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열 번째 뉴스레터] 다종적 생태계: 접합과 교차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열 번째 레터는 인류학자 에두아르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Eduardo Viveiros de Castro, 1951-)의 '관점주의(Perspectivism)'에 착안하여 두 작가의 작품을 분석한 글이다. 인류학의 전개 과정을 재규정하고자 까스뜨루가 제시한 관점주의는 이 땅의 모든 존재를 재사유하도록 이끈다. 중심부와 주변부가 나뉘어있지 않고 서로 돌보아야 하는 삶이 왜 긴요한 것인지 설파하는 두 예술가의 얘기를 까스뚜르의 관점주의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①쿠도 테츠미(Kudo Tetsumi)의 새로운 변종적 생태학] [②<아이쿠알리아>: 인간과 비인간의 인류학적 교차점] |
까스뜨루의 관점주의(Perspectivism)
브라질의 인류학자 에두아르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Eduardo Viveiros de Castro, 1951-)는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Cannibal Metaphysics: For a Post-structural Anthropology』(2009)에서 관점주의 개념을 통해 기존의 서구중심적 인류학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까스뜨루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아메리카 정복에 관한 우화에서 ‘두 가지 인류학 사이의 충돌’을 관점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우화에서 드러나는 자기종족중심주의는 오히려 타자와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노출시킨다. 즉, 유럽인인 ‘동일자’의 타자는 자신이 원주민인 ‘타자’의 타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동일자’는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타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까스뜨루는 이로부터 서구 인류학의 대칭적이고 전도된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타인류학(alter-anthropolgie)을 고안해냈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기종족중심은 유럽인과는 달리 다른 영혼이나 정신도 원주민의 ‘신체’와 물질적으로 유사한 신체를 갖출 수 있는지 의심하는 데서 성립했다.1) 단순한 상대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까스뜨루의 관점주의는 세계는 시점들의 다양체(multiplicité)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의 단일성(unité)과 신체들의 다양성(diversité)이라는 기본 전제를 공유한다. 다시 말해 관점주의에서 영혼이 있는 동물 및 다른 비인간들은 자신을 하나의 ‘인격(personne)’으로 간주하며, 까스뜨루는 관점주의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하는 다양체 –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상현상, 인공물–들이 살고 있는 다우주(multiverse)를 논하고자 한다.2) |
1)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박이대승, 박수경 역 (후마니타스, 2018), 29-34. 2) 앞의 책, 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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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도 테츠미(Kudo Tetsumi)의 새로운 변종적 생태학 |
이믹(emic)과 이틱(etic), 은유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재현과 실재, 가상과 진리 등 이원론들이 의심스러운 이유는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칙상 유해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원론들이 특히 두 세계의 주민을 차별하는 것을 두 세계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 요구하는 데에 있다.1) - Eduardo Viveiros de Castro, 『식인의 형이상학』(2009)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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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아방가르드 작가 쿠도 테츠미(Kudo Tetsumi, 1935-1990)는 이러한 까스뜨루의 오래된 서구 중심사상과 유럽 중심의 우월론에 관해 비판적 시각이 제시되기도 전, 1960년대부터 서구인의 이원론적 가치 체계를 공격대상으로 삼아 작품을 이끌어 나갔다.2) 일본의 전후 상황에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핵무기는 되려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인본주의에 내재한 이율배반적인 성격의 원폭 경험은 쿠도에게 작가로서 발언권을 손에 쥐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태평양전쟁 속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성은 필연적으로 미국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극복해내거나 또는 비판해야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쿠도는 이에 관해 자신이 꾸며낸 ‘가상적 변종 생태계’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한 ‘가상적 변종 생태계’는 말 그대로 가상의 변종 형태이기에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무 그루터기, 못, 머리카락, 전깃줄, 검은색 테이프, 밧줄, 전구, 플라스틱 튜브, 전선, 페그 보드, 합성수지, 필름 카트리지 등 그는 까스뜨루와 내기라도 하듯 이 땅에 소속된 다양한 요소들로 콜라주 조각과 설치작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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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 1) Kudo Tetsumi, Grafted Garden/Pollution—Cultivation—New Ecology, 가변 크기, 1970-71 |
2. 파편화되고, 분절되고, 변형되는 쿠도의 작업은 서구의 이분화된 지식체계를 지속적으로 차단하는 가림막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 쿠도의 <Grafted Garden/Pollution—Cultivation—New Ecology>(1970-71)는 인조 잔디 위에 플라스틱으로 재현한 손과 발, 얼굴 같은 신체 조각과 모조 장미, 튤립, 국화 등을 심은 꽃밭이다(도 1). 화단 주변에는 포자와 달팽이, 남근의 모양을 한 버섯 등이 흙 위로 흩어져 있다. 인공화단 위에서 서식하는 식물, 생명체, 인공물과 파편화된 신체의 조화는 쿠도가 제시한 ‘새로운 생태학(New Ecology)’의 관점을 보여준다. 쿠도가 꾀한 이러한 반전의 형태는 우리가 개체들을 구체화하고 명시하며 '차별화하는' 문화 속에서 체화한 독해의 틀을 빼앗는다.3) 그가 인간과 비인간 요소 간의 관계를 낭만적으로 해석했던 것 같진 않지만, 그가 창조한 가상 생태계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공물이 상호 생존을 위해 통합되는 가까운 미래의 ‘잠재적 생태학’의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킨다. 쿠도의 예술은 우리의 단선적인 이해체계를 빼앗는 대신, 모든 다양성을 가시화함으로써 비실재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을 바깥으로 꺼내어져 읽히도록 함에 있어 탁월한 역할을 한다. |
 | (도 2) Kudo Tetsumi, Pollution—Cultivation—New Ecology, 가변 크기, 1971-72 |
3. 쿠도의 도발적인 작업은 인간형상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형광색으로 도색된 기이한 변종 생물이 가득찬 세계로 전개된다. ‘새로운 생태학(New Ecology)’의 연작으로 이어진 <Pollution—Cultivation—New Ecology>(1971-72)는 왼쪽 하단부에 사람의 손으로 보이는 형상이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지워져, 바다에서 자라는 해초처럼 보이기도 한다(도 2). 전작과 동일하게 출현한 꽃들의 외양은 금방이라도 시들 것처럼 머리 부분이 축 내려앉아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광빛의 초록과 주황, 보라색의 색채는 오히려 강한 생명력으로 증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쿠도가 일군 괴(怪)세계는 형상을 잃어가는 신체의 파편과 죽어가는 식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생기를 띠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실제의 삶과는 유리된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이로써 전작을 통해 보여주었던 ‘잠재적 생태계’에서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미래 생태계’를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의 질서정연한 외양을 뒤틀어 충격을 전하는 쿠도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나와 타자', '현실과 관념',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전복시키고, 다성적 세계의 비인간적 감각을 일깨운다. 쿠도의 작품에서 분절된 신체가 흐릿하게 비인간 요소들과 뒤섞여 공존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한낱 다른 생물과 살아 숨 쉬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느껴진다. 까스뜨루는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만 동물과 정신들은 우리를 비인간처럼 보면서, 그들 자신을 인간처럼 본다는 것을 강조한다.4) 이를 주지하며 쿠도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까스뜨루가 제시한 비인간 주체가 지닌 ‘인격성(perconnitude)’ 또는 ‘관점성(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의 시각 체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 |
4. 쿠도의 작품에 등장하는 해초 형상의 손가락, 누에고치 혹은 버섯을 닮은 페니스, 사멸하며 동시에 증식하는 꽃 등의 ‘정상’ 체계에서 ‘기이한’ 형상으로 변형되는 이미지는 쿠도의 '모든 인류가 급진적인 변화 또는 변태를 겪을 수 있다'는 믿음을 반영한다.5) 쿠도가 구축한 변형된 성질이 반복적인 구성을 이루는 생태계에서는 모든 요소가 혼성되어 나타나므로 동종집단들 간의 차이도, 유사성도 좀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이 역시 “이제까지 보잘 것 없던 한 존재자가 인격의 형상을 한 채 인간의 일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있는 행위자처럼 자신을 드러낼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다”는 까스뜨루의 말대로 주류를 이루었던 서구적 사유를 거슬러 야생, 즉 원주민의 사유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6)
오래된 서구의 이원론적 관점에 도전하고 이를 비판코자 작가로서 도약을 시도했던 쿠도의 예술은 점차 그의 공생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변화했고, 쿠도는 ‘인간’과 ‘자연’, 또 그 삶에 침투한 ‘인공’ 요소까지 수용하게 되면서 그만의 예술적 조형성을 갖추었다. 즉, 쿠도는 일관되게 새로운 차원의 '초인종적, 초국적, 초문화적' 경향을 지향하며 그만의 기발한 시각적 어휘를 창조한 것이다. 쿠도는 보편타당하게 여겨왔던 현실의 모든 가치 체계에 반문을 제기했으며, 그가 작고한 지금에도 우리는 작품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쿠도가 살았던 앞 세기보다 그의 예술이 긴요한 시점은 현 세기가 아닐까? 쿠도의 예술이 가진 큰 울림은 인간이 발 디디고 있는 이 세계가 사실 모든 것이 발 디디고 있는 장소임을 자각하면서 시작된다. 혼종적 정체성으로 대변되는 쿠도의 생태계는 단지 감상에 적합한 조각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어떠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써 내려왔듯 그의 작품이 우리가 의존해온 서구의 이원론적 체계를 마주하게 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강력한 저항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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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박이대승, 박수경 역 (후마니타스, 2018), 54. 2) 임근준, 『이것이 현대적 미술』 (갤리온, 2009), 56. 3) 비베이루스와 동일한 선상에서 이원론적인 인류학에 관해 성찰적 재평가를 촉구하는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1949-)에 따르면, 하나의 자연을 바라보는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는 구별된다.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자연은 하나의 자연이자 근대 서구철학이 이해하고 있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서구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비서구 문화에서는 문화와 자연이 서구의 것과 같이 확연히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대다수를 차지하며,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자연'의 개념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 이를 성찰하지 않고 근대적 이원론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다 쓰는 인류학은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학문적 유럽 중심주의에 치우치게 된다. 필리프 데스콜라, 『타자들의 생태학』, 차은정 역 (포도밭출판사, 2022), 45-53. 4)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43. 5) Steven Zultanski, "Tetsumi Kudo," Frieze: Contemporary art and culture Issue (2020), 151. 6)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4. |
 | <아이쿠알리아>: 인간과 비인간의 인류학적 교차점 이민정 |
반짝이는 비늘로 뒤덮인 반인반어(半⼈半⿂)의 형상이 잔잔한 물결 위를 유영하며 파동을 자아낸다. 햇빛을 받아 붉은색과 금색을 반사하는 꼬리지느러미는 마치 물속에서 한들거리는 금붕어의 그것 같기도 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러나 꾸준히 물살을 가로지르며 이동하던 그는 아마존강에 서식하는 분홍돌고래인 보투(Boto)와 조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 형상은 술리몽에스강의 우윳빛 물과 네그로강의 검은 물이 합류하는 지점을 헤치며 나아간다. |
 | (도 1) 에밀리아 스카눌리터, <아이쿠알리아>, 단채널 영상 설치, 9분, 2023, 이미지 작가 제공 |
작가가 직접 아마존 주변의 여러 강들을 수영하며 촬영된 이 작품은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Soft and weak like water》(2023)에 출품된 에밀리아 스카눌리터(Emilija Škarnulytė, 1987-)의 <아이쿠알리아 Æqualia>(2023)이다(도 1).1) 작품 속 스카눌리터는 직접 물고기가 ‘되어 봄’으로써 – 그는 팔조차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꼬리지느러미만으로 헤엄친다 – 인간과 비인간의 오래된 이분법을 극복하고 비인간 주체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본고에서는 <아이쿠알리아>에서 드러나는 인류학적 교차에 주목하여 해당 작품을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에 입각해 분석하고자 한다. |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아이쿠알리아>: ‘동물-되기’로써의 소통 시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류학, 즉 까스뜨루가 서구중심적 인류학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타인류학에서 영혼은 원주민 지적 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이로써 다른 것보다 특히 서구 인류학에 의해 그려진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역서술할 능력”을 가진다.2) 스카눌리터의 <아이쿠알리아> 또한 영혼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주의의 대전제에 의거해 해석해볼 여지가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 몸으로 직접 아마존 주변의 여러 강들을 항해한다. 이때 <아이쿠알리아> 속 세계에서, 어류의 꼬리지느러미를 착용한 작가는 더 이상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개체가 아니다. 그는 타인류학적 용어로 ‘동물-되기’를 시도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비인간이 유사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양팔을 몸에 꼭 붙인 채 가슴을 누르며 수면 아래를 잠영하는 그는 상공에서 보았을 때 돌고래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영상 속에서 두 마리의 보투와 만나 아마존강을 함께 헤엄쳐 나간다. 이때 스카눌리터가 착용한 꼬리지느러미 수트는 일종의 가장(masquerade)이며, 실제 돌고래의 몸과는 물리적으로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스카눌리터의 <아이쿠알리아>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소여(所與)로서의 영혼에서 출발해 ‘신체를 만드는’ 과정 자체이다. 작품 속 키메라적 형상은 돌고래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자연’과 ‘문화’라는 서구 근대 철학의 오래된 이분법을 교란시킨다. 이처럼 스스로의 관점을 변형시켜 다른 개체와의 소통을 시도한 스카눌리터의 작품은 까스뜨루의 타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다양한 유형의 행위주(actant) 및 행위자들이 살고 있는 우주적 차원으로 향한다.3)
한편, 영혼들이 유사하다고 해도 그 영혼들이 표현하거나 지각하는 것이 공유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까스뜨루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 정신, 그리고 다른 우주적 행위주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그러한 존재자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 및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4) <아이쿠알리아>의 후반부에서 작가가 도달하는 술리몽에스강과 네그로강의 명확한 색채 대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안데스 고원의 점토가 섞인 술리몽에스강의 황톳물과 산성을 띠는 네그로강의 검은 물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경계를 헤치며 나아가지만, 그가 지나간 후에도 소용돌이치는 강물은 여전히 그대로 분리된 채 남아있다.
이처럼 내가 아닌 다른 행위주의 신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물리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며, 인간중심적 사고를 대체할 궁극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쿠알리아>를 통해 원주민적 프락시스에 착안한 ‘동물-되기’를 시도한 스카눌리터의 수행은 비인간 주체들을 이해하고,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까스뜨루는 종들 사이의 신체적 장벽을 횡단하며 다른 주체들의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는 적극적 교섭자로 샤먼을 상정했으나, 스카눌리터는 이러한 매개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시적인 변형을 통해 자신이 직접 비인간 주체가 되어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같은 작가의 ‘동물-되기’는, 영상 속 뚜렷하게 갈라진 술리몽에스강과 네그로강처럼, 완전한 합일점을 이루지는 못한다. 또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에서도 인간과 비인간 주체들 사이에서 유연한 호환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비판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신체로 직접 그 경계를 넘어서며 우주 속 다양한 구성체들과의 소통을 도모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아이쿠알리아>에서 스카눌리터가 수행한 신체화는 비인간 행위주들과 교류하고자 한 시도 자체로서, 자기종족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하나의 실마리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
1) 스카눌리터가 수년간 수집한 아마존 열대우림을 둘러싼 다양한 형태의 물에 대한 영상을 결합한 설치 작업인 <아이쿠알리아>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비인간 세계의 관계를 다룬다. 이숙경 외,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가이드북』 ((재)광주비엔날레, 2023), 124. 2)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박이대승, 박수경 역 (후마니타스, 2018), 39. 3)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개념에서 actant는 행위의 원천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행위소’로 번역되지만, 본고에서는 까스뜨루의 국내 번역서를 참고해 이를 ‘행위주’로 통칭한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 9-10. 4)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식인의 형이상학』, 42. |
이번 호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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