ejaculation)’이라 칭하며 자신의 일부이자, 잠재를 지닌 행위소로 규정한다. 인간의 사정은 생리학적 반응의 부산물인 정자를 배출하여 새로운 인간의 출생을 이끌어내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성환이 작품 제목을 ‘사정’이라 짓고 그 결과물로 ‘향’을 제시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냄새 입자를 ‘정자’로 은유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정자들을 세상에 퍼트리기 위함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베넷의 ‘의인화'에 따라 안성환의 규정을 경유해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2) 베넷은 자연과 인간의 동형 관계에 주목하며 세계가 주체-객체로 이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 서로 얽혀있는 물질성의 세계가 존재함을 발견했다고 말한다.3) 베넷이 의인화에 주목한 방식은 안성환이 세상에 퍼진 그의 냄새 입자를 정자라 규정한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기에 정자로의 은유는 안성환이 비인간인 예술 작품의 행위력을 인간의 생식 능력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생존’을 위한 노력은 인간이 흩뿌리기를 행한 것을 초과하여 비인간의 행위력을 통해 다양하게 구성되어 연합을 형상하는 물질성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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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안성환, Sweet!, 2023, Ahn Sung Hwan perfume, PVC liquid tank, 750 x 600 x 340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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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의 작품은 다양한 연합체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과 전시하는 방식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Ejaculation; My Scent>(2020)에서 작품을 이루는 주요 매체인 ‘향’은 ‘상품 경제’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도달한다. 그는 전문가와 협업하여 O.E.M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마치 상품처럼 디스플레이 한다. 다시 말해 작품은 ‘향’을 유통하는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상품 경제를 둘러싼 제도에 침투하게 된다. 또한 ‘작품'이라 명명된 향수는 상품 경제의 외견 가운데 미술 제도에 닿게 된다. 작품의 제작과 전시의 과정에서 상품 경제를 경유한 작품은 다시 미술 제도와 결탁하여 계속해서 지위와 위치가 변화된다. 다시 말해, 미술 작가로서 그의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그의 ‘향’은 상품 경제 논리에 따라 가격이 상승할 뿐만 아니라, 전시장에 찾아가 그의 ‘향’을 맡는 경험은 특별한 일회적 경험, 즉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의 의도를 넘어 그의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비인간 행위소의 행위력과 제도는 그의 작품이 배치 속에서 스스로 ‘조작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작품의 제작-전시-제도의 순환은 인간 주체의 생존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인간 주체를 넘어서는 존재력으로 남게된다. 이에 안성환의 예술 활동을 통한 ‘생존 전략’은 다양한 비인간 행위소의 행위력에 기대어 확장된 존재론을 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수많은 비인간 행위소의 배치에 참여함으로써 비인간의 정치적 행위 능력을 규명함으로써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 짓기를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신자유주의 내의 존재론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펼쳤던 전략은 비인간의 생태정치와의 합작으로 수행될 수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물질적 세계를 작품에 연루시는 방식으로 자연과 문화의 동형 관계에 주목하며 비인간과 함께 사회적 위치짓기를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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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성환의 포토폴리오와 홈페이지 https://www.ahnsunghwan.net/ (2023년 6월 10일 검색). 2) 베넷은 생기적 유물론에서 인식의 의인화적 요소는 반향과 상의 세계 전체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베넷은 우리가 의인화를 통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존재 범주(주체와 객체)로 가득한 세계가 아닌, 다양하게 구성되어 연합을 형성하는 물질성의 세계를 발견해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된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의인하는 여러 범주적 구분을 아우르는 유사성을 드러내고 ‘자연’의 물질적 형태와 ‘문화’의 물질적 형태 사이의 구조적 평행을 드러내며 둘 사이 동형 관계를 조명할 수 있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 246-247.
3) 앞의 책,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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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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